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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재 Nov 03. 2018

당신, 제 얘기 좀 들어줄래요?  

파리 퐁네프 다리 위의 그녀, 빨간머리 앤을 만나다. 


언제였더라. 제법 쌀쌀했던 11월의 어느 날, 파리 퐁네프 다리를 걷고 있을 때였어요. 지금은 조금 달라진 모습이지만, 제가 갔을 때는 다리 난간에 자물쇠가 가득가득했었죠. 모두가 자물쇠를 채우기 바쁜데 검은 머리카락 색만큼이나 짙은 검은색 눈동자를 가진 여자가 자물쇠를 풀려고 하는 거예요. 특이한 행동 때문이기도 했지만, 다이애나와 닮은 모습에 저는 눈을 뗄 수가 없었어요. 


차가운 바람이 훑고 간 그녀의 볼은 빨갛게 생채기가 난 것 같았어요. 여자의 얼굴은 감히 짐작할 수 없을 만큼의 이야기와 감정이 뒤섞여 있는 듯 보였죠.


열쇠를 넣고 돌리기만 하면 자물쇠는 열릴 텐데, 그녀는 미처 돌리지 못하더군요. 그러고는 털썩 주저앉아 잠긴 자물쇠를 계속 바라보고 있는 거예요. 그녀는 기억의 끈을 놓지 않으려 했던 걸까요, 놓지 못했던 걸까요. 대체 무슨 생각이었던 걸까요, 그때의 저는. 


“당신, 제 이름이 뭔지 알아요? ‘ANNE’이요. 전 제 이름을 정말 싫어했어요. 우아하지도 않고, 아름다운 이름도 아니었거든요. 그런데요, 저조차도 싫어했던 제 이름을 사랑해준 분이 계셨어요. 당신에게 꼭 해주고 싶은 말이 있는데, 잠깐 제 이야기 좀 들어주실래요?”





예상했어요. 짐작도 했어요. 흔히 말하는 마음의 준비도 했어요. 서서히 꺼져가는 삶의 불빛을 바라만 볼 수밖에 없는 마음을 상상도 해봤어요. 마릴라 아주머니와의 이별만큼은 덜 아프고 싶었거든요. 매튜 아저씨와는 너무 갑작스럽게 헤어졌는걸요. 준비하지 못한 헤어짐은 너무 아프다는 걸 정말, 진심으로 알고 싶지 않았지만 강요당하듯 알고 말았어요. 피한다고 피할 수 있는 게 아니었어요. 


처음 만났을 때 남자아이가 아니라서 실망을 하셨다는, 강인했던 모습과는 너무 달라진 마릴라 아주머니를 바라보는데, 눈물이 왈칵 쏟아지려 하는 거예요. 왠지 울면 안 될 것 같아 입술을 꼬옥 깨물며 참고 있었어요. 헤어짐 앞에 나약한 모습을 보이기 싫었거든요. 언제나 그랬듯 씩씩한 앤 셜리로 남고 싶었어요. 


하지만 어른들 눈에는 다 보이는 걸까요? 저를 바라보는 아주머니의 눈빛에 무너져버렸어요. 굳이 애쓰지 말라고, 너는 언제나 내게는 어린아이이니 어리광을 부려도 괜찮다고, 삶의 무게를 혼자 지고 가려 하지 말라고 하시는 것 같았어요. 





"앤, 슬픔을 등지지 말아라. 감정은 억누른다고 사라지는 녀석이 아니란다. 감추려 하면 할수록 더욱 커져서 결국 너를 삼켜 버릴 거야. 곪게 두지 말아라. 터트려서 드러내어야 할 땐 드러내야 해. 당장은 더 큰 흉터를 남기는 것 같이 보이지만, 말끔하게 아물 수 있는 가장 현명한 방법이란다.


누구나의 인생에는 만남과 헤어짐이 반복된단다. 우리가 너를 만났던 순간도, 매튜 오라버니가 우리 곁을 떠난 것도, 내가 너의 곁을 떠날 수밖에 없다는 사실도. 모두 네 삶의, 그리고 내 삶의 일부분이란다. 


부디 헤어짐을 두려워하지 말기를 바란다. 다시는 볼 수 없다고 생각하지 말아라. 두려움이 네 삶을 집어삼키게 두지 말렴. 혹여 네 인생에 누군가가 만남으로 들어오고 헤어짐으로 떠나겠다고 한들, 원망으로 보내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떠난 존재가 남기고 간 상처를 홀로 떠안기 무섭다고 말이다, 네게 오는 길을 막고 서있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아, 아주머니. 하지만 더 아프고 싶지 않아요. 저는 언제쯤 이별에 익숙해질까요? 열 번의 이별을 연습해서, 덜 아파할 수 있다면 그깟 열 번의 슬픔은 이겨내겠다고 생각하던 때가 있었어요. 소용없는 일이란 걸 곧 깨달았지만 말이에요."


"나의 아이야, 어른도 이별을 마주했을 땐, 아파할 수밖에 없단다. 마음 깊이, 온 마음을 다해 충분히 슬퍼하고 눈물을 흘린단다. 그게 이별에 대한 예의가 아니겠니? 헤어짐 앞에 무덤덤하다는 것은 그 존재를 열렬히 사랑하지 않았기에 가능한 일이다. 네 심장으로 함께 숨을 쉬어준 존재인데 어떻게 아프지 않을 수 있겠니? 이별에 충분히 아파할 줄 안다면 새로운 사랑을 받아들일 수 있는 어른이 되었다는 거란다.


너는 네 이름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나는 네 이름을 참 좋아했다. ‘그리고(And)’처럼 네 이름을 부를 때마다 삶의 연결고리가 하나씩 생기는 것 같았기 때문이지. ‘매튜’와 ‘마릴라’ 둘 뿐이었던 나의 일상에 ‘그리고’ 앤 네가 들어온 후로 우린 사랑을 배웠단다. 셋이 함께 시간을 보냈던 날들, 같은 이야기를 공유했다는 것. 그게 사랑이었다. 거창하지도 위대하지도 않아. 우리가 만나지 않았다면 서로에게 존재하지 못했을 삶의 시간들, 그뿐이더구나. 


너의 삶이 앞으로 누군가에게 선물과도 같은 존재가 되길, 너의 삶은 또 다른 누군가가 아름다운 빛으로 가득 채워주길. 사랑한다, 매튜와 마릴라의 소중한 앤 셜리."





사랑이고 이별이었어요, 참 오랜 시간을 함께한 마릴라 아주머니 와요. 역시 속수무책으로 무너져내렸고, 얼마나 울었는지 모를 정도로 울면서 아주머니를 보내야만 했지요. 정말 아팠어요. 그런데요, 만약에 제가 이별이 두렵다고 마릴라 아주머니, 매튜 아저씨를 사랑하지 않았다면 제 삶이 얼마나 가련했을까 싶은 거예요. 


사랑이 가져다주는 벅찬 감정도

이별이 가지고 오는 슬픈 감정도 

모두 제 삶을 만들어준다는 걸 알게 되었어요. 




퐁네프 다리 위의 아름다운 여인이여, 그러니 부디 당신의 기억을 놓아버리지 말아요. 

당신이 사랑했고 사랑받았던 그 시간을 버리려 하지 말아요. 

사랑이 떠난 자리에 분명 그 존재가 남기고 간 선물이 있을 거예요. 


삶은 계속 이어지고 있어요. 제 이름처럼 말이에요. 하루는 기쁜 날, 그리고 또 하루는 슬픈 날. 당신의 하루하루가 연결되어서 그대의 삶이 빛날 수 있는 거잖아요. 


당신, 하루하루가 버거울 땐 저를 생각해주세요. 조용히 제 이름을 불러주세요,

ANNE, ANNE, ANNE. 

그리고 (AND) 생각해주세요. 당신 삶을 채워줄, 그대의 연결고리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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