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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재 Dec 27. 2018

시간을 미리 사는 사람

# 시차. [  6대륙의 어딘가 ,  지구라는 별에서 ]



대한민국 아침 8시. 지하철은 끊임없이 사람들을 삼키기만 했다. 삼킬 줄만 아는 괴물처럼 꾸역꾸역 집어넣기만 할 뿐이었다. 선택받은 몇몇 사람은 테트리스 블록이라도 된 듯 빈 곳을 찾아 쏙쏙 들어갔다. 문제는 이도 저도 아닌 공간에서 어정쩡하게 서 있는 나 같은 대다수의 사람들. 많은 사람의 몸과 마음은 회사에 도착하기 전부터 만신창이가 되어버리는, 사투를 벌이는 시간이었다.


무언가에 타려 하는 욕구가 가장 강하게 발현되고 있는 그때가, 지구 반대편에 있는 유럽에서는 조용히 하루를 정리하고 내일을 맞이하는 시간이다. 밤 12시. 자정. 아직 미처 맞이하지 않은 아침, 잠들지 않은 또는 그러지 못한 시간.



어느 누군가는 자신을 힘들게 했던 일과에 지쳐 몸을 뉘었을지도. 돌아오는 아침에는 덜 고단한 하루가 되길 바라면서.

어느 이는 누군가와 나누었던 사랑의 감정을 회상하며 미소 지을지도. 앞으로 펼쳐질 행복할 나날들을 기대하면서.

또 다른 어느 이는 누군가를 못 잊어 사무치게 그리워하면서 마음을 부여잡고 있을지도. 그리움에 무너지지 않기를 기도하면서. 



지구별의 한쪽에서는 하루 중 가장 치열하지만, 또 반대편에서는 하루 중 가장 고요한 시간.

나는 그 신비로운 사실에 종종 정신이 아득해지곤 했었다.





당연한 게 당연하지 않게 느껴질 때.

이따금 나는 재미있는 상상에 빠지곤 하는데, 사람들이 ‘시차’라고 부르는 그것이었다. 지구의 입장에서는 자전을 하니 낮과 밤이 생기고 당연히 시차가 생기는 게 진리이지만, 어느 대륙에 발을 딛고 사는 인간으로서 한마디 해보자면, 내가 보는 시계는 아침 8시인데 동시에 누군가는 밤 12시를 살고 있다는 게 신기하다는 것이다. 두 개의 얼굴을 가지고 있었던 야누스였던 걸까, 지구라는 별은.


어릴 때, 어둠이 무서워 잠자는 행위 자체가 두려웠던 적이 있었다. 불을 끈 방을 가득 채운 무거운 어둠이 싫었다. 두꺼운 어둠의 막을 걷어 내준 것은 상상력이었다.


‘지구 반대편 어딘가에서는 지금 아침이야. 모두가 활기차게 움직이고 있을 거라고. 나는 잠깐 동안만 어두운 거야. 눈을 감았다가 떴을 땐, 여기도 환해졌을 거야.’ 라고. 그럼 신기하게도 마음이 좀 진정이 되면서 잠에 스르르 빠져들곤 하는 것이었다.





가끔 그런 손님이 있었다. 유럽까지 가는데 5, 6시간 정도밖에 걸리지 않느냐고. 무슨 소리인가 해서 물어보니 인천 출발 시간이 10시인데 유럽 도착 시간이 15시란다. 본인이 생각하기에도 유럽까지 가는데 5시간밖에 안 걸리니 이상해서 내게 물어보는 것이리라.


“시차 때문에 그렇습니다. 비행시간은 보통 12시간 이상 걸려요.”


그제야 멋쩍은 웃음과 함께 아, 그렇군요. 라는 대답이 수화기를 타고 넘어온다. 그럴 수 있죠 뭐, 라는 말을 할 타이밍을 매번 놓쳐버리고는, “하하하” 무미건조한 웃음만을 태워 보낸다.  


그런데, 정말 그럴 수 있다. 나도 처음 해외여행을 떠났던 날, 인천에서 상해까지 갈 때는 2시간이 걸리는데 오는 거는 왜 1시간이냐고 선배에게 물었었다. 서울과 상해의 시차가 1시간이 있기 때문이야, 라고 친절히 대답해주었던 선배. “아, 그렇군요.”라고 대답했던 나. 그녀에겐 당연했지만, 내게는 당연하지 않은 개념이었다.





내게 시차는 그런 것이었다.

유럽과의 시차 때문에 새벽에 울리는 보이스톡의 멜로디는 공포 그 자체가 되어버렸고, 후유증은 몇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조금은 남아 있다. 새벽 1시가 넘어서 울리는 보이스톡은 곧 유럽 현지에 있는 손님에게 크든 작든 무슨 일이 터졌다는 알람이었고, 더욱 절망적인 건 한국에 있는 내가 당장 해줄 수 있는 게 없다는 사실이었다.  


손님만큼이나 당황한 나지만, ‘프로페셔널’한 척 정해진 매뉴얼대로 설명하고 전화를 끊은 밤, 나는 깊이 잠들 수 없었다. 어떻게 수습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걱정과 혹 내가 틀린 정보를 알려줬으면 어쩌나, 온갖 걱정의 실타래가 끊임없이 이어졌다.


그러고는 시차를 원망하기에 이르렀다. 왜 하필 낮과 밤이 뒤바뀌어서는! 한두 시간이나 나지 뭐 한다고 일곱, 여덟 시간씩이나 난다니! 하고. 결국 거의 뜬눈으로 밤을 새우다시피하고 일찍 출근했다.





내게 시차는 그런 것이었다. 때로는 두려움이었고, 때로는 신비로움이었고, 때로는 걱정의 시발점 같은 것.

어느새 몸에 익숙히 배어버린 시차는 한국 시각을 볼 때도 유럽 시각이 저절로 계산되어 나올 정도가 되었다. 영국과 프랑스 사이에 있는 1시간의 시차마저도 모두. 꽤 오랫동안 떨어지지 않을 혹 아닌 혹을 달고 사는 기분이랄까.



유럽에서 점심 좀 먹어볼까? 할 때, 한국에선 아, 저녁 잘 먹었다!라고 할지도.



내가 정신없이 열고 있는 하루의 아침을, 같은 별에 사는 누군가는 조용히, 차분하게 닫고 있다. 내가 조용히 닫고 있는 하루의 마지막을, 같은 별에 사는 누군가는 아직, 뜨겁게 일궈나가고 있다.


상상을 해본다. 시간은 거슬러 올라갈 수도, 되돌아오지도 않는다는데 내가 지나쳐온 시간을 반대편에 사는 누군가는 아직 살아가고 있구나, 라는. 나에게는 –ed가 붙어버렸는데, 누군가에게는 –ing를 붙일 수 있구나, 라는.



유럽의 해가 떨어져갈 때, 한국은 늦은 밤이거나, 이른 새벽이거나.



그렇게 가끔, 아주 가끔, 지나간 시간을 되짚어 본다. 내가 보냈던 그 시간을 살고 있을 누군가에게. 잘살고 있느냐고, 내가 지나온 시간을 밟아오며 혹 내가 남긴 흔적들을 찾을 수 있었냐고. 조용히, 내 목소리가 너무 클까 봐 한껏 힘을 빼고 속삭이듯이  묻곤 했다. 지구 어딘가를 부유하고 있을 나의 물음들이 또 그렇게 하나씩 늘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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