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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재 Dec 19. 2018

문득, 할머니의 세상이 궁금해졌다

# 단위. [ 인제양양터널, 강원도 ]


“할머니! 휴가 때 강원도에 다녀왔는데, 우리나라에서 제일 길다는 터널을 지나갔어. 안 막히니까 집에서부터 3시간이 안 걸리더라고요.”


무려 ‘강원도’까지 3시간이 채 걸리지 않는다는 걸, 할머니는 쉽게 상상하실 수 없었다. 할머니의 기억 속에서는 대관령이니, 미시령이니, 한계령이니 ‘령’으로 끝나는, 온갖 고개들이 자리 잡고 있었기에. 직접 가보지 않은, 기억 속에 존재하지 않아 상상조차 하기 힘든, 낯선 터널이 비집고 들어갈 자리는 없었다.


구불구불 굽이진 그 길을 관광버스 안에서 누구보다 신나게 즐기셨다고 했다. 물론 지금은 불법이지만, 일제 강점기에 태어나신 할머니가 관절에 부담을 느끼지 않고 춤을 출 수 있던 그때에는 모두에게 암묵적으로 허용되었던 일이었다.


“그려? 강원도꺼지 3시간이 안 걸린단 말여?”


할머니의 머릿속에서 서울에서 강원도까지는 얼마만큼 먼 거리일까. 서울에서 부산까지 하루 생활권으로 묶인 지가 한참인데, 우리 할머니에게는 얼마나 멀게 느껴지는 거리일까, 하는 생각에 마음이 조금 쓰라리다. 300km가 넘는 남쪽 땅까지도 하루 만에 다녀올 수 있는 세상이 되었지만 이제는 당신의 몸이 버티지 못했으니까.  




“할머니, 이제 그런 구불구불한 길을 지나지 않아도 돼요. 쭉 뻗은 터널만 지나가면 금방이에요.”


11km, 정확히는 10,965m. 시속 100km의 구간단속까지 하니, 최소한 6분 이상을 터널에서 보내야 한다는 말이다. 달리는 중간중간 무지개 불빛이 나오기도 하고, 호루라기 소리가 들리기도 하고, 안전운전하라는 멘트가 나오기도 하는데, 개인적으로 약간 공포감 조성을 위한 방법이 아니었을까 싶다. 터널에서 우우웅 울리는 여자 목소리를 듣는 건 그다지 유쾌한 경험이 아니니까.


나조차도 그 길고 긺에 지루함과 약간의 불안감을 참아내면서 통과했던 엄청난 길이. 세상에, 세상이 언제 그렇게 개벽을 했다냐, 라는 유의 깜짝 놀라는 할머니의 반응을 기대했건만, 우리 할머니, 너무나도 담담하게 한마디를 던지신다.


“그기 몇 리 정도 되는겨?”


리, 리요? 리라니. 어렴풋이 학교 다닐 때 배웠던,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이 십 리도 못 가서 발병 나기를 바랐던, 아리랑 노랫말이 떠오른다. 십리가 약 4km라고 했으니까, 가만 계산 좀 해볼까? 한 삼십 리 정도 되려나? 대충 계산해보다가 숫자는 왠지 정확하게 알려드려야 할 것 같은 생각이 스쳤다. 적어도 할머니 세상의 ‘리’에서는.

우리는 가벼운 터치 한 번만으로 많은 정보를 접할 수 있는 스마트한 시대를 살고 있지 않은가? ‘단위변환’을 검색해 미터를 리로 바꿔본다. 10,965m는 정확히 ‘27.920139리’였다.


“할머니, 28리 정도 돼요.”


할머니의 궁금증은 그렇게 해결되었다. 몇 km가 아니라 몇 리로. 할머니와 나는 같은 세상을 살고 있지만, 또, 다른 세상을 살고 있었다. 할머니의 그곳에서는 익숙한 단어가 내가 사는 세상에서는 익숙하지 않은 것들이 종종 있었으니까. 기억을 가만히 되짚어보니 어릴 때부터 들어오던, 하지만 크게 신경 쓰지 않았던 할머니의 단어들이 하나둘씩 되살아난다. 그저 그런 말로 흘려버렸던 할머니의 흔적이 묻어나는, 당신의 말들.




“반 되에 3천 원을 달라고 하던디.”

나는 한 되가 몇 그램인지 모른다. 그러니 반 되가 얼마인지 알지 못하는 건 당연지사다.


“쌀 한 말값이여.”

한 말? 마트를 가면 10kg, 20kg은 봤어도 포장지에 한 말, 두 말이라고 써져 있는 건 보지 못했다. 한 말은 대체 몇 kg을 말하는 건지 스스로는 알 방법이 없다.  


한 ‘관’이 어느 정도의 무게인지 알지 못한다. 내게 익숙한 단위는 그램과 킬로그램이었으니까. 문득 할머니를 따라갔던 재래시장에서 한 관에 얼마, 라고 써져 있던 누런 판지가 기억이 난다. 잉크가 얼마 남지 않았으리라 짐작되는 검은색 매직으로 아무렇게나 찌익 휘갈겨 쓴 글자들. 정말 글자 그 자체로만 읽어냈을 뿐, 그 안에 숨겨진 정작 제일 중요한 알맹이는 보지 못했었다.


할머니는 ‘되’로 콩을 사던 세상에, 쌀 한 ‘말’로 물건값을 비교하던 세상에, 한 ‘관’의 글자가 알맹이를 품고 있던 세상을 지나오셨고, 종종 그 세상을 여행하고 오셨던 것이다.





도시와 도시를 잇는 물리적 거리는 점점 짧아지고 있고, 이에 맞추어 시간 또한 줄어들고 있는 시대에서 나와 할머니는 살아가고 있다. 과거의 할머니가 지금의 내 나이를 사시던 세상이 문득 궁금해진다. 내가 없던 시절의 할머니가 만들어 온, 당신의 세상. 흑백사진조차  빛이 바랠 정도로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할머니의 기억 속에선 생생하게 살아 숨 쉬는 세상. 

이번 주말, 할머니의 세상을 여행하러 다녀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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