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어떻게 시간을 보내고 있을까?

by 차현

뜨거운 여름이 지나고 있다. 아침과 저녁으로 심한 일교차, 산과 들로 바뀌어 가는 잎의 색깔은 다가오는 가을을 알려주고 있다. 올해도 겨울이 지나면 다음 해로 넘어간다. 자연의 시간은 흐르고 있고 우리의 시간은 짧아지고 있다.


‘시간의 유한함’을 알아차린 순간 우리는 불안해진다. ‘인간은 언젠가 사라질 존재’라는 것은 알고 있지만 그것이 나의 이야기라고 실감하지 못한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이 시간 속에서, 그동안 미뤄둔 일과 이루지 못한 꿈이 떠오르며 초조함이 밀려온다. ‘나는 무엇을 위해 살고 있는가?’, ‘내가 하고자 한 일들을 모두 실현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이 시간을 잘 활용할 수 있을까?’ 초조함은 여러 질문을 던진다. 하지만 모든 질문의 한 가지로 귀결된다.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첫 발령을 받은 사무실로부터 부고소식이 들렸다. 매년 빙모상, 모친상, 부친상 등 많은 부고소식이 들린다. 아무 생각 없이 열어본 사내 홈페이지의 부고 소식이 가슴을 먹먹하게 만들었다. 개인상. 한동안 병으로 자리를 비우신 분이셨다. 일면식도 없는 분이지만 건강이 안 좋다는 말을 전해 들은 적이 있었다. 멍하게 모니터를 바라보며 ‘아, 한 사람은 삶이 사회에서는 단 한 줄의 부고로 남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정신을 차리고 난 뒤 ‘나는 어떤 삶을 살고 있을까?’에 대한 질문이 머릿속을 빙빙 돌았다. ‘난 잘 살고 있는 것일까?’


이후 ‘죽음’과 ‘시간’에 대한 생각이 깊어졌다. 죽음’에 대한 이야기는 유쾌한 이야기는 아니다. 하지만 ‘죽음’은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의 마지막 순간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 죽음’은 우리의 유한한 시간을 깨닫게 해주는 역할을 한다. 삶은 단 한번 주어진 기회다. 그렇기에 나는 이 글을 읽는 이들에게 잠시 멈춰서 자신에게 질문을 던지길 바란다. ‘나는 어떤 삶을 살 것인가?’


우리는 어떻게 살고 있을까? 우리 삶의 목적과 목표는 무엇일까? 생각만 해도 머리가 아프다면 조금 더 단순하게 ‘나는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을까?’라는 원초적인 질문을 던져본다. 질문이 너무 추상적인가?

나는 내가 생각하는 좋은 사람이 되고 싶었다. 30대까지 내가 생각한 좋은 사람은 ‘다른 사람을 편하게 해주는 따뜻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 생각이 달라졌다. 다른 사람을 편하게 하기보단 ‘사회 구성원으로 역할을 다하며 나의 행복을 좇는 사람’.


그렇다면 ‘행복’은 뭘까? 나의 행복은 ‘나답게, 당당하게 살아가는 것.’이다. 다른 사람의 평가도, 타인의 행복을 위해 나를 희생하는 사람도 아닌 ‘나답게.’

그럼 ‘나답게’는 무엇인가? 애석하지만 그것은 본인의 숙제다. 딱 부러지는 정의는 존재하지 않으므로, 스스로 찾아야 한다.

타인의 평가는 타인의 눈으로 나를 보는 것이므로 진정한 ‘나’라고 보기는 어렵다. 우리는 타인을 위해 언제든 희생할 수 있는 사회성을 지는 사람들이니까. 우리는 타인에 대한 평가와 판단은 쉽게 하지만 정작 스스로를 평가하고 판단하는 것에는 서툴다. 그렇기 때문에 ‘나’를 찾는 과정은 매우 길고 지루하다.


이 지루한 과정에서 내가 찾은 팁이 있다면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내가 좋아하는 일이 무엇인지 그 일을 통해 어떤 성취와 행복을 느끼는지, 그리고 어떤 모습으로 살아갈 때 내가 스스로 만족할 수 있는지. 우리는 타인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다가 내면의 소리에 귀를 닫아 버린다. 다른 사람에게 눈치 보여서,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떻게 볼까 부끄러워서, 또 걱정이 되어서.


나를 위한 시간을 쓰고 싶다면 결국 나를 먼저 알아야 한다. 사회구성원으로서 주어진 역할은 다 하되, 스스로 원하는 것을 이루며 자신의 인생에 주도권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인생의 주도권? 나는 주도권이 없는 삶인가?’ 주도권을 쥐고 있는 것은 본인이 가장 잘 알 것이다. 스스로가 주도권을 잡고 있다는 확신이 있다면 느슨해지지 않게 더 꽉 움켜쥐길 바란다. 반면 그렇지 않다면. 왜 인생의 주도권을 가진 사람이 더 행복할까?’ 대해 질문을 던지고 싶다.


인생의 주도권을 가진 사람은 주변의 소리보다는 내면의 소리에 더 귀를 기울이기 때문에 자신이 정말 하고 싶은 일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다. 단순히 ‘운이 좋아서, 타인의 덕분에’ 보다는 스스로가 선택하고 행동했기 때문의 삶의 결괴에 대한 만족이 높고 실패를 통해 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


나는 축구를 좋아한다. 실력은 없지만 동네 축구팀에서 열심히 활동을 하고 있다. 우리 팀은 다양한 직군, 연령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중에 인생의 주도권을 쥐고 사는 분이 계신다. 개인 사업을 하는 분인데 항상 웃는 얼굴로 팀원들을 대하신다. 이 분의 특징은 부정적인 말을 하지 않으신다는 것인데, 한 번은 경기 전날 비가 억수 같이 왔다. 다음날 경기가 걱정되어 전화를 드리니 ‘난 가능할 거 같아’ 하셨다. ‘이렇게 비가 오는데 내일 축구가 가능하다고?’ 반신반의하며 경기장으로 갔는데 비록 땅은 젖어 있었지만 경기를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경기를 마치고 전날 답변에 대한 이유를 여쭤봤다.

“그냥 나는 할거 같았어”

“그러다가 안되면요?”

‘안되면 우리 팀원들이랑 밥이나 먹고 오는 거지. 난 경기도 중요한데 너네들 만나는 게 좋아.”

“형님은 못할 거 같다는 생각 안 하셨어요?”

“어 나는 할 수 있다고 믿었어.”


‘아, 이 형님은 축구회 활동이 목적이 아니고 그냥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과 운동을 좋아해서 나오시구나.’

나는 내가 축구를 좋아해서 나가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근데 결국 축구회원으로서 활동을 더 열심히 하고 있었다. 순수하게 이 축구회 활동을 즐기는 것이 아니라 회원으로 역할을 더 열심히 하고 있었다.

이 일 있고 난 후 ‘회원’의 역할보다는 ‘축구를 좋아하는 사람’으로 활동을 하고 있다.

‘운동은 못하지만 그래도 축구가 좋다’라는 생각으로 가입한 그날의 기억을 떠올리며.


인생의 주도권은 누구나 가질 수 없다. 주도권을 가지는 일은 생각보다 어렵다. 내면의 소리에만 귀를 기울이면 주변에서는 나에 대한 험담이 들리거나, 비웃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주도권이 없는 삶은 자존감, 자기 효능감, 삶의 만족도가 낮다. 비록 다른 요인들로 ‘행복하다’고 느낄 수 있지만 삶을 그려 나갈 수 있는 힘을 가진 사람보다 행복할 수 없다.


독일의 철학지 프리드리히 니체는 ‘행복은 수동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자기 힘을 발휘하고 삶을 창조할 때 얻어진다.’고 했다. 주도적인 삶은 결국 ‘자기 초뤌’을 통한 존재의 기쁨을 가져다줄 수 있다는 이 개념은 삶에 있어 스스로의 선택이 얼마나 큰 의미를 지니는지 말해주고 있다.


우리는 유한한 시간 속에 살고 있다. 그리고 이 시간은 단 한 번만 주어지는 소중한 시간이며 이 시간의 중요성을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의 삶은 만족도는 확연하게 차이가 난다. 자신의 삶에 대한 성찰과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여 진정한 자신을 찾고자 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삶은 힘든 과정이다. 자신도 찾아야 하고 주도권도 잡아야 한다. 하지만 이런 어려운 과정을 통해 삶의 기쁨과 행복을 찾을 수 있다면 한 번은 도전해 보는 게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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