우리는 모든 것과 연결되어 있다.
데카르트는 좌표계를 통해 도형을 숫자로 표현하는 것을 가능하게 하였다. x축과 y축이 있으면 2차원의 평면을 표현할 수 있다. 여기에 z축이 하나 더해지면, 3차원의 공간까지 표현 가능해진다. 공간에서 '차원'이란 위치를 이야기할 때 필요한 좌표의 수라 생각하면 될 것이다. 인간의 눈은 2차원 즉 평면으로 사물을 본다. 하지만 만지고 경험한 것이 있기 때문에 3차원 공간으로 세상을 이해하고 있다. 그런데 우주는 11차원까지 있다고 하니, 인간이 경험하고 이해하는 것 너머의 세상이 무궁무진함을 알 수 있다. 차원, 그 너머에는 무엇이 있을까?
1차원의 공간은 점으로 존재한다. 직선상에서 오른쪽과 왼쪽으로 이동하는 것이 가능할 것이다. 만약 1차원의 공간만을 이해하는 존재가 있다면 그 존재는 모든 것을 점으로 인식하게 될 것이다. 그것이 빵이든 신발이든 간에 말이다. 그렇다면 인간은 시간을 몇 차원으로 인지하고 있을까? 시간은 과거, 현재, 미래로 흘러간다. 적어도 인간의 인식체계 안에서는 그러하다. 시간이 점으로 존재한다고 가정했을 때, 시간은 한 방향으로만 흘러간다. 인간은 시간을 0.5차원으로 인식하는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동양의 시간관이다. 동양의 종교에서는 순환과 윤회에 관하여 믿음을 가진다. 동양은 순환적 시간관을 가진다. 인간이 차원, 그 너머의 세상에 대해 이해한다면 시간도 공간도 상당히 입체적일 것이다. 흘러가는 시간이 파노라마처럼 보일 것이고, 공간 역시 시간을 누적하여 보일 것이다. 지금 여기 이 시공간의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을 것이다.
엔트로피란 에너지의 흐름을 설명할 때 이용되는 상태 함수이다. 엔트로피는 오로지 증가하기만 한다. 물컵에 떨어진 잉크 한 방울은 퍼져나가기만 하는 것이다. '엔트로피'라는 단어를 생각하면 내가 여기 존재하게끔 펼쳐진 수많은 인연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마태오 복음서 첫 장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가 적혀있다. 「아브라함은 이사악을 낳고 이사악은 야곱을 낳았으며 야곱은 유다와 그 형제들을 낳았다. 유다는 타마르에게서 페레츠와 제라를 낳고 페레츠는 헤츠론을 낳았으며 헤츠론을 람을 낳았다. …… 엘레웃은 엘아자르를 낳고 엘아자르는 마탄을 낳았으며 마탄은 야곱을 낳았다.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는데,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고 불리는 예수님께서 태어나셨다.」 신약의 첫 부분을 읽었을 때, 밀려든 감동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아무런 판단이 들어가지 않은 이 문장들을 나는 읽고 또 읽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은 치열했을 것이다. 어느 누구 하나 생로병사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문장은 단순하다. '예수님께서 태어나셨다.'라는 부분이 나올 때까지, 단 하나의 이름도 빠져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138억 년 전 빅뱅으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게 되면 엔트로피는 '0'이 된다. 빅뱅 이후로 엔트로피는 증가해 가고 있다. 억 겹의 인연들이 공간 속을 흘러간다.
아픈 시간 뒤에 성숙해지는 때가 온다. 노력의 시간 뒤에 성취의 때가 온다. 방탕한 시간 뒤에 아쉬움이 오게 되고, 무책임한 시간 뒤에 후회가 밀려드는 때가 온다. 대체로 그러하리라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아팠으나 성숙하는 때가 오지 않을 수 있고, 노력했으나 성취의 때가 오지 않을 수도 있다. 방탕했으나 당당할 수도 있고, 무책임했으나 떳떳할 수도 있는 것이다. 이렇게 다른 결과 값을 가져오는 이유는 각자만의 에너지가 다르게 형성되어 있어서 '경우의 수' 즉 '엔트로피'가 사람마다 다른 방향으로 작용하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도로는 수많은 자동차로 가득하다. 우리는 자동차를 그냥 자동차로 인식한다. 하지만, 자동차 한 대에 들어가는 부품의 개수가 3만여 가지라는 이야기를 들으면 자동차가 달리 보이기도 한다. '나'는 그냥 하늘에서 뚝 떨어진 존재가 아니다. 내가 있기까지 수많은 삶들이 있어왔다. 지금 여기 이 공간에 존재하기까지 내 삶 깊숙이 관여한 인연들도 있고 스쳐간 인연들도 있다. 드라마 한 편과 책 한 권, 한 줄의 시도 내가 '나'이게끔 인연한 것들이다.
인간은 고작 3차원을 이해하는 존재이다. 하지만 더 많은 차원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보이지 않는 영역에는 수많은 인연들이 켜켜이 쌓여 있을 것이다. 나는 엄마 아버지의 딸이고 내 아이들의 엄마이며, 남편의 아내이다. 동시에 사회의 한 구성원이고, 누군가에게 둘도 없는 친구이기도 하다. 내가 아닌 모든 것들로 인하여 '나'는 존재한다. 공기가 있으니 숨을 쉬는 것이고, 마음이 있으니 생각하는 것이다. 세상 모든 것들이 사라지면 나 역시 사라진다. 세상과 나는 하나로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사주팔자의 에너지를 지닌 한 사람이 삶을 살아간다. 이 사람은 삶을 1차원으로 이해한다고 가정해보자. 첫 번째 가정, 어느 날 이 사람은 자신이 큰 병에 걸린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슬퍼서 모든 것에서 손을 놓아 버린다. 두 번째 가정, 어느 날 이 사람이 로또에 당첨이 된다. 이 사람은 세상을 다 가졌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대체로 삶을 1차원으로 이해한다. 갑자기 닥친 불행에 좌절하고, 갑자기 던져진 행운에 기뻐 날뛴다.
어떤 사람이 큰 병에 걸리게 되었다. 아파서 아무것도 할 수 없게 여겨진다. 모든 것에서 손을 놓아 버리고 죽을 날만을 기다린다. 그런데 병원으로부터 연락이 온다. 오진이었던 것이다. 어떤 사람이 로또에 당첨이 된다. 이 사람은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기뻐 날뛴다. 그런데 로또 종이를 넣어 둔 바지를 아내가 세탁기에 넣고 돌려버렸다. 종이는 형체를 잃어버린 상태로 발견된다.
삶을 좀 더 높은 차원에서 바라볼 수 있게 하는 공부가 명리이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에서 나는 이 공부를 한다. 코 앞에 닥친 기쁨과 슬픔에 너무 마음을 뺏기지 말라고 이야기해 주는 것 같다. 기쁜 그 순간에도 슬픔은 존재하며, 슬픔의 순간에도 기쁨은 존재한다. 작년부터 아이가 많이 아팠다. 나는 큰 슬픔에 빠져 있었다. 직장을 휴직할 수밖에 없었고, 나의 모든 스케줄을 아이에게 맞춰야 했다. 그 과정에서 너무나 감사한 일들을 경험하게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진심으로 도움을 주었고 아이와 나는 용기를 얻었다. 명리 공부를 더 깊게 할 수 있게 되었고, <하루한장, 명리>라는 강의를 할 수 있는 시간이 주어졌다. 이렇게 글을 쓰고 생각에 잠기는 시간까지 덤으로 얻게 된 것이다. 아픔으로 시작된 사건의 실오라기를 슬슬 당겨보았을 때, 너무 많은 인연들이 우리에게 다가왔고 이해와 감사로 충만한 시간이 쏟아져 나왔다.
사주팔자 글자들과 운의 흐름을 보여주는 만세력은 마태오복음 첫 부분처럼 아무런 판단이 들어 있지 않다. 내가 명리에 매력을 느끼는 이유 중 하나가 이것이지 않을까 한다. 하나의 존재가 있기까지 억 겹의 인연이 있었던 것처럼 모든 사건들 또한 무수한 인연 가운데 있음을 보여줄 뿐이다. 우리는 모든 것들과 연결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