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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몽운 Oct 19. 2023

39, 카페 망부석

머릿속을 그려본다.

수첩을 펼치고 펜을 들었다.

무엇을 적어야 할지도 떠오르질 않았다.

이 수첩에 내가 적을 수 있는 것이 있을까?

걱정부터 되었다.


펼쳐진 노트를 반으로 나누었다.

왼쪽 위에서부터 커다랗게 제목을 적었다.


내가 하고 싶은 것

내가 할 수 있는 것

내가 포기할 수 없는 것

그리고

마지막 칸은 내가 힘들어도 할 수 있는 것을 적었다.


커피를 한 모금 들이켠 후에 노트를 보는데 한숨만 나왔다..

내가 뭘 하고 싶은 건지.. 내가 지금 당장 뭘 하고 싶은 건지 딱 꼬집어지지 않았다.

그냥 이 생활이 더 이상은 아니라는 생각만 온통 머릿속에 있었고

나라는 사람이 싸질러놓은 이 상황을 어떻게 해야 책임을 질 수 있을 것인지

답도 못 찾고 도돌이표 걱정만 쳇바퀴 돌듯이 맴맴 돌았다.


다시 커피를 들이켰다. 벌컥벌컥.. 맥주를 마실 걸 그랬나 보다.

다시 호흡을 가다듬고 생각나는 데로 끄적이기 시작했다.


내가 하고 싶은 것.....

□돈 벌기

□내가 먹고 싶은 메뉴와 술 마시기

□살 빼기

□발레와 골프 다시 시작하기

□플라잉 요가 다시 시작하기

□좋아하는 일 찾기

□이민 가기

□네일숍 가기

□아가씨 때 다니던 숍에서 머리 하기

□내가 사고 싶은 옷 사기

□내가 가지고 싶은 액세서리 가방 운동화 구두 사기

...

어쩌면 그냥 당장 할 수 있는 것들까지 쓰다 보니 하나하나 생각났다.

매일매일 미루었던 나의 일들..

이 핑계 저 핑계로 뒷전으로 밀린 나의 일들.

숟가락 젓가락 바꾸기 정도의

소소한 일까지.. 여백이 없이 가득 찼다.


하고 싶은 것들은 이렇게 많은데...

넘쳐나는 욕구를 생략하고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생각해 보았다.


여기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 함은 누군가가 비용을 지불하더라도 쓰일만한 노동력인가를

고민해야 하는 부분이었다. 나의 노동력이 아직도 가치가 있을까...?

나라면 돈을 주고 나라는 인력을 쓸까?..

하고 싶은 것들에서는 봇물 터지듯이 써 내려갔는데... 이 물음에는 도무지 생각나는 것이 없었다.


한참 동안 시간을 끌며 쥐어 짜낸 첫 리스트가..

□아이 돌보기

그것도 유아... 내가 여태 한 일이 이것이니 왠지 이 일은 정말 잘할 것 같았다.


또 한참 후에 쥐어짜아낸 것이

□설거지

김집사나 해주세요에서 돈 주고 하다는 게 생각이 났다.

그다음에 쓴 것은

□화장실 청소

입주 아주머니가 있을 때에도 아이 화장실과 아이 그릇은 내가 하고 아이 음식도 내가 했으니

쥐어짜고 쥐어짠 것이 고작 저 세 가지였다.


내가 잘하는 것들 중에 금방 금전적인 도움이 되는 것이 이토록 없다니.

이 나이에 예전 일은 꿈도 못 꾸었다.

경단녀에 기술도 없이 어중간한 배움..

갑자기 기분이 더 내려앉았다.


아... 이게 나이구나...

지금 나의 모습은 그냥 이거구나....


더 이상 쓸 것도 없고 다음 칸을 보았다.

내가 포기할 수 없는 것..

제일 먼저 떠 오른 것은

□아이

□아이의 삶에 피해를 주는 것

본인의 의지와 없이 태어난 아이에게 피해를 줄 수는 없었다.

트라우마를 심어주는 것도 스스로가 용서가 되질 않았다..

이미 알만큼 다 알고 트라우마를 만들어 준 것 같아서

가슴이 저릿저릿한데  더 이상 이렇게 지낼 수는 없는데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만 되었다.

다시 수렁으로 빠지려는 순간 정신을 붙잡았다.


내가 포기할 수 없는 것이 뭘까....

멍하니 앞을 보다가 떠 오른 단어,,

□나

나.. 바로 나..

도저히 포기가 되질 않았다 내가.

나를 포기해야만 가정이 평화롭고 좋은 엄마가 된다는 것이 아니다.

내가 생각하고 있는 기준의 책임감과 남편이 생각하고 있는 나라는 사람에게 정해준 역할이

나를 포기해야만 가정이 행복하다는 생각이 계속 들게 했다.

나는 나를 포기했다. 그래야만 가정이 돌아가고 아이를 키울 수 있다고 믿었다.

내가 나를 포기하지 않으면 집은 도우미 이모들로 어찌어찌 돌아가겠지만

아이는 일정 부분 포기해야 한다는 선입견이 머릿속에 가득했다.


엄마가 행복해야 아이도 행복하다는 말은 셀 수도 없이 오랜 시간 보고 듣고 읽었다.

각자의 자리에서 노력했던 엄마들이 있었고

많은 이들이 도전한 새로운 직업에서 자리를 잡아가고 있는 것을 옆에서 지켜보았다.

그들이 의도했든 안 했든 지금 그들은 그들의 자리에 만족하고 있었다.

우연히 그 자리에 앉았더라도 그 자리를 마중물 삼아서 도약하고 있었다.

그동안 나는 나는 할 수 없다고 할 수 없는 이유를 나열하고 있었다.

물론 혼자서 용기를 내어 나가는 사람은 없었다.

모든 건 현실이니까.

누구는 남편이 도왔고

누구는 부모님이 도왔고

누구는 좋은 동료들이 있었다.

사실 그들도 나도 선택의 순간과 환경이 달랐을 뿐 틀린 것은 없었다.


지금도 나는 그때나 지금이나 변한 것은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달라졌고 달라지고 있었다.


마지막에 적혀있는 글을 가만히 보았다.

내가 힘들어도 할 수 있는 것......

그게 뭘까.. 힘들어도 후회 없이 힘들어하지 않고 오랜 시간 꾸준히 할 수 있는 것...

나에게 그런 것이 있었나....


가득 찬 수첩을 보고 있으려니

작은 노트 한 장 속에서 어떤 것은 정리가 되고 어떤 것은 공허하고 어떤 것은 고민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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