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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재 Nov 01. 2018

기억이 머무른 장소에 추억이 남았다

# 기억. [ 마드리드, 스페인 ]


“이 호텔은 잘 꾸며놨네요. 호텔 같은 느낌이 나요.” 


예쁘게 잘 꾸며진 로비라고 했다. 회사 동료가 머무르고 있는 호텔은, 호텔보단 깔끔한 모텔에 가깝다고 했다. “아, 정말 그런가요?” 첫째 날 둘째 날은 손님들 체크인을 돕느라 정신이 없어서 미처 살펴보지 못했었는데 예쁘다는 소리를 들었으니 한번 봐야겠다, 싶었다.




처음 유럽에 왔을 땐 ‘용돈 모아서 온’ 배낭여행자였다. 당연히 돈을 아껴야 했고, 혼자 자면서 호텔은 꿈도 꿀 수 없었다. 숙박은 호스텔, 한인 민박을 섞었고 간혹 야간열차와 야간버스에서 이동하며 잠을 청하기도 했다. 


두 번째 유럽에 왔을 땐 ‘돈을 조금 더 쓰는’ 배낭여행자였다. 당연히 돈은 아꼈으나, 둘이었기에 호텔에서 숙박할 수 있었다. 비수기에는 호텔 비용이 한인민박 도미토리와 같은 경우가 많았다. 


세 번째와 네 번째 유럽에 왔을 땐 ‘돈을 벌러 온’ 출장자였다. 출장비를 받았으나 돈을 쓸 시간이 없었다. 함께 온 손님들을 인솔해야 했으므로 그들이 머무르는 꽤 괜찮은 호텔에서 숙박했다. 운이 좋으면 혼자서 방을 쓰는 경우도 있었다. 


마드리드는 첫 번째와 네 번째의 유럽 일정에서 왔던 도시였다. 5년의 간격이 있었다. 하지만 이 도시는 그대로였다. 변한 건 나뿐이었다. 여행자였다가 출장자로 말이다. 하늘을 나는 비행기와 깊은 바닷속을 운항하는 잠수함의 높이 차이만큼이나 배낭여행자와 출장자의 차이는 엄청났다. 몸도, 마음도, 돈도, 시간도. 나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면에서.  


2013년의 여름, 푸에르타 데 알칼라
2013년의 여름, 시벨레스 광장



마드리드에 처음 왔던 때는, 살에 내리꽂는 듯한 햇볕이 따가운 7월 한여름이었다. 시에스타의 필요성을 온몸으로 절절히 느꼈던 계절. 늦게 지는 해만큼 짧아진 밤을 사람들은 놓치지 않고 즐겼고, 흥이 많은 그들은 술에 취하는지, 달빛에 취하는지 모를 만큼 술잔을 부딪치는 소리가 가득 찬 도시였다. 


파리 한인 민박에서 함께 있던 P와 우연히 마드리드에서 다시 만났다. 그것도 같은 숙소에서. 그녀가 츄러스를 좋아하냐고 물었다. 솔 광장 근처에 유명한 집이 있으니 같이 가자고 했다. 가는 동안 오늘 별다른 계획이 있는지, 대화가 오갔다. 여행자에게 계획은 있다가도 없어지고, 없다가도 생기는 거 아닌가? “오늘 하루 같이 다녀요!” 아마도 나는 츄러스라는 것을 그날 처음 먹어봤으며, 그걸 초콜릿에 찍어 먹으면 또 다른 새로운 맛이라는 것도 그때 처음 알았다. 모두 그녀 덕분이었다.  


빠에야로 저녁을 먹고 호스텔로 돌아가는 길에 그란비아가 있었다. 유럽 느낌이 물씬 나는 멋진 건물들을 비추는 노란 불빛이 어찌나 로맨틱했던지, 그 길을 찬찬히 걸으면서 참 행복했더란다. 어둑어둑해지자 한결 시원해진 마드리드의 밤공기가 참 부드러웠더란다. 온종일 걸어 다녔지만 힘듦 보다는 즐거움이 더욱 컸더란다, 그래서 그 길을 걷는 내내 웃을 수 있었더란다. 


츄러스라는 것을 처음 먹었더란다. 
2013년의 여름밤, 마요르 광장에 뜬 달.
2013년 여름의 그란비아.



5년이 지난 가을밤, 공기가 제법 선선했던 마드리드에서 똑같은 길을 걸었다. 조금은 변한 듯했지만 여전히 번화가였고 여전히 화려한 거리였다. 여전히 많은 사람이 찾는 곳이었고, 나는 그 사람들 틈에서 나의 흔적을 찾고 싶었다. 5년 전에 이 길을 걸었던 여행자로서 묻어두었던 기억의 조각 말이다.  


P와 함께 갔던 츄러스 집을, 또 다른 사람과 다시 갔다. 그때도 지금도, 나는 초콜릿을 좋아하지 않지만 이곳에서만큼은 예외다. 여기는 마드리드니까, 괜찮다. 한 입 베어 물 때마다 바삭바삭한 식감이 느껴졌다. 맛있다, 여기는 마드리드니까. 



2018년의 가을밤, 이 앞에서 버스킹을 하던 스페인 남자의 감미로운 노랫소리와 함께.
가을밤의 그란비아 거리.



그렇게 마드리드 곳곳에 흩뿌려진 기억의 조각들을 하나둘씩 모으다가, 정신을 차리고 보니 호텔 침대에 누워 핸드폰을 만지작거리고 있다. 위에 있는 사람이든 아래에 있는 사람이든 서로의 존재를 확인할 수밖에 없는 도미토리 2층 철제 침대였는데, 이제는 몸의 경계를 따라 모양이 잡혀있는 푹신한 침대에 누워있는 것이다. 움직일 때마다 바스락바스락 기분 좋은 소리를 내는 새 햐안 이불이 있는 침대. 그때 스쳐 지나가는 문장 하나. 


아, 나는 지금 출장을 와있지. 


호텔 로비로 내려가 본다. 동료가 했던 말이 생각난다. “이 호텔은 호텔 같은 느낌이 나네요.” 그러네요, 여긴 호텔같이 예쁘게 꾸며놓았네요. 컨셉에 맞게 잘 꾸며진 로비에는 편안한 의자가 놓여 있고, 테이블 위에는 젤리가 담긴 유리병이 있다. 사람들은 소파에 앉아, 누군가를 기다리며 하나씩 하나씩 꺼내 먹었더란다.


신나는 팝 대신 조용한 클래식이 흘러나오고, 짧은 팬츠에 커다란 여행 배낭을 어깨에 들쳐 메던 여행자 대신 말끔한 정장에 브리프 케이스를 들고 있는 비즈니스맨이 체크인을 하고 있다. 늦은 밤, 마드리드에서의 마지막 밤, 아니 어쩌면 이른 새벽, 나는 이곳에서 눈에 담았던 풍경과 느꼈던 모든 감정과 모든 기억을 되짚어 본다.  


낯설다. 5년 전, 보다 자유로웠던 내가 봐왔던 풍경과는 사뭇 달라졌음이.

그럼에도 익숙하다. 5년 전 내가 남기고 간 기억의 조각들이 나를 알아봐 주었으니까. 

그래서 궁금하다. 5년 후의 나의 모습은 어떻게 변해있을지, 또 어떤 기억을 찾을 수 있을지.



푹신한 침대보다 상대의 움직임이 그대로 전해지는 도미토리 2층 철제 침대가 그리운 걸지도.




한 장소에 시간 차이를 두고 방문한다는 건 꽤 괜찮은 일이다. 과거에도 있었고, 지금도 있고, 앞으로도 있을 이곳에 나를 조금씩 떼어놓고 간다는 것은. 제법 낭만적이지 않은가? 

그날 밤, 내게서 덜어진 조각 하나를 고이 묻었다. 나만이 아는 장소에, 나만이 찾을 수 있도록. 마드리드에서의 마지막 밤이었다.



“이 도시는 변한 게 없어요, 저만 변해요. 자기만 변하니까 내 변화를 느낄 수 있어요. 그게 그 자리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굉장히 고마워요. 반갑고.” (tvN 알쓸신잡 中 김영하 작가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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