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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몽운 Mar 09. 2024

아둥바둥 살아남기

매일 독립을 꿈꾸는 여자.

어려서는 대학생이 되면 아빠 엄마의 간섭에서 떠나 내가 하고 싶은 것들을 마음껏 하며 살게 될 줄 알았다.

대학교을 졸업하고 월급쟁이 생활을 하면서 나는 독립을 했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정서적 독립은 성공한 듯하다.)

결혼이라는 것을 하고는 드디어 난 완벽히 독립을 했다고 생각했다.

헌데 나의 10년의 결혼 생활에서 얻은 결론은

난 단 한번도 독립을 한적이 없다는 것이다.

독립이 무엇일까?


독립 獨立

명사  

    1.      다른 것에 예속하거나 의존하지 아니하는 상태로 됨.      


    2.      독자적으로 존재함.                      독립 초소.            


    3.      법률 개인이 한집안을 이루고 완전히 사권(私權)을 행사하는 능력을 가짐.      


    4.      정치 한 나라가 정치적으로 완전한 주권을 행사함.      

<출처>표준국어대사전


대학생때는 부모의 재정과 정서에 예속되고 의존하고 있었고

월급쟁이 시절에는 부모로 부터 완벽한 재정적 독립을 하지 못하였다.

결혼을 하고 독립이 된 줄 착각했던 나는

남편의 재정에 예속되고 의존하게 되었다.

결혼 후 내조를 원했던 시부모의 뜻에 따라 그도 나도 큰 저항없이 나의 독립을 외면하게 되었다.

그는 나를 취집이라고 생각했고

나는 아이를 바로 가져야 했고 엄마의 자리를 지키는 것이 나의 재정적 독립과 동등한 자격이 된다고 생각했다.

아이를 낳지 않을거면 모를까 프리랜서처럼 시간을 움직일 수 있는 직업이 아니라면

아이곁에 있어 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의 어린 시절 두분의 도우미 할머니가 계셨지만 그들의 자상함과 상관없이 엄마의 손길은 대체할 수 없는 것이였고 늘 엄마를 그리워 했다.

그래서 조금 아껴 살아도 나는 그길이 맞다고 생각했다.


나와 같은 뜻은 아니였지만 시모가 남편의 내조를 원하다보니 

남편도 '니가 나가서 얼마나 벌어오겠니 품위 유지비가 더 드니 그냥 살림만 해라.' 생각이였던 것 같다.

시모가 엄마의 역할을 존중해서 그랬다기보다 본인도 안 하신 걸 며느리가 해주길 바라는 분이시라 늘 따뜻한 밥을 해주길 원하셔서 그런 말을 자주 남편에게 했던 것 같다.


시모는 틈만 나면 말하셨다.

"어머니는 일 그만두는게 싫지 않으셨어요?"

"아니???!!! 난 너~무 좋았는데??? 집에서 애보고 얼마나 좋니? 나는 그만 두라고 하자마자 바로 그만 뒀다!!

너 그거 좋잖니? 애 낳고도 얼마든지 다시 할 수 있고? 지금은 아기 준비하고 좀 크면 다시 할 수 있잖니?"




그들의 생각이 바뀌는데는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는 결혼 초 어느 날, 그는 내가 새벽부터 차려 놓은 9첩 반상 앞에서 생각없이 명품이나 사야하냐고 니가 뭘하는데 그걸 사야하냐고 비아냥겨렸다.

예물예단을 준비하던 때에 나는 남편에게 질문을 했었다.

나에게 앞으로 좋은 물건들을 사 줄 예정이 없냐고..

없다면 나는 좋은 것으로 예물을 할 예정이고, 있다면 당장 지금 일을 그만 둘 상황에서는 지금 가진 것들로 충분하다고 말했다.

그는 "당연히 좋은 것들을 사 줘야지 그럴려고 버는 건데."라고 했고

나는 그 말을 믿고 예물예단을 간소하게 하게되었다.

내 것만.

그는 시부모가 다 현금으로 요구해서 시모가 늘 입에 달고 사시는 "봉투,봉투"로 주었다.

한복 값, 가방 값, 예복 값, 밍크값, 양복 값,......등등 요구하신 그대로 드리고

난...엄마에게 고개도 못 들 것들을 받으면서 뿌듯해하는 그들의 얼굴을 보아야했다.

본론으로 돌아와서!

그래서 일본가는 길에 가방은 못 사도 신발이나 귀걸이 정도는 사고 싶었는데

대 놓고 딴청하는 것이 내내 어이가 없어서 화가 나 있다가 

기분 나쁜 걸 말하라고 해서 말을 했더니 저 딴 소리를 듣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아이가 생겼고 

아이를 낳고 받게 된 부부상담 질문지에서 아내의 장점란에는 단 한 줄이 적혀 있었다.

돈을 쓰지 않는다.



그리고 아이를 낳고 3년까지는 싸울 때

"니가 나가서 벌든가. 내가 돈 벌어오잖아 넌 뭘하는데?"등등

이 따위의 말을 하지 않았다.


4년쯤이 지나갈 때쯤 부터는 저 소리만 해도 다행이였다.

육두문자를 섞어가며 니가 나서 백만원이라도 벌어 올 때가 있냐고 

나가서 니가 니 능력으로 스폰받아서 사업체 차리고 물건 팔아서 돈을 벌어오라고 레퍼토리처럼 

술만 마시면 시비를 걸어 쏘아 붙였다.

7년쯤이 되자 시도 떄도 없이 아이가 보는 곳에서도 장모가 보는 곳에서도

언성을 높히며 난리를 쳤다.

내가 운동이라도 할라치면 말은 운동해라~(남들이 보는곳에서)라고 말했지만

20만원이 넘지 않는 운동을 끈는 달에는 어김없이 돈 문제로 다투게 되었다.

차라리 "니가 운동을 왜가니 한강을 뛰어 처먹지 말고." 라고 솔직히 말했다면 덜 화났을까?

매달 어김없이 돈돈거리며 쪼아데고 피를 말리고 가계부를 보내라고하고 

카드 명세서를 보내라고 하니 정말 지옥이 따로 없었다.

시비거리는 아이의 교육비와 먹거리 비용이 였다.

매달 아이를 걸고 넘어지는 통해 결국 나는 번번히 두달을 못 넘기고 운동을 그만 두었다.

운동도 그만두고 미용실도 가지않고 커피도 마시지 않고 밥도 아이가 남긴 것만 먹었다.

아이를 재우고 집에서 냉장고를 털어 허기를 채웠다.

그렇게 6년을 보냈다...


코로나가 터져서 한동안 학원도 못 가고 집에 갇힌 생활을 하게 되어서

하루종일 아이를 케어하며 밥을 하고 빨래를 하고 청소를 하게 되었던 시절.

그는 처음으로 설거지도 했고 빨래도 개었다.

그러다가 기준이 완화되어 아이가 사회활동을 하게 되면 어김없이 

그의 가정 생활은 멈추었다.


그는 늘 말했다.

"내가 돈을 안 줬어? 옷 사입고 사먹어. 누가 미용실 가지 말래?"


십년동안 동결돤 월급..

아기가 어렸을때보다 두배로 늘어난 생활비.

나의 것을 포기 하지 않으면 생활이 불가능했다.

그나마 아끼던 걸 더 아껴야하니 나의 행색은 초라하기 그지 없었다.

나의 것을 사는 달이면 어김없이 카드값이 나가는 날 사람 피를 말리며

"나 돈없어 니돈으로 내. 니가 나써서 나 돈 없어. 카드 명세서 보내.!!!"소리를 질렀다.

똑같은 레퍼토리를 시전하며 사람을 코너로 몰았다.


그러고는 항상 같은 마무리가 되었다.

"나가서 백만이라도 벌어오던가 나도 골프나 치러다니면 좋겠다. 마누라 잘 만나서. 니가 뭘하는데? 니가 밥을 해 빨래를 해? 아 학원 뺑뺑이 돌리고 커피 사처 먹는거? 아줌마들이랑 떠들면서? 내가 돈 벌어오잖아!! 나보고 쓰레기 치우라고 하지마. 니가 돈 아껴서 아줌마 불러 나 시키지 말고.!!"

매 달 되는 피 말림은 매 년 갱신되는 보험처럼 더더 모욕적인 말들로 반복되는 패던을 보여주었고

나의 자존감은 점점 바닥을 향해 내려갔다.


그렇게 시작된 돈 타령으로 알게 되었다.

아..내가 애 낳고 3년을 기다렸구나...

저러고 싶은걸 어떻게 참았을까....

이제 3년 지났으니 나가서 한푼이라도 벌어오라는 거구나......


나는 내가 깨닫지 못 하는 사이 

독립 걸음마단계에서 나의 가치를 포기하고 그에게 귀속되기로 선택했던 것이다.

그가 허락하지 않으면 먹지도 사지도 쓰지도 못하고 

나의 판단으로 사용한 금액은 언제나 철저하고 처절한 댓가가 기다리고 있었다.

다시 취업을 하려고 보니 막막하기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그 전 직업은 보여지는 직업이라 나의 현재 모습으로 반길 곳이 없었다.

그 사이 같은 직업군의 스펙은 넘사벽으로 높아져 있었다.

이것 저것 뒤적이며 학교를 가볼까 배워 볼까 할 때도 결국 남편의 시큰둥하고 떨떠름한 소리를 듣고는 포기했다. 니가 하고 싶으면 니돈으로 하라는 식이였다.


결혼을 할때 지인들이 아가씨때 돈은 절대 주는거 아니다 비자금은 무조건 만들어 둬야한다는 말을 흘려 들었다. 결혼생활이란 신뢰의 문제인데 그런 것도 속여가면서 뭘 믿고 평생을 살고 그렇게 계산하고 살거면 첨부터 부자집에 시집가지 그를 선택하지 않았을거라고 했다. 둘이 한푼이라도 힘을 합해서 모아야하는데 서로 비자금 만들기 바쁘면 언제 목표를 이루겠냐고 생각했다.


나는 나의 유년 시절보다 더 누리지 못 하는 아이가 가엽고 미안했고

그는 본인의 유년 시절보다 풍족한 아이에게서 나는 훌륭한 아버지다라는 자화도취에 빠져있었다.

바뀌지 않는 재정의 굴레에서 숨이 조여왔다.


나중에는 남편이 정해 놓은 금액이 넘어갈 때 "내가 이번 달 백만원 낼께"라고 하면 그는 꿀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닫았다. 결국 숨 막히게 쪼으면 나는 듣다듣다 돈을 내어 놓았고 그는 기다렸다는 듯이 입을 닫았다.

나는 가정주부이다.

비자금도 없이 한푼도 헛투루 안 쓰고 수천번을 생각하며 쓰고 부모님이 아이앞으로 주신 한푼두푼까지 모아가며 돈 버는 사람 일번, 이제 자라나는 사람 이번으로 삼번은 없이 섬기며 살았던 사람이다.

아이가 5살이 되어서야 밖에서 엄마들을 불가피하게 만날 때만 커피를 마시는 그런 진상같은 아줌마였다.

결혼 전 평생을 과일이 사시사철 떨어지지 않고 살던 나는 아이낳고는 내입까지 돌아오는 과일이 가뭄에 콩나듯했다.

임신 때 먹고 싶다는 체리를 사다주며 이게 만구천원이나 한다고 얼마나 강조를 하던지.....

그런 나에게, 카드값에 보탤 돈을 주니 입을 닥치는 그에게 사라진 존경심에 더 사라질 것이 있나 싶을 정도로 바닥을 쳤다.

40살이 넘어서 까지 엄마가 찔러주는 푼돈을 모으고 모아서 카드값으로 갈취를 당하다니...


방법은 남편이 제안한 금액에 맞게 쓰거나 내가 일을 해서 벌거나였다.

고민을 하고 또 하여도 얼마나 어떻게 더 줄여야할까...더 늘어날 일만 있을텐데. 

그렇다면 뭘 해서 어떻게 벌이를 할 것인가...

그 금액에 맞게 쓰기 위해 아이의 모든 교육을 내가 할 수 있을 것인가

결국 이 모든 것은 늘 그랬듯이 나 혼자 하게 될텐데..

그렇게 된다면 정자은행을 통해 싱글맘이 되는 거랑 뭐가 다른가..?

아이의 아빠를 알게 하기 위해 왜 나는 이 모든 것을 감수해야하는 것인가..

주변을 둘러 보았다.

워킹맘 뒤에는 든든한 조부모님들이 계셨다.

시가에 맡기면 배보다 배꼽이 크게 돈이 나가야 할 것이고 생색도 받아야 할 것이 분명했고

친정에 맡기기엔 언니의 눈치와 약한 엄마의 건강이 걱정이 되었다.


하루하루 생활하며 댓가가 없는 아내와 엄마의 역할이 지치기 시작했다.

책임감만으로 버텨가는 나의 생활은 점점 건강의 악화로 나타나졌다.

매달 돌아오는 카드값을 보며 잠을 설치게 되었고 

소화가 되지않아서 먹지도 자지도 못하는 시간이 지났다.

그나마 그냥 넘어가는 달은 한숨을 돌리며 2주후 다시 가슴을 졸이기를 몇년을 반복했다.

주변에는 이해하지 못했다.

속 된말로 강남 사모님이 왜 그러고 사냐고 했다.

나에게 나는 어느 때보다 가난하고 궁핍했다. 몸도 마음도 그랬다.

내 아이까지 나와 같이는 살게 할 수 없어서 내 기준에 필요한 것을 챙겨주고 아껴가며 생활을 했다.

나의 마음의 독은 극으로 치달았고 나를 취급하는 시부모의 대우와 남편의 대우도 극으로 달려갔다.

나를 공짜 식모 정도로 생각하는 그들을 보며 아닐거야 내가 예민해서 그럴거야라고 생각하며

정신승리를 해나가는 것도 이제는 더 이상 견딜 수 없는 지경에 이르는 사건을 맞이하여서야 

나는 정신이 들었다.


나는 돈을 벌어야한다.
나는 독립을 하여야 한다.



그렇게 점점 나를 찾기 시작했다.

나의 숨을 찾고 나의 쉼을 찾는 시간을 확보해 나아갔다.

(지금도 여전히 진행 중이다.)

그러자 그들이 길길이 날뛰기 시작했다.

살기 위해 이 결혼 생활에서 내 아이를 지키기 위해 

나는 더 이상 그들에게 의존하거나 예속되지 않기 위해 맞서기 시작했다.

불꽃튀는 2년의 전쟁같은 시간이 지나갔다.

그 시간 동안 그들의 행동과 말에 덜 스트레스 받는 법을 찾아가며 그들에게서 나를 찾기 시작했다.


그들은 당연히 변하지 않았다.

지금도 그들은 나의 심신을 괴롭히고 그는 여전히 나를 돈으로 괴롭히며 함부로 하고 막말을 한다.

같은 일도 본인들이 기분이 좋을 때는 별것이 아니고 본인들이 기분이 나쁘면 미친 사람처럼 시비거는 것 또한 여전하다. 

하지만

나는 이제 거기에 굴하지 않는다. 미친놈한테는 미친놈처럼 굴고 참지 않는다.

그러고는 나의 일을 바로 해 나간다. 그러려고 노력한다.

상처받지 않으려고 영향받지 않으려고 노력 중이다.


나 이혼을 선택하지 않았다.
난 나의 결혼생활에서 살아남는 것을 선택했다.


그를 선택한 것도 

그들이 함부로 구는 것을 참기고 선택한 것도 

나를 희생하기고 선택한 것도 

전부 나의 선택이였다.


지금 이 모든 결과가 나의 선택에 대한 결과라면

바꿀 수 있는 것도 나의 선택이 될 것이다.

포기하는 것도 살아남는 것도 나의 선택이다.

나는 아이 핑계로 연명하는 관계를 살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나는 이 결혼에서 살아남기로 선택한 후 독립을 향해서 매일을 가고 있다.


아무도 모르게 나는 매일 움직이고 있다.

나는 나의 아이에게도 책임을 다하고 아이의 권리를 빼앗지 않고 

나 홀로 오롯이 독립할 날을 꿈꾸며 매일을 살아 나가고 있다.

그게 언제가 될 지 모르지만,

반드시 이룰 것이고 반드시 성공해서

내 아이 앞에서 포기나 외면 도피가 아니라, 독립적인 엄마의 모습으로 선택을 하는 모습을 보여 줄것이다.

그 꿈을 가슴에 품고 나는 오늘도 움직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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