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돈을 벌지, 어디에 놀러 갈지가 인생 최대의 고민이던 단순한 삶 속의 나에게 아픔이 찾아왔다. 아들의 뇌전증은 내가 경험해 본 그 어떤 일보다 크게 고통스러웠다. 도대체 사랑하는 내 아들에게 그리고 나에게 왜 이런 가혹한 시간이 주어졌는지 삶이 원망스럽기도 하였다. 다른 건강한 아이들과 비교하며 좌절감을 느꼈고, 아이에게 경련이 찾아올 때마다 엄마의 마음은 지옥으로 향했다. 그 이후부터 어떻게 돈을 벌고 어떻게 소비하는가는 삶의 고민거리가 되지 않았다.
그 무렵, 박찬욱 교수의 <초인 수업>이라는 책으로 니체를 알게 되었다. 책을 읽는 내도록 가슴이 뛰었다. 그동안의 나는 위로와 동정을 바라는 연약한 존재였음을 확인하였다. 내게 찾아온 험난한 운명이 나를 넘어 나를 만나게 하는 귀한 경험임을 알게 되었다.
「가장 생산적인 최선의 인간이나 만족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며 이렇게 자문해보라. 하늘 높이 자라려는 나무들이 과연 비바람이나 눈보라를 겪지 않고 제대로 그렇게 자랄 수 있을 것인가? 외부로부터 가해지는 불운과 저항, 증오, 질투, 불신, 고집, 냉혹, 탐욕, 폭력은 덕의 위대한 성장을 위해서는 필수 불가결한 것이 아닐까? 그것들은 덕의 성장을 위해서 유리한 환경을 조성한다. -니체-」
길과 흉이 분리된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아이와 내게 찾아온 아픔으로 나는 조금 더 단단해졌으며 명리학을 공부하는 계기를 만나게 되었다.
아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많이 좋아졌다. 하늘이 무너질 것 같은 아픔들도 기억 속에서 사라져 갔다. 참으로 신기한 것이 삶에 대한 태도 또한 다시 이전으로 돌아왔다. 아이의 건강이 좋아지고 평범해 보이자 어디에 놀러 갈지가 큰 고민거리가 되어있는 내가 있었다. 영어는 이 학원으로 수학은 저 학원으로, 나는 아이에게 공부를 강요했다. 인간은 아니 나라는 사람은 이처럼 어리석은 존재이다.
나는 아이가 완전 좋아졌다고 확신했다. 그리고 남들처럼 공부를 많이 시켜야 한다고 판단했다. 아이는 건강이 좋아져 보였을 뿐이었다. 뇌가 불완전한 것일까. 뇌전증은 잦아들었으나 틱(뚜렛)이 슬슬 고개를 들이밀었다. 운명은 교묘해서 틱이 고개를 들이밀기 직전에 우리 가족은 이사를 하게 되었고 아이들은 전학을 하게 되었다. 전학을 하자마자 코로나 상황으로 인하여 등교가 정지되었다. 아이는 학교에 전혀 적응하지 못했고, 불안과 틱은 그 강도를 더해갔다. 급기야 틱으로 인해 숨을 쉬기 어려운 지경이 되었다. 다시 정신이 번뜩 들었다. 하지만 아이가 처음 뇌전증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만큼 좌절하지는 않았다. 마음이 찢어질 듯 아팠으나 아이와 내가 제대로 자라기 위한 과정임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확신을 바탕으로 판단하는 일에 대하여 경계해야 함을 다시 한번 뼈저리게 체험하게 되었다.
예수 천국, 불신 지옥. 나는 가톨릭 신자이지만 이 말이 참 듣기 싫다. (냉담한지 너무 오래라, 신자라 말하는 것에 죄책감을 느끼며...) 제사를 지내지 않으면 집안이 망한다는 이야기도 싫다. (종갓집 맏며느리인지라, 개인적 감정이 없지 않다는 것에 머쓱함을 느끼며...) 지금 최선을 다해 살지 않으면 다음 생에 동물로 태어날 수 있다는 이야기도 싫다. (최선을 다해 사는 것은 아닌지라, 혹시라도 동물로 태어날까 두려워하기도 한다는 사실에 쑥스러움을 느끼며...)
「확신에 대한 심리학, '믿음'에 대한 심리학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보자. 이미 오래전에 나는 확신이 거짓말보다 훨씬 더 위험한 지리의 적이 아닐까라고 숙고한 적이 있다. 확신은 확신에 사로잡힌 인간을 지탱해주는 기둥이다. 여러 가지 사물들을 보지 않는다는 것, 어떤 점에서도 공평하지 않다는 것, 철저하게 편파적인 입장을 취한다는 것, 모든 가치를 하나의 엄격하고 필연적인 관점으로 본다는 것 - 이것만이 확신에 사로잡힌 인간이 존속할 수 있는 조건이 된다. 그러나 그 때문에 그는 진실한 인간과 진리에 반대하고 그것에 적대하는 자가 된다. 신앙인에게 '참'과 '거짓'의 문제에 대한 양심을 갖는 것이 자기 뜻에 달린 것이 아니다. 따라서 그가 그 문제에 대해서 성실하다 보면 그는 즉각 파멸하게 된다. -니체-」
특정 종교나 체제에 대한 강한 믿음은 사람으로 하여금 자기가 어떤 일을 저지르는지도 모르게끔 강한 확신을 심어주기도 한다. 강한 확신으로 치러진 전쟁이나 테러 사건은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가기도 한다. 명리 공부를 하다 보면 강한 확신이 밀려들 때가 있다. 좋은 일이 있을 것이다. 혹은, 나쁜 일이 있을 것이다. 이 사람은 무책임할 것이다. 혹은, 책임 있게 일을 처리할 것이다. 이런 확신들은 나로 하여금 판단을 불러일으키게 한다. 내 입이 확신에 가득찬 판단을 내뱉을 때, 그래서 사주를 물어 온 상대방에게 어떤 영향력을 행세할 때 묘하게 달콤한 우월감이 밀려든다. 그 달콤함이 거듭되면 명리 공부는 심리 테스트와 같은 흥밋거리에 그치고 만다. 상대의 귀함을 생각지도 않고 내 입에서 말들이 쏟아지게 된다. 확신이라는 함정에 빠져버리고 마는 것이다.
명리를 공부하는 마음가짐이라, 이 역시 나라는 사람의 판단이고 확신일 수 있으니 참으로 조심스럽다. 어쨌거나 말았거나, 명리를 공부하는 마음가짐!!!
첫 번째, 존재의 귀함을 아는 것. 천상천하 유아독존, 시공간을 초월하여 '나'라는 존재는 오로지 지금 여기서 유일하다. '지금 여기'는 그냥 뚝딱 만들어진 시공간이 아니라 수없이 많은 인연의 결과물이다.
두 번째, 의도 없는 순수함으로 살아가는 것. 다수가 정해 놓은 기준으로 길과 흉을 구분하며 분별하여 판단하는 마음을 중단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존재가 귀함을 알았다면 길할 것도 흉할 것도 없는 일이다. 일어나기 마련인 일들이 일어나는 것이다. 기쁠 때가 되어 기쁜 것이니 기쁨을 만끽하면 될 것이고, 슬플 때가 되어 슬픈 것이니 슬퍼하면 되는 일이다. 끝없이 기쁜 일은 있을 수 없다. 끝없이 슬픈 일도 없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세 번째, 내 앎과 지식이 옳다는 확신을 언제나 경계하자는 것. '확신'만큼 감정을 치우치게 하는 것도 없을 것이다. 나는 옳고 너는 틀리다라는 확신은 많은 것들을 파멸로 치닫게 만든다. 사주팔자의 글자들이 넓은 스펙트럼을 가지고 있음을 이해해야 한다. 사주가 같아도 삶은 다르다는 것을 전제에 두었을 때, 확신이라는 함정에 빠지지 않고 공부를 이어나갈 수 있을 것이다.
니체는 보고, 생각하고, 말하고, 쓰는 법을 배워야 고귀한 인간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대상이나 상황에 대하여 속단하지 않고 여러 측면에서 검토하고 고민하며 천천히 바라보아야 제대로 볼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당장 눈앞에 결과값이 나오기를 기대할 때, 명리 공부는 어긋난 길로 접어들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내쉬는 숨과 들이쉬는 숨, 빛과 어둠의 움직임, 계절의 느낌을 통해 음과 양의 움직임을 바라보자. '그냥 그러한' 우주의 움직임에 관해 생각해 보자. 다수의 잣대로 제단 된 길흉의 판단을 중지하고 순수한 의도로 삶을 말해 보자. 이런 이해의 경험들을 글로 옮겨보는 것은 어떨까?
명리 공부의 마음가짐, 사실 거창할 것도 없다. 하나하나 바닥부터 쌓아 올라가는 공부인 것이다. 한 장 한 장 맞대어 쌓아 올린 돌담에서 답을 찾은 기분이다. 운문사에서 찍어 온 돌담 사진은 한 번씩 꺼내 보곤 하는 아끼는 사진이다. 살아가는 것도 명리를 공부하는 것도 운문사 돌담과 같으면 되지 않을까. 똑같은 모양과 크기의 돌은 단 하나도 없다. 각자의 자리에서 제 역할을 충실히 하고 있을 뿐이다.
한걸음 한걸음 나아가면 될 뿐이다. 조급할 필요도 없다. 저 돌담 틈새를 지나다닐 작은 바람을 생각하며, 철옹성 같이 굳건한 확신이 아니라 바람 지나다닐 틈을 남겨둔 여유 있는 마음을 한 장 한 장 단단하게 쌓아가야겠다 다짐한다. 명리를 공부하는 마음가짐, 결국 돌담을 쌓아가는 소박한 마음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