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효 총량의 법칙
'인생 총량의 법칙'이란 게 있다.
사람의 인생에는 희로애락의 총량이 비슷하게 정해져 있다는 법칙이다.
과학적으로 검증할 길은 없지만, 수많은 이들의 경험치에 근거하기에 나름의 신뢰를 얻고 있는 통계학적 위로이기도 하다.
이 법칙은 영역에 따라 '행복 총량', '또라이 총량', 지랄 총량' 등으로 세분화되는데, 불행하게도 우리 집에서는 '불효 총량의 법칙'으로 그 존재를 증명하고 말았다.
첫 스타트는 맏아들답게(?) 형이 끊었다.
형은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부모님의 애간장을 태웠다.
진통은 시작되었지만 아이는 도통 나올 기미를 보이지 않았고, 어쩔 수 없이 그 시절에는 흔치 않던 산부인과에 가서야 겨우겨우 세상에 나올 수 있었다.
하지만 힘겹게 태어난 탓인지 형은 울음조차 터뜨리지 못했고, 주변에선 아이가 죽은 줄 알았다고 한다.
다행히 잠시 후 형은 울음을 터뜨리며 부모님께 첫 번째 불효를 선물하면서 세상에 자신의 탄생을 알렸다.
물론 본의는 아니었겠지만 말이다.
형의 불효는 거기서 끝난 게 아니었다.
결정타가 남아 있었으니, 바로 형의 심장병 수술이었다.
형이 고등학교 2학년 때 집으로 한 통의 통지서가 날아왔다.
건강검진 결과 심장 쪽에 이상 소견이 있으니 대학 병원에서 정밀 검사를 받아보라는 통지서였다.
덜컥 내려앉은 심장을 부여잡고 받은 전남대 병원에서의 정밀 검사 결과는 심장 판막 이상.
수술만이 유일한 해결책이며, 수술을 받지 않으면 몇 년 안에 사망할 수 있다는 의사의 설명을 들은 부모님은 눈앞이 노래지는 충격을 받으셨다고 한다.
40년 전, 심장병 수술의 성공률은 50%가 채 되지 않았고, 또한 막대한 수술비가 드는 위험한 수술이었기 때문이었다.
어머니는 형의 기나긴 병간호를 담당하셔야 했고, 아버지는 홀로 고향에 남아 농사일과 남은 자식들 뒷바라지를 하셔야 했다.
다행히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으나, 이번에는 집도의조차 원인을 모르는 고열이 지속되었다.
재수술을 해야 할지도 모르며, 그럴 경우 깨어날 확률은 10%도 채 되지 않는다는 의사 선생님의 설명을 들으면서 부모님은 눈앞이 노랗다 못해 캄캄해지는 듯한 충격을 받으셨다.
다행히 감염 내과와의 협진을 통해 항생제를 바꾸면서 고열은 사라졌고, 얼마 지나지 않아 퇴원함으로써 형의 불효는 일단락되었다.
두 번째 타자는 남동생이었다.
형의 수술 후 겨우 안정을 찾아가던 부모님께 운동권 학생을 둔 부모의 불안감을 안겨드렸다.
90년대 초반, 동생은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학생 운동에 빠져들었고, 그중에서도 돌격대 역할을 맡았다.
전경이 쏜 최루탄에 맞아 사망한 고 이한열 열사를 또렷이 기억하고 계시는 부모님은 노심초사 아들의 운동권 활동을 반대하셨고, 군대에 가면 좀 괜찮으려나 하는 생각으로 아들의 입대 신청을 했다.
하지만 동생은 자신의 손가락을 부러뜨리는 열정(?)으로 입대를 거부하였고, 부모님에게 형과 비슷한 총량의 불효를 안겨드렸다.
마지막 하이라이트는 불행히도 나였다.
부모님은 둘째 아들인 나만큼은 다를 거라 믿으셨다.
아니, 두 아들이 안겨준 불효를 상쇄시킬 만큼의 효도를 안겨줄 아들이라고 기대하셨다.
음력 4월 25일, 보리 수확이 한창이던 시절에 태어남으로써, 어머니를 노동의 고단함에서 잠시나마 해방시켜 드렸고 부모님의 분가 후 태어남으로써 할머니의 간호 아래 어머니는 편안한 산후조리를 하실 수 있었기 때문이다.
입이 짧아, 또래보다 작은 키 때문에 조금 걱정은 되었으나 조용한 성격에 큰 사고 없이 자라는 아들이었다.
무엇보다 제 앞가림을 할 줄 아는 아들이었다.
조금 늦은 고1 때부터 시작한 공부였지만, 밤낮을 가리지 않고 공부한 덕에 교대에 합격했고, 4년 내내 장학금과 아르바이트를 통해 경제적 부담도 거의 지워드리지 않았다.
대학 4학년 때 만난 아가씨와 사귀며 직장 생활을 하면서 번 돈으로 결혼자금도 스스로 마련했으며, 부부 교사로 나름 안정적인 결혼생활을 꾸려갔다.
하지만 '불효 총량의 법칙'은 나에게도 예외가 되지 못했다.
조용히 보낸 사춘기에 대한 보복이었을까?
마흔이 넘어 찾아온 '사십춘기'는 혹독했다.
그리고 그 끝은 이혼이었다.
부모님께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었다.
누구보다 잘 살고 있던 자식이라고 생각했는데.
부부 교사라고 남들에게 자랑하던 자식이었는데.
그런 아들이 이혼을 하다니.
그런데 그게 끝이 아니었다.
부모의 이혼 과정에서 상처받은 손녀가 그 충격 때문에 정신과 치료를 받는 모습을 보모님은 지켜보셔야만 했다.
홀로 된 자식과 손녀를 돌보기 위해 광주에서의 생활을 잠시 접고, 아들이 살고 있는 김포로 올라오셨던 것이다.
아는 사람 하나 없는 낯선 곳에서의 생활은 외로움만이 가득한 시간이었다.
아픈 손녀를 돌보며 지내야 했던 3년간의 생활은 마음 졸이며 보낸 시절이었다.
형, 동생과 달리 나의 불효는 아직 진행형이다.
재혼을 거부함으로써 홀애비로 늙어가는 아들을 지켜보시게 하고 있으며, 위태위태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손녀딸의 삶도 지켜보시게 하고 있으니 말이다.
나의 불효는 언제쯤 끝날 것인가?
다행히 우리 집엔 하나의 희망이 남아 있다.
바로 막내여동생이다.
딸 하나 있으면 하는 마음에, 태몽이 아들 같다던 이유로 낙태수술까지 받은 후에 얻은 귀한 딸이었다.
오빠들은 다니지도 못했던 유치원까지 보낼 정도로 귀하게 키운 딸이었다.
다행히 좋은 남자를 만나 결혼해서 안정적인 결혼생활을 꾸려가고 있다.
두 아들은 착실하게 직장 생활과 대학 생활을 하고 있다.
최근에는 좋은 아파트를 분양받아 입주를 기다리고 있다.
요즘 대부분의 자식들이 그렇듯 세 아들들보다 더 부모님께 잘해드린다.
제발 여동생만큼은 이 지독한 법칙에서 예외로 남기를 간절히 바래본다.
'불효 총량의 법칙'이 있다면, 이제는 '효도 총량의 법칙'을 믿어보고 싶다.
사선을 넘나들던 형은 조금 늦은 나이에 10살 연하의 형수와 결혼해 남매를 키우며 잘 살고 있다.
남매는 형과 형수를 닮아 인물들이 훤하다.
해남에 있는 보육원에서 아이들을 돌보며 정년을 앞두고 있다.
무엇보다 형수가 부모님의 자랑거리다.
나이는 어리지만 큰며느리 역할을 똑 부러지게 해 주신다.
부산 아가씨답게 애교가 많아 '엄마' '아빠'하며 부모님의 두 번째 딸 역할까지 맡아해 주신다.
(큰 며느리지만 막내 여동생보다 더 어린 나이시다.)
얼마 전에는 사회복지 관련 박사학위를 받아 우리 부모님께 또 하나의 자랑거리를 만들어 주셨다.
운동권이었던 남동생은 우여곡절 끝에 군대를 다녀온 후 완전히 딴사람이 되었다.
주변 지인의 소개로 참한 아가씨를 만나더니 아가씨를 따라 독실한 기독교인이 되었다.
결혼 후 딸 둘을 낳았는데 손주들 중 제일 공부도 잘하고 어렸을 적 자기들을 키워주셨던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제일 잘 따르는 손주들이 되었다.
부부가 함께 맞벌이 생활을 하면서 나주에 집을 두 채나 소유한, 4남매 중 가장 부자로 잘 살고 있다.
나 역시 남은 효도의 절반을 채우기 위해 노력 중이다.
다행히 이혼이 불효만을 초래하지는 않았다.
방학이나 명절에 부모님과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이 많아졌다.
부모님을 모시고 여행도 자주 다녀왔다.
부모님께 드리는 용돈 봉투도 이혼 전보다 더 두툼해졌다.
아직 최종 결심은 못했지만 전남으로 내려와 부모님 근처에 살면서 돌봐드릴 계획도 가지고 있다.
'인생 총량의 법칙'은 우리 가족에게만큼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거의 비슷한 총량의 불효를 안겨드렸고, 이제 효도로서 갚아나가고 있다,
우리 4남매에게 할당된 불효와 효도의 총량이 얼마인지는 모르지만,
부모님의 여생이 얼마나 남아 있는지는 잘 모르지만,
이제는 효도록 가득 채워진 시간만이 기다리고 있기를 소망한다.
그동안의 불효에 대한 대가를 효도로 갚아나갈 수 있도록 부모님께서 오랫동안 우리 사 남매 곁에 머물러 주셨으면 좋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