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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재 Jan 06. 2019

인생과 여행, 둘의 닮은 구석.

# 뜻밖. [ 프랑크푸르트, 독일 ] 

     

“No!” 역시, 독일인은 칼이다. 거침없이 내뱉은 그녀의 No! 가 깊이 숨겨둔 지갑에 정확하게 꽂혔다. 매섭기도 해라. 날카롭게 꽂힌 칼은 빼내야 하는 법. 아침에 호텔을 출발할 때 고이 잘 모셔둔 100유로 지폐 한 장이 칼끝에 꽂힌 채로 함께 빠져나왔다. 빳빳한 지폐를 내밀고 종이 한 장을 새로 받았다. 내가 가지고 있던 종이는 쓰레기가 되어 버린 채로. 1시간 전만 해도 일등석 열차 티켓이었는데. 왜! 도대체 왜! 종이 쪼가리가 되어버린 거냐.    


보고 있자니 속이 쓰라려 찢어버리고 싶었지만 차마 미련을 버리지 못해 반으로 접고 또다시 반으로 접어 크로스백 안에 깊숙이 넣어버렸다. 예정대로라면 우리는 프랑크푸르트 중앙역에서 출발한 뮌헨행 일등석 열차를 타고 있어야 했다.      


하지만 여기, 프랑크푸르트 공항역에 있는 벤치에서 얼이 나간 채로 앉아 있는 것이다. 마음 좀 추슬러보자, 하면서. 우습게도 우리만 있는 건 아니었다. 역에서 내가 말을 걸었던, 외국인 여자도 함께 있다. 멀찌감치 떨어진 채로.      




그날은 분명 여유로운 아침이었다. 하긴, 여행자에게 여유롭지 않은 날이 있겠냐마는. 일찍부터 부지런히 움직인 바람에 느긋하게 조식까지 챙겨 먹고 호텔을 나섰다. “정신없이 움직이지는 말자.” 우린 동의했다. 쫓기는 시간 속에서 이동하고 싶진 않았으니까.      


열차 출발 시각은 08시 54분이었지만 오전 8시를 조금 넘어서 역에 도착했다. 완벽한 계획이었고, 훌륭한 실행력이었다. 하지만 예상치 못한 변수에는 힘 한번 못 쓰고 무너지는 게 여행 계획이 아니던가. 그날이 그런 날이었다.      





사람은 왔는데 만나기로 한 열차가 오지 않았다. 우리 몇 시에 어디에서 만나, 라는 약속을 열차와 나는 전산으로 이미 완료하지 않았나. 나는 그 대가로 금액을 지급했던 거고. 5분, 10분,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더 큰 불안감이 엄습해오기 시작했다. 손목시계 한 번, 열차 티켓에 적혀 있는 시각 한번, 플랫폼에 앉아 있는 사람들 한번. 이들도 기다리고 있는 걸 보니 이상하게 조금은 위로가 되는 착각이 들었다. 정작 어디로 가는 사람들인지도 모르면서.      


15분 정도 지나고 열차가 한 대 들어왔다. 역사를 가득 채운 사람들이 내는 웅성거림과 안내방송이 뒤섞여 플랫폼 안을 맴돌았다. 우우웅- 빠져나가지 못한 소리가 안에서 울린 탓에 무어라 말하는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아니 이건 핑계일지도 모른다. 결국 방송을 제대로 듣지 못했다는 변명.      


일단 열차는 들어왔고, 이미 출발하기로 한 시각에서 15분이나 지난 상황이었고, 서둘러서 타는 사람들을 보니 나도 빨리 열차 문을 찾아 올라가야겠지만 그래도 그냥 타기엔 좀 꺼림칙하니까 외국인한테 한번 물어보자. 정신없이 사람들이 타는 와중에 어느 여자에게 말을 걸었다.     


“이 열차가 뮌헨으로 가는 게 맞나요?”

“맞아요.”

“고마워요.”


우리는 열차에 올랐다. 다행이었다.

“일등석으로 가자, 일등석.” 어깨엔 배낭을, 한 손에는 24kg 캐리어를, 또 한 손에는 열차 티켓이 쥐어져 있었다. 두 다리만큼이나 캐리어에 달린 4개의 바퀴도 빠르게 굴렀다. 얼리버드로 끊은 49유로짜리 일등석, 29번째 Coach의 43번, 45번 너와 나의 자리를 만나러 가는 길이었다. 


괜히 설렜다. 독일에서 처음 타는 열차였고, 유럽에서 처음 타는 일등석이었다. 얼마나 뿌듯해하면서 표를 끊었던가. 그런데 어라? 우리 자리에 외국인 할머니 두 분이 앉아계시는 게 아닌가! 분명히 우리 자리인데?      


“저, 여기 저희 자리인 것 같은데 혹시 좌석번호가 몇 번이세요?”     


확인을 위해 우리는 교환식을 했다. 서로의 손에서 티켓이 바뀌어 전달됐다. 순간 내 눈을 의심했다. 29번째 Coach의 43번, 45번이 정확하게 찍혀 있었다. 이게 무슨 상황이지? 전산 오류인가? 아직 판단이 서지 않았는데 할머니의 목소리가 들렸다.     


“뮌헨으로 가는 거예요? 이 열차는 뒤셀도르프로 가는 건데.”

“네? 뒤셀도르프요?”     


뒤셀도르프라니, 뮌헨과는 정반대 방향인데? 그래, 우리는 열차를 잘 못 탄 거다. 이 다음번에 오는 열차를 탔어야 했는데. 가만, 그럼 내가 말 걸었던 외국인도 잘못 탄 거네.      


“이번에 내려서 갈아타요.”     


곧 프랑크푸르트 공항역이란다. 그나마 다행이었다. 공항이라면 시내와 멀지 않은 곳이니까. 서울역에서 용산역으로 이동한 셈이었다. 하지만 되돌아간다고 해도 우리가 예약해둔 열차는 이미 떠나고 없을 거다. 놓치지 않으려 아침 일찍부터 부지런히 움직였는데, 결국 어이없게 놓쳐버렸다는 사실에 허무함과 허탈함이 독처럼 퍼져나가, 정신마저 도망갈 채비를 하고 있었다.      


열차는 빨랐다. 이렇게 빠르면서 제시간에 좀 맞춰서 오지 그랬니? 원망을 해보려다 소용없는 일이라는 걸 알기에 그만두었다. 금세 공항역에 도착했고, 급하게 캐리어를 내렸다. 물어물어 티켓을 사는 곳을 찾아 환급이 되냐고 묻는 내 작은 희망을, 독일 직원은 단칼에 베어버린 것이다. 

그렇게 해서 내가 말을 걸었던 외국인과 우리 둘, 세 명은 프랑크푸르트 공항 역 벤치에 앉아있게 되었다.      




“액땜했다고 생각하자, 언니!” 

나보다 더 의젓한 동생이었다. 그래, 차라리 다행이었다. 마지막 열차가 아니었음이, 하필이면 내가 예약한 자리와 같은 자리에 앉아있던 외국인 할머니 덕분에 바로 열차를 잘못 탔음을 인지했다는 사실이, 정신없는 와중에 각자 캐리어는 잘 챙겨서 내렸다는 대견함이, 즉 잃어버린 물건이 전혀 없다는 행운이. 허허허, 웃음이 나왔다.  



사람이란 참 희한한 구석이 있어서 ‘어쩔 수 없음’을 머리가 아니라 마음이 제대로 이해를 하게 되면, 어느 순간 불안과 짜증은 물러가고 평온함이 찾아올 때가 있다. 뒤셀도르프까지 올라가지 않은 게 어디냐고, 그랬으면 일정은 일정대로 꼬이고 돈은 돈대로 깨졌을 거라고, 잃어버린 물건 없이 모두 잘 가지고 있으니 그걸로 되었다고, 자신을 스스로 토닥이는 것이다.      



결국 프랑크푸르트 공항역에서 뮌헨행 열차 표를 새로 구입해 이동했다



인생이 계획처럼 딱딱 진행되지 않듯, 여행도 마찬가지다. 계획은 계획일 뿐 언제나 예기치 못한 상황과 사건이 기다리고 있음을, 떠나면서 배우기 시작했다. 떠나지 않았다면 경험하지 못했을 많은 사건과 사고들, 어쩌면 굳이 접할 필요 없던 경험이었을지언정, 그 안에서 정신 차리고 수습을 해야 하는 건 나 자신임을 절절히 깨달았던 거다. 작은 위로라면 어떻게든 수습은 된다는 것. 작은 문제라면 죽이 될지 밥이 될지는 알 수 없다는 것.      



아무려면 어때,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무언가를 만들어내고자 하는 나의 의지가 제일 중요하지! 그랬기에 떠날 수 있는 용기를 잃어버리지 않을 수 있었다. 집을 나서면 사건과 사고를 접할 확률은 당연히 높아지게 마련이다. 하지만 또 그만큼 다양한 사람들과 멋진 추억을 만날 확률도 높아진다. 인생과 여행이 똑 닮은 점이다. 그렇게 깊어지고, 무르익고, 다채로워진다. 나의 여행이, 나의 인생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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