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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재 Feb 02. 2018

잔잔하게 마음에 울려 퍼지다,  <호우시절>



처음엔 호기심이 앞섰고, 영화 포스터에 끌렸다. 잘생긴 배우 때문이기도 했지만, 밝게 웃고 있는 두 남녀의 표정을 보고 있으면 기분이 좋았다. 제목마저 ‘호우시절(好雨時節)’이란다. 두보의 시에서 따온 말인데, 원래 시구는 ‘호우지시절(好雨知時節)’이다. 때를 알고 내리는 좋은 비 혹은 좋은 비는 때를 알고 내린다, 는 뜻. 이토록 감성이 풍부한 영화 제목이 있었나 싶었다.      


게다가 감성을 더욱 자극하는 것이 있었으니, 바로 영화 O.S.T.였다. 잔잔히 흘러나오는 기타 선율이 창문을 두드리는 빗방울 같았다. 톡-톡- 맑고 경쾌한 소리를 내며 떨어지는 빗방울. 귀를 타고 마음속까지 닿은 음악은 영화 속 장면을 하나하나 떠올리게 만든다.      




영화는 중국 쓰촨성으로 2박 3일간 출장을 떠나는 항공기 내에서 시작한다. 초록빛 가득한 대나무 숲 사진을 꺼내보는 동하(정우성). 건설업 팀장인 동하는 쓰촨 지사장의 안내를 받으며 일정을 시작한다. 간단한 식사를 하지만, 그조차도 동하에게는 쉬운 일이 아니다. 향이 강한 중국 음식이 맞을 리가 없을 터였다. 식사를 마치고 그는 두보 초당에서 가이드로 일을 하는  메이(고원원)를 만난다. 필연이길 바라는 우연이었을까? 발길이 이끌어 내딛는 곳에 그녀가 있었다. 푸른 대나무 빛과 화사한 분홍 꽃 빛이 어우러진 그곳에서. 어색하지만, 진심을 담아 인사를 건넨다. “Hi.”라고.      


동하와 메이는 유학할 때 만난 사이다. 서로 다른 국적이기에 영어로 의사소통을 하는 둘. 원어민처럼 유창하지는 않았지만, 서로를 바라보는 눈빛으로 충분히 생각을 표현하고 있었다. 가볍게 내뱉는 말보다 조용히 응시하는 눈빛이 더 강렬한 때가 있는 법이니까.      



저녁에 맥주 한 잔을 하고, 식사 하고, 춤을 추면서 2박 일정을 아끼고 쪼개어 설렘 가득한 시간을 보낸다. 여느 커플들이 시작할 때처럼. 풋풋하고 조심스럽게. 때로는 장난스럽게. 그들은 서로에게 마음을 전한다.

하지만 서로의 곁에 서로가 존재하지 않은 채 보낸 시간은, 받아들이기 버거운 현실로 돌아왔다. 각자의 위치에서 자신의 삶에 충실했지만, 내 옆에 그 사람이 없다는 것은 두 사람이 서로를 완전히 이해하기에는 부족했다. 동하는 떠나는 메이를 잡지 못하고 메이는 떠나는 동하를 잡지 못한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다가가야 할지 몰랐을 수도 있다. 혹시 내가 알고 있던 그 사람의 모습이 아니라면 어떻게 하나, 하는 두려움이었을지도 모른다. 과거를 기억하는 서로의 기억이 어긋나있어 더욱 그러했을 수 있다. 동하에게 메이와 함께 할 수 있는 둘째 날 밤, 비가 쏟아졌다. 마지막 밤이었다. 동하와 메이처럼 슬프게 울고 있는 비였다.      


동하에게 주어진 3일은 둘의 추억을 되새기고 다시 견고하게 다지기에는 상당히 짧은 시간이었으리라. 한국으로 돌아가는 날 공항 탑승 수속을 마친 후, 메이는 동하에게 줄 선물이 있다며 달려왔다. 영문 두보 시집과 몇몇 기념품이었다. 마음이 담긴 종이봉투가 메이 손에서 동하 손으로 건네졌다. 악수하며 “잘 지내.”라는 말을 하고 또 했다. 하지만 붙잡고 있는 손은 놓치지 않으려는 듯 보였다. 탑승을 알리는 안내방송이 야속할 뿐이었다.



힘겹게 손을 놓으며 뒤돌아서는 순간, 동하는 이 순간 이 지나고 나면 언제 또다시 볼 수 있을까 하는 생각 때문이었을까? 고민의 수준을 넘어선 긴박함. 긴장감. 동하의 심리상황을 흔들리는 화면을 통해 잘 표현해냈다. 관객으로부터 이 바보야 어서 잡아! 마지막 기회라고! 라는 말이 나올 수밖에 없도록. 관객의 성화에 못이긴 동화는 힘겹게 마음을 내뱉는다. 용기내 보여준다.      


“나 하루 더 있다 갈까?”     


이들에게 주어진 하루 동안 하지 못했던 데이트를 하려는 듯 순간순간을 행복하게 보냈다.눈만 마주쳐도 웃음 짓는 여느 연인과 같았다. 둘의 마지막 밤, 메이는 충격적인 말을 건넸다. 그렇게 메이는 1년 전의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로 동하를 보냈다. 동하가 언제 다시 쓰촨으로 올지 모를 일이었다. 어쩌면 오래도록 보지 못할 수도 있었다. 아니면 영영.



다음날 공항으로 향하는 동하를 바래다주기 위해 찾아온 메이. 동하의 차가워진 태도에 놀라지만 웃음을 잃지 않고 배웅을 해준다. 가벼운 차 사고로 정신을 잃은 메이, 그리고 동하가 듣게 되는 슬픈 소식. 메이는 2008년 일어났던 쓰촨 대지진으로 남편을 잃었다는 것. 사고 후로 자전거를 타지 못하게 되었던 게 아닐까? 유학 시절 동하가 가르쳐주고, 선물해준 노란 자전거를 팔 만큼 슬픔을 헤어나오지 못했던 건 아닐는지.      


한국으로 돌아간 동하. 메이에게 선물로 노란 자전거를 보낸다. 유학 시절 그랬듯이. 다시 용기를 내서 흔들거리는 자전거에 몸을 맡기는 메이. 이 둘의 사랑도 비틀거리지만 언젠가는 곧 자리를 잡고 굳건히 나아가리라. 둘이 함께했던 시간은 길지 않았을지라도, 앞으로 만들어 갈 아름답고 긴 시간을 위하여.      



특별할 것 없는 두 사람의 사랑이 이토록 마음을 움직일 줄이야. 설렘의 소중한 순간을 잘 담아냈기에 더욱 그러했다. 개봉한 지 8년이 다 되어가지만, 영화의 여운은 계속되어 간간이 기억 속을 찾아들곤 했다. 조용하게 스며드는 그런 사랑처럼. 찬찬히 마음을 두드리곤 했다. 푸른 대나무 빛과 분홍빛 꽃잎은 둘의 만남을 더욱 아름답게 만들어주었다. 평범하리만치 자극 없이 흘러가는, 여운이 함께 하는 영화였다.  




  * 사진 출처 : 네이버 영화 <호우시절> 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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