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보화 시대 전후의 명리학

백민선생님과 인터뷰 3부

by 몽B


(제이선생님) 국제 역학 대회 이야기하며 중국, 대만, 일본, 우리나라의 명리학계에 대한 설명을 들었습니다. 이야기 나누는 중 계속해서 '하이텔 역학 동호회'에 관한 이야기가 계속 나오고 있습니다. 정보화 시대를 기점으로 그 이전의 명리 교육은 1대 1로 스승님 모시고 공부하는 도제식 교육이었다면, 그 이후의 교육은 또 상당히 다르게 전개되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그런 두 시절을 모두 경험하신 분이십니다. 정보화 시대 전과 후의 명리 교육의 차이점과 그렇게 흘러온 우리나라 근현대 명리학의 흐름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습니다.

(백민 선생님 ) 정보화 시대 이전과 이후는 상상 못 할 정도로 많은 차이가 있지요. 제가 처음 공부 시작할 때는 자료가 너무 부족했습니다. 70년대 말에 제가 공부를 시작했으니요. 서점에 가면 명리학 계통의 책은 몇 권 손으로 꼽을 정도밖에 없었지요. 출판사도 '명문당', '동양서적' 이렇게 두어 군데 정도 있었습니다. 그 정도로 책이 없었지요. 대만 서적을 번역하거나 편집해서 나온 책이 대부분이었습니다.


그 무렵, 자강 이석영 선생님께서 한일 영리 학원을 운영하시면서 교재로 쓰셨던 <사주첩경>이라는 책이 있었지요. 그 책은 지방에서는 구할 수가 없었어요. 복사기도 많지 않던 시절이지요. 무슨 보물처럼 가지고 있는 분이 계셔서 필사라도 하고 싶다고 보여달라고 하면, 잘 보여주지도 않던 시절이 있었어요. 공부는 하고 싶은데 아쉬웠던 시절이지요. 당시에 그만큼 정보와 자료가 부족했던 시절이라고 보시면 돼요.


(제이선생님) 90년대 이전, 그렇게 자료가 없던 시절에는 명리학이 더 신비롭게 보였겠네요.

(백민 선생님) 그럴 수도 있죠. 정보화 시대 이전에 그런 분위기에서도 이 학문을 음지에서 양지로 내놓으려 시도했던 분들이 있으십니다. 자강 이석영 선생님이시지요. 관인 학원을 운영하셨지요. 당시에는 지역 간 이동도 지금과 같이 활발하지 않던 시절입니다. 그러다 보니 각 지역에 따른 학파가 형성이 되었지요. 서울 쪽은 앞서 말씀드린 대로 자강 이석영 선생님의 사주첩경파가 있었지요.


이석영 선생님이 쓰신 <사주첩경>이 제가 공부할 때는 7권으로 되어 있었어요. 지금은 6권으로 정리되어 있지요. 완성을 못하시고 돌아가셨지요. 7권은 문답식 사자성어식으로 쭉 정리해 놓은 것이 있지요. 신살, 격국용신도 이야기하셨지만 억부 즉 신강신약을 중점에 두시고 강의를 하셨지요. 그분 제자들이 서울, 경기, 인청 쪽 수도권에 많이 있었지요.


그런가 하면 대전 쪽에는 도계 박재완 선생님이 계셨습니다. 그분이 책을 집필해서 내놓은 것이 <명리요강>, <명리사전>이지요. 그 선생님께서는 조후 쪽을 상당히 중요시 여겼습니다. 선생님마다 자기가 집중적으로 두고 하신 부분이 있지요. 그러다 보니 그분의 영향을 받은 충청권이나 호남권은 그러한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박재환 선생님은 강원도 쪽에서 활동하신 적도 있어서 강원권도 이 분의 영향을 받았지요.


지금처럼 인터넷이나 통신이 발달하지 않았던 시절이고 책도 없어서 필사본이 돌던 시절이니요. 선생님을 중심으로 그 근처로 퍼져나갔지요. 지금처럼 세계 곳곳의 지식과 정보를 다 얻을 수 있는 시대가 아니었지요. 아마 젊은 분들은 이해가 잘 안 되실 거예요.

그 당시 대구, 경북, 부산과 같은 영남권은 역술이 상당히 발전해 있었습니다. 한국 역학계 주류 유명 인사로 자강 이석영 선생님, 도계 박재완 선생님 그리고 박도사라 불리었던 제산 박제현 선생님이 계십니다. 부산에 박제현 선생님이 계셨고, 대구에는 <사주감정법비결집>이라는 책을 내신 신육천 선생님이 계셨습니다. 신육천 선생님은 격국을 아주 중요하게 생각하셨지요. 제산 박제현 선생님의 관법은 상당히 독특합니다. 물상을 이야기하시기도 했지요. 선생님이 계시는 지역에 따른 학맥, 학풍, 관법이 형성되는 분위기. 이런 것이 정보화 시기 이전의 분위기였지요.


(제이선생님) 내가 아는 것이 전부인 것 같던 시절이었겠습니다.

(백민 선생님) 사람이 직접 오가지 않는 이상에는 교류가 크게 되지 않았기 때문에 학문적 교류가 쉽지 않았지요. 정보를 주고받을 방법도 별로 없었고요. 그래서 서울 경기 수도권은 억부 중심으로 충청권 호남권은 조후 중심으로 발전되어 있었지요. 염남권은 격국을 비롯한 물상 중심으로 발전했지요. 꼭 그것만으로 본다는 것이 아니라 그런 것들을 중요하게 다루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 도제식 교육이라고 하는 것이 장단점이 있습니다.


저도 도제식 교육부터 시작을 했지요. 제가 산에서 고시공부를 하다가 시험 보러 가기 전에 그곳에 계셨던 선생님께서 저를 부르셨어요. 공부를 열심히 한 것은 알지만, 건강을 더 조심해야 할 것 같다고 말씀해주셨어요. 결론적으로 교통사고를 당하고 시험도 제대로 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일이 두 번이나 있었습니다. 연탄가스 중독으로 생사를 왔다 갔다 하기도 했는데, 이런 것들을 그 선생님께서 예측하셨습니다. 처음에는 반감을 가지고 이 공부를 시작해 보았지요. 그분은 독학을 하신 거예요. 그 선생님은 고위공무원이셨었는데 결핵과 당뇨를 앓으셔서 요양 겸 산에 오셔서 공부를 하시게 되었어요.


그분은 저에게 최대한 가르쳐주 격려해 주시고 하셨지요. 그런 후에 제가 하산해서 이 공부를 더 해 나갈 때는 배울 곳이 없었어요. 그래서 제가 있는 지역에서 나름 유명하다는 분을 찾아갔지요. 손님 많고 유명하다 하니 찾아간 거지요. 제가 정보가 없었으니요. 찾아가서 공부를 하고 싶은데 가르쳐 쳐주실 수 있으실지 여쭤보니까, 저에게 호감을 가지시고 제자로 둬도 되겠다고 생각하셨지요. 그런데 무리한 사금을 저에게 요구하셨어요. 백만 원을 요구하셨는데 빚내다시피 해서 갔는데 공부하는 스타일이나 이런 것이 저와 맞지 않았어요. 공부보다는 내답자를 홀리는 법 같은 것을 가르쳐주시더라고요. 손님이 많고 돈도 잘 벌었지요.


(제이선생님) 너무 실망하셨겠어요.

(백민 선생님) 실망 정도가 아니었지요. 환불해 달라고 할 수도 없고. 속으로는 부글부글 끓고 하는데도 불구하고, 그때 제가 크게 배우는 점이 있었습니다. 뭘 배웠냐면, 내가 만약 선생이 된다면 당신 같이는 하지 않겠다. 왜냐하면 이 공부 시작할 때 제가 형편이 어려웠잖아요. 취직도 못하고. 공부도 뜻대로 안 되었고, 건강도 안 좋아진 상태에서 돈벌이도 없는 데 빚을 얻다시피 해서 들어갔는데 그런 경험을 하게 되니... 절대 나는 나에게 공부를 배우는 사람들에게 이런 짓은 하지 않겠다는 마음을 먹었지요.


(제이선생님) 거기서 또 배움을 얻으셨군요.


(백민 선생님) 엄청 큰 배움이지요. 평생 그 마음을 지키고 살아오고 있지요. 학문적인 것들을 정말 배우고 싶었는데 그런 것들은 서울에 오면서 선배님 통해서 좋은 선생님들 만나게 되면서 제대로 배움이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요. 그때 제산 선생님과 인연이 되었습니다.


그때 신촌에서 모임이 있었어요. 지금으로 말하면 스터디 그룹이지요. 10명 정도 모임을 이어갔습니다. 숭산 권영일 선생님께서 80년대 초 모임을 주도하셨지요. 숭산 선생님은 북쪽이 고향이신데 전쟁 때 피난 내려오셨다가 절에서 스님들로부터 교육을 받으셨어요. 그분이 명리를 체계적으로 정리해 주셨고, 풍수지리도 능통 잘하셨어요. 왕십리 한 자리에서만 40년 이상 상담하시다가 돌아가셨지요. 그분은 상담료도 작게 받고, 상담도 아주 짧게 하셨어요. 독특한 스타일이셨어요.


그때 제산 선생님 댁이 연희동이셨어요. 부산에 계시다가 올라오시면 그 모임에 항상 오셨어요. 역술인들 모임이니까요. 댁에 오실 때마다 우리 모임에 오셔가지고 한 마디씩 해주시고 그랬어요. 그때 제가 막내였지요. 흔히 말해 수행 비서 역할을 했습니다. 제가 제산 선생님 술이나 담배 심부름을 했지요. 그때가 저에게는 절호의 찬스지요. 궁금했던 것을 그때 물어볼 수 있었지요. 그 당시 제가 쌍문동에서 사무실을 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뜬금없이 원석아 부산에 가자하시면 함께 가고 그랬지요. 제가 본명이 양원석입니다.


부산에 가면 비행기 표 티켓팅을 제가 하고는 했어요. 선생님 본명이 박광태예요. 호는 제산으로 하시고 이름은 박제현으로 많이 불리셨지요. 그렇게 부산에 가시면 수영 집에 머무셨습니다. 그때 태종사에 친하게 지내시는 스님이 계셨습니다. 그 절에 가면 따라가서 절에서 같이 자고, 포항이나 광양 제철 만들 때도 수행비서처럼 따라다녔지요. 그분 고향이 함양이에요. 함양 집에 명절 새러 가시면 따라가서 선생님 시골 동창들 만나는 것도 보고 그랬지요.


(제이선생님) 아주 가깝게 계셨네요.

(백민 선생님) 그렇지요. 하지만 그분은 따로 제자를 두지 않으셨어요. 도제식 교육 같은 걸 많이 하지 않으셨지요. 그분은 꼭 서사를 두었어요. 나중에 서사들 중에서 훌륭한 선생님들이 많이 계셨지요. 갑산 선생님부터 유명한 분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제산 선생님은 병환이 있으셔서 오래 계시지 못했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그분이 명리나 역학에 대한 저술이 없으세요. 필사본이라든지 도에 관한 것들은 있지요.


제산 선생님 수업을 보면 요약해서 적어두시는 것이 있어요. 그런 게 몰래 복사해 가지고 비법처럼 돌아다니기도 하고 그랬지요. 그리고 선생님은 꼭 상담지가 있어요. 상담할 때 서사가 옆에서 꼭 써주시거든요. 어떻게 풀으셨는가. 이러한 것들이 정리된 것이 비법이라고 돌아다녔지요. 제가 제산 선생님 따라다니면서 적어놨던 노트 정리 해놓았던 것이 비법처럼 되어가지고 한 권에 몇 십만 원에 팔리고 그랬습니다. 거기에 제가 보면은, 지금도 있을 거예요. 양원석이라는 도장이 다 찍혀있을 거예요. (웃음) 제산 선생님 통변 방식으로 상담했던 제 상담지가 또 돌아다니기도 하고 그랬습니다. 80년대 이야기네요.


그렇게 도제식으로 공부를 하다가, 90년대 이후부터는 완전히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말 그대로 정보화 시대가 된 것이지요. PC 통신 들어가면 정보를 볼 수 있으니... 그동안 다들 얼마나 목말라 있었겠습니까. 이제 이런 정보를 전국에서 다 볼 수 있게 된 거지요. 그렇게 해서 시작된 것 중에 대표적인 활동이 90년대 하이텔 역학 동호회입니다. 그게 정보화 시대로 넘어온 거예요.


(제이선생님) 정보화 시대에는 장점이 많지만 또 단점도 있지요?

(백민 선생님) 그렇지요. 인포데믹 현상이라고 그러죠. 정보의 홍수 속에서 정보의 진위를 구분하기 어렵지요. 어떤 정보가 맞는 건지 의심할 수밖에 없는 시대가 됐어요. 어느 분야나 마찬가지겠습니다마는 특히 명리학의 경우 선생님들이 새로운 학설이라고 내놓는 것에 대해 모르는 사람들이 접하게 되면 그것이 진짜인 줄 알게 되기도 하지요. 책도 마찬가지예요. 책도 하나의 지식 전달 수단인데, 책은 한 번 잘 못 쓰이면 그것을 공부하는 사람은 또 거기에 각인이 되어 그것이 진리인 양 하다 보면 바로 잡을 길이 없어집니다.


제가 지금껏 <명리학개론> 한 권을 내놓았는데, 이 한 권을 쓰고 나서도 항상 불안해요. 다른 사람들은 체계적으로 되어있다고 하는데도 불안해요. 명리학 책을 읽다 보면 궁금한 점이 생겨서 저자에게 직접 물어보는 경우가 생깁니다. 전화를 한다든지 해서 물어보면 저자 자신도 그것이 무슨 말인지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자기가 써놓은 책의 내용을 자신이 몰라요. 어떻게 이럴 수가 있나 싶을 정도이지요. 책을 냈다고 하면, 명리학을 잘 모르는 사람들이 볼 때는 훌륭한 분이라는 생각이 들겠지요. 이렇게 자신을 포장하는 식으로 출판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정보도 마찬가지예요. 요즘 인터넷을 보면 과대 포장한 것들이 많습니다. 진리를 잘 못 포장하면 사술이 되어버리니 그것이 염려되는 것이지요.


(제이선생님) 선생님. 좋은 말씀 정말 감사히 들었습니다. 감사합니다.


https://youtu.be/0d8NJdBA9Jk?si=586RUYIj0VDMrQO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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