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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몽운 Oct 28. 2023

39, 영끌해서 집 사자고 했지!!

그래 넌 언제나 너의 엄빠의 아바타

첫 번째 기회는 신혼집이었다.


"너네가 얼마나 여기 살겠니~ 전셋값 못 돌려받으면 어떡할래~

그냥 이 집 가깝고(우리 집이랑) 좋다. 월세 그만하면 된 거야.

전세금이 크잖니? 정말 못 받고 그러면 위험하다니까~

여기서 한 1년은 살겠니? 지내다가 적당한 거 있으면 이제 아이도 키워야 하고 사야 하니까

여기서 좀 지내다가 이사해~. 근데 짐은 먼저 들이지 마라. 식도 안 올렸는데.!”

.......

그 와중에 등신 같은 남편은 앵무새처럼 어머님 따라 이야기하고....

 

2015년 이미 집값이 올라 전세 3억이 빌라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전세도 귀할 때라 아침에 부동산에 나오면 전화로 계약하는 사람이 있을 정도로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 당시 남편의 동생이 5년 전 3억 전세를 주어서

남편도 3억 선에서 집을 구하라고 했단다.

5년이 지난 시점인데..

그러면서 단지가 큰 아파트로 전세를 구해보라고..

"애 네가 알아봐라 재는 일 하느라 바쁘잖니?"


하하하... 나도 일하는데요 어머님....

그때 자영업을 하던 나는 1월 2월 그 추운 계절에 사방팔방으로 구하러 다니고

남편은 우아하게 일터를 지키다가 내가 연락을 하면 와서 부모님과 통화하는 게 일이었다.


내가 참 마음에 안 드시나 보다... 했다.

전화로 한 달 동안 퇴짜만 놓길래 도저히 참지 못한 나는  나오시라 연락을 드렸고

빌라이고 단지 있는 아파트도 아니고 주인도 미국에 있다는데 

돈 못 받으면 어떡하냐며 집이 좁고 어둡다고 우거지상으로 말씀을 하셨다.

주인이 미국에 있어서 이 정도 집이 3억에 나온 것이고 

초등학교 옆이라서 안전하다고 말씀을 드렸더니

 생각해 보자며 부동산 실장님을 돌려보냈다.

당연히 그 집은 다음에 본 사람이 계약을 했고 다음날에서야 부동산에 계약하자고 나오셨던 그들은

나온 김에 집 보자며 그다음 집으로 가자고 했고 빌라촌도 아닌 상가촌의 상가 빌라 꼭대기 층을 보고 

"아주 환하고 넓네. 도배도 안 해도 되겠다!! 깨끗해서!!"

같은 평수였는데... 엘리베이터도 없는 상가 빌라였는데..

다른 집은 보지도 않고 계약을 하자며 진행을 시키려고 했다....

저런 말도 안 되는 말을 하면서... 그때 남편은 뇌가 없는지 저러고 있었고..

내가 아무리 종교만 보고 나한테 하는 말만 믿고 선택을 했지만 정말 어처구니가 없었다. 

혼수를 저렇게 요구하고서는 전세도 아니고 월세....

왜 저 남자는 가만히 있지.. 지금 상황이면 대출을 해서라도 작은 집을 사야 하잖아!!!


"우리나라가 이상해서 그렇지. 왜 그 목돈을 재테크해야지 깔고 앉아 있냐? 선진국은 다 월세야~!!?"

생각이 없는 남편도 그렇게 말하는 그들도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나는 한국에서만 살았던 한국인인데...

그리고 남편아 너네도 외국인 아니잖아....


 도저히 아닌 것 같아서 대출을 하더라도 집을 사자고 남편에게 말했더니

(전세와 매매 차이가 1억~ 2억 차이 나던 때였다)

"위치가 어쩌고 저쩌고~

집 상태가 어쩌고 저쩌고~

대출이자나 월세나 똑같은데 이해 안 된다.

차라리 그 돈으로 재테크를 하지!!"

라는 뭐 같은 소리 나 하며 시부모님이 하신 이야기를 녹음기 따라 틀듯이 나에게 나불거리고 있었다.

부모 허락 없이 똥도 못 닦을 굿 보이...

그때는 몰랐다. 이게 간섭과 이간질과 나의 단명의 시작일 줄..

 

본인들 덕분에

담날 아침까지 확답 안 줘서 다른 사람이 계약하고

놓친 날 다른 부동산에서 딱 3억 전세는 없고

2억 7천에 50만 원 월세밖에 없다고 하니 

대단지 아파트가 아니라고 넓게 잘 빠진 30평에 깨끗한 집들 내내 줄줄이 퇴짜를 놓고

미용실에 술집 밥집 번화가의 상가를 바로 계약을 하길래 어이가 없었다...

월세라니....

내가 이 추운 겨울에 한 달 반은 매일 다니고 

괜찮은 집 다 놓치고 결과가 이거라니....

그때 보던 집은 일 년 만에 4억이 올랐다.

지금은 말해 뭐 하나 영혼을 팔아도 이 동네 집을 못 사게 생겼다.

 

그때의 나는 바보 멍청이였다. 

그래 그냥 우리가 모아서 살면 되지 내가 돈 보고 널 선택했겠니

저리 아까워서 저러니 그냥 맘대로 하게 두자

받은 게 없으니 오히려 간섭 안 받고 좋다 생각했다.

(결혼 후 나에게 하는 짓들을 보고 살고 있는 상가빌딩을 내가 받은 줄 알았다고 지인들이 말했다.)

 .

그렇게 시간이 흘렀고

우리 부모님께는..

본인들이 6년 전에 차린 남편 일터에 3억을 썼기 때문에 돈이 없어서 집은 월세라고 미안하다고 하더니

결혼식 끝나고 현찰로 벤츠를 업그레이드해서 새 차를 뽑으셨고 시승식까지 하셨다.



두 번째 영 끌해서 사자고 했던 집은 십오억이 넘게  올랐다.


결혼 1년 차에 임신을 하게 되었다.

7개월쯤? 

아기도 낳아야 하고 엘리베이터가 있는 집으로 이사를 가는 게 

좋지 않겠냐면서 전세금을 내고 행당동 집으로 들어가는 것 좋지 않겠냐고

남의 편을 통해서 생각해 보라고 이야기가 나왔다.

(아들 앞에서는 언제나 생각하는 척, 너희를 위하는 척, 마음에도 없는 소리들)

짧다면 짧은 기간 동안 시어머니의 행동도

남의 편의 생각도 행동도 신뢰감이 없어진 상태라서

들어갈 생각이 없고 우리가 모은 돈으로 전세를 구하자고 했다.

 

내가 답이 없자 

입덧 때문에 10분 정도 되는 거리를 가면서도 대여섯 번을 토를 하는 나를

부르더니 생각해 보라며 말씀하셨고 저는 생각해 본다 하고 무거운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왔다. 

아마도 그때 처음으로 어머니한테 밥을 얻어먹은 날이었다.

결혼 전에 만나도 남편은 "엄마한테 맛있는 거 사달라고 해~"라고 말했지만

항상 내가 계산을 해야 했는데 그날은 무슨 일인지 집으로 늘 쳐들어오시더니

입덧으로 걷지도 못하는 나를 굳이 불러내서 밥을 먹였다.


"임신한 애가 그렇게 먹어서 어쩐다니~ 이상하다~ 나는 사이다 먹으니까 괜찮던데.

둘째는 H 가 대출 끼고 집을 해줬잖니? 개 아버지가 사업해서 그런 걸 잘 아나 보더라.

그런데 너희는 집도 아직 없고 청약도 안되고 그냥 행당동 엄마 집으로 들어가는 것이 어떠니? Y가 답이 없길래 너한테 이야기를 제대로 못하고 있나 하고 이야기하는 거야.~ 아기도 생기는데 엘리베이터도 없고 힘들잖아.

둘째네도 만삭 때 애 낳기도 전에 지네 엄마 옆 동으로 이 이사 갔는데 

나는 그건 안되니까.~

거기 있으면서 돈도 모으고 사서 나가면 좋잖니? 거기가 이제 올라서 너네 돈으로도 못 가는데야~

우리가 일억이나 안 받고 그냥 들어와서 살라는 거잖니~."


돌아오는 길의 찝찝한 기분과 개운치 않은 한마디 한마디가 마음에 계속 걸렸다.

 

그리고 그 주에 큰집에서 제사가 있다며 연락이 오셨다.

남편에게 들어서 알고 있다고 하였더니

“ 이 정도는 올 수 있잖니?” 

라며 일하러 오라고 하셨고 눈치 없고 개념 없는 굿 보이 남의 편 덕분에 종일 토를 하고 제사를 갔더랬다.

증여세 때문에 대출을 하고 갚아주는 형식으로 많이 상속을 했는데

동서네가 그렇게 집이 생기고 나서  원래도 참여 않던 가족모임과 행사는 내가 더 독박으로 하는 느낌이었다. 그게 느낌이었으면 좋으련만. 

그 수화기 너머의 뉘앙스로 나의 미래는 충분히 그려졌다.

집을 받은 것도 아니고 내 돈 내고 전세 들어가는 건데 그것도 나의 지인이라고는 없는 동네로!!

명의 이전도 안 했을뿐더러 

아직 들어간다고 답도 하지 않은 상태인데도 

이 만삭의 몸을 가진 사람한테도 이러는데 절대 들어가면 안 된다는 것은 본능적으로 느껴졌다.


나는 남의 편에게 우리 경제력으로 우리 수준에 맞는 집을 구한다고 말씀드리라고 했다.

어차피 그 집도 전세금을 우리에게 받고 들어가라시는거고 

시세보다 싸게 준거라고 하셨으나 우리 손에 시드머니로 재테크하는 구조는 아니지 않냐고

그냥 우리 수준의 전세로 이사를 가든 당신이 재테크를 하고 월세를 살든. 

아님 내가 재테크를 하겠다고 했다.

그렇게 남의 편과 정리를 하고 그 이후는 남의 편이 알아서 해결하라고 했다. 

어차피 이야기도 본인들 아들 불러서 물어봤으니

나 또한 대답을 전했을 뿐이었다.

 

결정 난 일을 7개월을 미루던 남편은 배부른 나와 친정 엄마가 전세를 보러 다니기 시작하자

그제야 시가로 가서 그 집에 전세로 들어가지 않겠다 했고

6시간 동안 너희들 마음대로 하려면 호적 파고 인연 끊고 살자는 소리와 시키는 대로 하지 않은 것을 불효자 프레임을 씌워서 그 모든 화를

나에 대한 비난과 온갖 쌍욕을 남편에게 다 하고 돌려보냈다.

 

얼굴이 잿빛이 되어 들어온 남편에게 우린 생각해 보라고 해서 생각해 보고 이야기를 한 건데 이럴 인 건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등신 같은 남편은 한다는 소리가

“이럴 줄 몰랐어?

아버지가 문자 하나 찍 날려 놓고 본데없이 그랬다고 난리 쳤어. 그리고 남들은 못 줘서 난리인데 너희는 준다고 하는데 왜 난리냐고..........................”

듣고 있는데 기가 찼다.

본데없이????(차마 적지 못하는 험한 말들도 있다..)

 

그때 상황은 이랬다.

시가는 전세를 끼고 아파트를 샀고

전세금을 투자를 하였고 그 집이 계약 만료가 되고

전세금을 빼 줘야 하는데

그때 전체적으로 주식 펀드가 하락장 상태였고

세입자들 나가고 너희가 전세로 살면 서로 윈윈이라고 당신들끼리 생각해 놓고

시키는 대로 안 되니 역정을 내시는 거였다.


그게 아니라면 도저히 모든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게다가 우리는 월셋집 재계약이 일 년 남은 상태였다.

 

나에게는 

임신을 해서 엘리베이터가 없는 빌라이니

아기를 위해 옮기거라. 너도 임신해서 오르락내리락 힘들지 않니??

다 너랑 아기 위해서 그러는 거야~

단, 이사는 그 집 전세 빠질 때맞춰서 하거라.

(???? 그 집 전세 빠질 때는 아기가 백일 되지 않고 너무나도 추운 2월 초였다)

부동산 복비 아까우니까.

(??? 누구 복비요?? 우리는 계약 중에 나가는 거라 복비를 우리가 다 내야 했다.)

우리는 다 너희를 위해서 너희 돈 아끼고 모으라고 그러는 것이다.

(??? 네?? 전세금을 다 달라고 하셨는데 어떻게 모아서 재테크를 하나요?)

 며느라기 시절이었던 나는 저런 이상한 소리를 듣고도 입을 꾹 다물고

이러하니 불가하다고 남편에게 좋게 말을 했다. 

아이 때문에 오히려 불가하다고 그냥 우리가 알아서 하자고...


수천 번 그 말들을 생각했다. 

그 날짜를 맞추면 아기가 100일이 조금 안 된 시점인 얼음 얼고 눈 내리는 2월에 

남편도 없이 이사를 하라는 것이었다. 

나와 아기를 조금이라도 생각한다면 청소도 먼지도 집 정리도 등등을 위해 

아기를 낳기 전에 이사를 가서 정리를 해도 막달이라서 정리가 다 안 될 판인데...

내 입장에서는 복비 아깝고 투자금 손해 나서 다 빼면 지금 손해이니까

우리 전세금을 받아서 세 나갈 사람들 주고 

우리한테는 집을 준거 마냥 유세를 떨고 있는 걸로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아기만 생각했더라도 막달인 나에게 

아들을 통해 온갖 욕설과 모멸을 주고 자기들 뜻대로 되지 않았다고 막달인 며느리에게

한 시간 반이 넘도록 동안 온갖 독설을 토해 내진 못 했을 것이다.

나는 울면서 그 화를 다 받고 뭉친 배를 감싸 쥐고

"죄송합니다....."라고 했었다.

"문자를 찍 보낸 것이 아니라.. 오빠가 열두 시에 와서 마음이 안 좋아서 문자를 보낸 놓고 오후에 다시 전화하려고 했는데 또 오빠를 부르셔서 기다리고 있었어요..."라고 했다... 죄송하다고...

왜 그랬을까... 나는...

그때는 어른 화가 났다고 하니 듣고 있었던 것 같다. 

나는 그렇게 배웠으니까. 

어른을 공경하라고.. 그리고 어른은 어른다워야 한다고..

문자도 남편이 있으라고 해서 맘에 걸려 장문의 카톡을 보낸 것인데...

나를 잡아 족쳐서 본인들 맘대로 안된 분풀이를 해야 하는데 오빠만 가서 더 속이 상하셨나. 

우리끼리 독립을 했으니 살아보겠다고 한 이야기를 

본인들 말 안 듣는다고 온갖 분풀이를 나에게 하는 노인들이라니.

남의 편 또한 나를 지키기는커녕 지들끼리 쿵작거리다가 

모든 분풀이를 나에게 돌리는 꼴이 참 가관이었다. 

이게 시작인 걸 난 왜 이 남자가 날 지켜 줄거라 생각했을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십 년... 단 한 번도 서러움이 없이 

누구에게 손가락 받을 일 없이 누군가에게 야! 소리 들어가며 홀대받을 일 없이 살았고

이런 취급받을 일 없게 엄마가 잘 키우셨고 

성인이었기에 나 스스로 나를 잘 키우며 잘 먹고 잘 살고 자랑스러운 딸이었는데.


난생처음으로 서러움과 화가 북받쳤다. 

이 수치스러움 모멸감... 분노...

아버지가 살아 계셨어도 저 노인네가 나에게 이렇게 행동했을까...?

죄송하다고 하지 말걸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이런 말을 들을 이유도 상황도 없는 것 같은데 

왜 나는..... 

어른이라서 내 배우자의 부모라서 화났으니까 화를 풀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고개를 숙였을까...

나는 그때 나도 내 아이도 지키지 못했다.

그 전화 이후 언어폭력의 충격으로 나는 2박 3일을 먹지도 자지도 못하고 눈물이 계속 흘렀다.

꺽꺽거리다 훌쩍거리다 눈에서 물이 마르지가 않았다. 그렇게 누워만 있다가 뭉치는 배가 심상치 않았고

병원에서 진통 검사를 하더니 입원을 권유하여 입원을 하게 되었다.

 


마지막 기회였던 세 번째 영끌의 기회도 똑같았다. 

시어머니 녹음기인 남의 편은  

내가 밤 새 가며 공부하고 강의 듣고 살피어  소개한 부동산 전문가 부동산 투자자를 

내가 소개했다는 이유로 무시하며 구시렁거렸다.

거기는 동이 작고 대단지가 아니고 재개발이 안될 것 같다고 끝까지 무시했다.

거기서 살자는 게 아니라 오르면 옮기는 거라고 설득을 해도 끝까지 무시하더니...

강남에 하나 남았던 

그곳도 십억이 넘게 올랐고 이제는 영원히 멀어진 집들이되었다.





남편은 결혼 비용으로 싸울 때마다 나를 비열하게 콧방귀를 뀌며 비웃는다.

지랄하고 있다고. 헛소리 지껄이지 말라고. 통장내역 가져오라고.


내 잘못이다.

돈이 들어가는 모든 것을 남편에게 증빙하지 않은 것.

그들을 그렇게 겪고도 기회를 준 것.

그들의 의견을 존중해서 독닥적으로 행동하지 않은 것.


나는 결국 결혼 8년 차에 엄마에게 엑셀자료랑 카드 내역을 요구했다.

엄마는 퇴직하고 컴퓨터 바꾸면서 내역이 다 사라졌는데 왜 그러냐고 했다.

내가 결혼하면서 받아 놓은 자료는 오래되서인지 무슨 이유에서인지 열리지 않았다.

이제는 어디 하드에 들어 있는지도 모른다.

그래 다 내 탓이다. 꼼꼼하게 기록하지 못한 내 탓.

이혼을 당장 내일해도 반박하지 못할 정도로 꼼꼼하게 정리해 두었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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