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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몽B Oct 22. 2021

의도 없는 순수함

명리는 길과 흉을 구분하는 공부인가?

  일간을 중심으로 오행의 상생상극과 음양을 따져가며 구분한 개념이 '십신'이다. 십신에는 비견, 겁재, 식신, 상관, 정재, 편재, 정관, 편관, 정인, 편인이 있다. 십신을 구체적으로 공부하다보면 내 사주에 정인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고, 편관과 같은 어려움은 없어져버리면 좋겠다는 마음이 들기도 한다. 그런 마음이 생겨나기 무섭게 흉하다는 의미의 '사흉신(四凶神)'이나 길하다는 의미의 '사길신(四吉神)'이라는 단어를 접하게 되면서 씁쓸함을 느끼게 된다.


  대체로 치우칠 편(偏)이라는 글자가 들어간 편재, 편관, 편인을 흉신으로 보고 겁재와 상관 역시 흉신으로 분류한다. 바를 정(正)이라는 글자가 들어간 정재, 정관, 편관을 길신으로 보고 비견과 식신 또한 길신으로 분류한다. 십신의 분류와 특성에 대한 이해까지 공부가 되었다면, 자신의 사주를 들여다보며 안타까움을 느껴가는 단계에 접어들게 된 것이다.


  십신을 공부하고 '격(格)'이라는 개념을 공부하게 되면, 격을 '길격'과 '흉격'으로 구분하게 된다. 더 나아가 길격이 잘 짜여 있거나 흉격을 잘 다루는 사주 구조라면 격이 이루어졌다는 '성격(成格)'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길격이 망가져 있거나 흉격을 다루지 못하는 사주 구조라면 격이 실패했다는 '패격(敗格)'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기도 한다. 여기까지 공부가 진행되었다면 사주 공부를 시작한 것에 대해 불만이나 만족과 같은 감정적 판단을 하게 된다. 내 사주가 길격이면서 성격되었다면 일단 만족인 것이고, 내 사주가 흉격이거나 패격되었다면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니게 되는 것이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서, 이런 '길흉(吉凶)', '성패(成敗)'와 같은 표현이 명리학 발전의 발목을 부여잡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명리 공부가 자칫 엉뚱하게 흘러가게 되면 끊임없이 길과 흉을 구분하며 잘 잘못을 따지게 된다. 끝도 없는 분별심을 불러 일으키고 불안과 망상 속에 자신을 가두게 되는 공부가 될 수도 있다. 명리 공부가 이런 방향으로 이어진다면 안하니만 못한 것과 같은 결과를 초래하는 것이다. 공부의 방향이 조금이라도 불안과 망상으로 흘러가고 있다면 잠시 손을 놓는 것도 방법이다. 명리 공부는 '그냥 그러려니'를 알아가는 과정이다. 모든 것이 있는 그대로 진리임을 말없이 보여주고 있을 뿐인 것이다. 따라서 분별심에 함몰되지 않고 중심을 잡는 이해가 공부보다 선행되어야만 한다.



  

  <오래된 미래>는 참으로 소중한 책이다. '의도없는 순수함'에 대해 생각하게 하며 '기준'에 대한 이해를 선사하는 책이다. 리틀 티벳이라 불리는 라다크는 히말라야 산맥의 고원에 위치하고 있으며 영하 20도를 넘는 겨울이 8개월 이상 지속되는 척박한 환경의 지역이다. 언어학자이며 환경운동가인 헬레나 노르베리-호지는 1970년대 중반 언어를 연구하기 위해 라다크를 방문한다. 그녀는 16년 간 라다크에서 생활하며 그들의 문화와 변화를 깊이있게 관찰하였고 그 통찰을 한 권의 책으로 펴냈다.


  작가가 처음 라다크에 들어갔을 때 라다크의 모든 사람은 행복했고 부자였다. 라다크는 물자가 매우 부족하므로 대부분의 것들을 재활용하며 생활했기 때문에 쓰레기를 전혀 배출하지 않았다. 그들은 자연과 함께하며 자급자족하는 공동체를 이루었고 전통 속에서 1,000년 이상 행복한 사회를 유지해왔다. 이런 라다크에 서양문물이 급격하게 유입되면서 전통적 가치관은 사라져갔다. 환경이 심하게 오염되었으며, 사람들은 만성 우울과 결핍을 경험하게 된다.


<이곳에 가난이라는 건 없어요 – 체왕 팔조르, 1975년>

<당신들이 우리를 도와줄 수 있으면 좋겠어요. 우린 너무 가난해요. - 체왕 팔조르, 1983년>


  부자가 거지가 되는 과정. 그것은 인간의 분별이 만들어 낸 망상에 불과하지 않을까? 체왕 팔조르라는 라다크인의 마음 변화가 너무나 충격적이다. 서구의 교육이 들어오면서 라다크인들은 자기가 속한 문화를 열등하게 생각하게 되었다. 심지어 자기 자신마저 열등하게 여기게 되어 버렸다. 부자와 같은 마음, 행복한 마음은 어디로 사라져버린 것일까. 인간의 분별 망상은 한 인간을 파멸시키기도 하고, 한 사회를 파괴시키기도 한다.


  지금 우리 사회는 양극화가 계속해서 진행되고 있다. 투자를 가장한 투기가 안락한 보금자리를 위협하고 있고, 돈이 돈을 불려나가는 일을 하지 않는 사람을 어리석게 여기기도 한다. 'seed money'라는 표현이 조금도 어색하지 않은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자본을 불려나간 사람은 길(吉)한 영역에 속하게 되었고,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흉(凶)한 영역에 놓여 만성 우울과 결핍을 경험하고 있다. 부자와 같은 마음, 거지와 같은 마음은 어디서 비롯하는 것일까. 우리는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라다크의 체왕 팔조르들이지 않을까.




  20년 전, 나름 풋풋한 대학생이었던 나는 나팔바지를 입고 다녔다. 나팔바지는 우리 엄마 세대들이 입었던 것인데 다시 유행이 돌아왔다며 너도 나도 입고 다녔다. 다리의 윤곽이 다 드러날 정도로 꽉 끼는 스키니가 유행하게 되자 통 넓은 바지들은 내 옷장에서 싹 사라져 버렸다. 나팔바지는 다시 촌스럽게 여겨졌고 도저히 입고 나갈 수가 없게 되어버린 것이다.


  옷이야, 머리 스타일이야 유행따라 이리 저리 변할 수 있다치자. 하지만 마음이라는 것이 환경에 의해 이리 부데끼고 저리 부데껴서야... 마음은 떡하니 중심을 잘 잡아야 한다고 생각은 하지만, 사실 마음이라는 것은 옷이나 머리 스타일이 유행따라 변하는 것보다 훨씬 빠르게 변화하며 그 변화의 폭 또한 우리가 상상하는 그 이상인 것 같다. 가만 생각해보면 길과 흉을 구분하는 그 '기준'은 항상 외부에 있어왔다.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는 일은 나만의 기준을 만들어 가는 일이 될 것이다. 내 안에 있는 '의도 없는 순수함'을 알아가려 한다. 다수가 정해 놓은 기준으로 길흉을 구분하는 것이 어리석은 일이라는 것을 어렴풋 알게 되었다.


  끊임없이 남과 비교하여 스스로를 못나게 만드는 내가 있는 것이다. 명리 공부도 마찬가지다. 끊임없이 길과 흉을 구분하며 나의 앞 날과 자식들의 앞 날이 행운으로 가득차 있기를 기원한다. 애석하게도 끊임없이 길한 삶도, 끝없이 흉한 삶도 없는 것이다. 행운인 줄 알았던 일이 그 끝에선 불행일 수 있다. 불행으로 다가온 일을 계기로 행운이 오기도 한다.


  명리 공부가 불안과 망상을 불러 일으킬 때, 라다크 주민 체왕 팔조르를 떠올려 보자. 불안과 망상의 실체를 그와 함께 히말라야 산맥으로 떠나 보내 버리는건 어떨까? 세상이 정한 다수의 잣대로 길흉을 구분하고 삶의 틀을 규정하는 일을 멈춰야겠다. 의도없는 순수함으로 여덟 개의 글자들을 공부해 보는 것은 어떨까. 태어나는 것이 기쁜 일이고 죽음이 슬픈 일이 아님을 글자들은 보여준다. 어느 누구도 생로병사에서 예외일 수 없는 것이다. 그냥 그러할 뿐인 것이다.


  길과 흉이라는 단어가 우리의 공부 속에 개념으로 존재하더라도 그 개념너머의 순수함을 바라보는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다수가 정한 기준을 뒤로하고 의도 없는 순수함으로 세상을 바라 볼 때, 어떤 운명으로 태어난 그 누구일지라도 그 사람은 존재만으로 완벽하다. 한 사람은 하나의 우주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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