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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재 Nov 07. 2018

생각보다 예민하고,
생각보다 강한 힘을 가진.

# 청각.  [ 프라하, 체코 ] 


창문을 통과한 빛이 얼굴에 부딪혔다. 따사로웠다가 뜨거웠다가, 감고 있는 눈앞이 환해졌다가 다시 어두워졌다가. 오후의 햇빛이었다. 몸을 노곤하게 만들어주는 기분 좋은 따뜻함.


밴 안에는 각자의 사연을 가진 7명이 있었다. 체코로 허니문을 왔다는 신혼부부, 남자 둘이서는 영화도 보러 안 간다는데 멀리 체코 땅까지 함께 여행 온 대학생 2명, 입사 동기이자 퇴사 동기인 우리 둘, 그리고 기러기 아빠이자 가이드이자 운전기사까지 해주는 아저씨. 


한 명을 제외한 여섯 명은 잠이 들었다, 깨었다를 반복하고 있었다.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감미로운 올드팝 멜로디를 자장가 삼아서. 아침 일찍 프라하를 출발해 체스키크롬로프로 다녀오는 당일 투어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프라하 시내에 들어왔음은 울퉁불퉁한 돌길로 알 수 있었다. 자잘 자잘한 돌길은 내 몸을 다급히 흔들어 깨웠다. 이제 그만 일어나 바깥을 보라고. 저 멋진 풍경을 안 볼 거면 너는 프라하에 대체 왜 온 거냐고 말하듯이. 투명한 창문은 하늘의 주황빛을 고스란히 담아내고 있었다. 캔버스 같다. 천천히 프라하의 모든 것을 담아내는 작지만 큰 캔버스.


프라하는 화려한 색감을 가지지 않았다. 대신 자연이 주는 빛을 자신만의 색으로 잘 표현해냈다. ‘인위적인 아름다움’보다는 ‘자연스러운 수수함’이라는 수식어가 더 잘 어울리는 도시였다. 그랬기에 태양이 내려앉으며 선물한 주황빛이 더욱 강렬하게, 더욱 찬란하게 느껴졌으리라. 




여행을 하다 보면 가끔 예상치 못했던 장소에서, 미처 준비하지 못한 찰나에 깊숙이 빠져들 때가 있다. 어디선가 흘러나오는 음악의 파동과 내가 존재하는 곳의 주파수가 딱 맞아떨어질 때. 물리적인 시간은 중요하지 않다. 잠시 스쳐 지나가는 몇 초에 불과할지언정 조건에 들어맞는다면 오래도록 기억될 경험을 하게 되니까. 


프라하와 체스키크롬로프를 왕복하는 동안 스피커에서 무심하게 흘러나오던 올드 팝송을 흘려듣기만 몇 시간 째였다. 하지만 그 순간은 달랐다. 운명처럼 귓가에 울려 퍼지는 ‘Moon River’의 감미로운 선율. 그 적절하고 절묘한 타이밍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완전한 어둠이 내려앉기 전, 가장 찬란하고 따뜻한 색감을 맘껏 흘려보내는 블타바 강. 마치 도시 전체를 물들여버릴 듯이 흐르고 또 흐르고, 결국 어둠이 내려앉을 때까지 흘려보내겠지.  


두 귀로 울려오는 부드러운 멜로디.

두 눈에 한가득 담기는 프라하의 해 질 녘.


이 훌륭한 콜라보레이션이 내게 선물해준, 짧지만 강렬한 경험을 오래도록 잊지 못했다. 앞선 글에서 프라하를 ‘낭만으로 가득했다’고 표현했던 것도 적절한 타이밍에 흘러나왔던 ‘Moon River’의 역할이 컸을 것이다. 


그날 밤, 나는 카를교 너머의 프라하 성을 바라보며 흥얼거렸다. 해 질 녘 나를 영화 속으로 끌고 들어갔던 마법과도 같은 주문, Moon River의 멜로디를. 

프라하는 그렇게 내게 가장 낭만적인 도시로 들어왔다. 별거 아닌 것 같은 음악 하나로. 청각은 생각보다 예민하고, 생각보다 강한 힘을 갖고 있었다. 눈으로 확인할 수 없기에 인지하지 못할 뿐이지.



카를교 위, 한 중년 커플. 


부다페스트의 해 질 녘. 빠르게 지는 해를 사진에 담기에는 프라하에서의 일정이 짧았다. 아쉽지만 부다페스트 사진으로.. 



어쩌면 잊고 있던 기억을 되찾아주는 건 시각이 아니라, 청각과 후각이 하는 일일지도 모르겠다. 언젠가 지나면서 들었던 노래 한 소절에, 문득 누군가와의 기억이 떠오르기도 하니까. 스쳐 지나가는 냄새 한끝에 과거의 감정이 사진처럼 떠올랐다 사라지곤 하니까.


어떠한 노래와 냄새에 나의 기억을 심어놓지 않았음에도, 도대체 어떻게 스스로 싹을 틔우고 뿌리마저 내려 자라나는지 알 수 없는 일이다. 그저 지켜만 볼 뿐. 


다시 프라하를 찾게 될 때, 해 질 녘을 함께 하는 음악은 분명 ‘Moon River’일 거다. 그리고 속삭이겠지. 두 귀와 두 눈으로 나는 프라하를 온전히 느끼고 있노라고. 이 순간을 위해 나는 프라하를 다시 찾았노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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