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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재 Jan 07. 2019

겨울이라는 계절, 그리움이 묻어있는 계절.

# 티타임. (Tea Time) [ 안동, 대한민국 ]


물이 끓었다. 모락모락 올라오는 김을 바라보며 커피포트에서 커피잔으로 물을 따른다, 옮긴다. 쪼르르르르. 경쾌하게 울리는 물소리가 듣기 좋다. 조금이라도 더 오래 듣기 위해 포트를 높이  들어 올린다. 물소리가 한 옥타브씩 올라가는 것 같다. 인스턴트커피 한 잔을 마시고 있는 사무실에서 문득, 몇 해 동안 한결같았던 그 동네를 생각한다. 빨리빨리, 가 아니라 천천히, 한 템포 늦춰서 살아가자던 분들이 계시던 그 동네를, 나는 추운 겨울에 왕왕 떠올린다. 


사이가 좋은지 나쁜지는 모르지만, 사진상으로는 사이가 좋아보이는 하회마을의 형제. 



변화가 더딘 곳이었다. 그래서 좋았다. 개업한 지 몇 달 되지 않은 가게가 금세 다른 상점으로 바뀌는 서울의 거리에서는 느낄 수 없는 매력이었다. 아쉬움조차 가져볼 새 없이 너무나 빠르게 세상은 돌아가고 있었다. 변화에 피곤함을 느낄수록 변하지 않는 무언가를 찾아다녔다. 


지금 생각해보면 관광지로서의 ‘공간’이 아니라, 그곳에서 살고 있는 ‘사람’에 이끌려서 해마다 찾았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공간은 외부 환경에 의해 쉽게 변할 수 있지만, 사람이란 쉽게 변하지 않으니까. 그네들의 온기가 쌓이고 쌓여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나갈 테니까. 




“어서 와, 차 한 잔 마시고 들어가.” 

여행 후 게스트하우스의 문을 열고 들어오는 사람들에게 이모들이 건네는 첫인사였다. (물론 나는 여러 번 방문해서 얼굴을 익혔으니 말을 편하게 하셨다.) 바쁘게 움직였을 하루를, 차를 마심으로써 조용히, 천천히 마무리하라는 뜻이었을까.


거절하는 법이 없는 나는 “네!” 씩씩하게 대답을 하고 거실 중앙에 있는 커다란 나무 탁자로 갔다. 달그락달그락, 잘 정돈되어 있던 다기(茶器)가 탁자 위로 나오고 곧이어 물 끓는 소리가 들렸다. 매일같이 누군가의 하루가 찻물과 함께 흘러들었을 이 자리. 내 앞을 지나간 수많은 사람의 흔적이, 내 뒤로 올 수많은 사람에게 전해질 이 자리가, 오늘은 내가 만들어갈 내 자리다. 


처음엔 타타타탁, 그러다가 부글부글부글. 점점 더 빨라지는 게 뜀박질을 막 끝내고 왔을 때의 심장 박동 같다. 포트 스위치가 탁, 하고 올라가면 퓌시시시식, 소리는 잠들어버렸다. 이 녀석도 안정을 찾았군. 


찻잔과 정말 잘 어울렸던 매화.



쪼글쪼글 말려진 찻잎들이 다관(차를 우리는 주전자)에 들어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찻물이 찻잔에 담긴다. 국화꽃차일 때도 있었고, 보이차일 때도 있었고, 녹차일 때도 있었다. 짙은 황금빛이 담겼다가, 맑은 연둣빛이 담겼다가, 짙은 고동색이 담겼다가. 


때에 따라 차의 종류는 바뀌었지만, 여행자를 따뜻하게 맞아주는 이모들의 온정은 변함이 없었다. 세련되진 않았지만 진심은 가득했다. 이모들도, 그분들의 게스트하우스도. 공간에는 사람이 담기는 법이니까. 


쪼르르르르, 한 잔 한 잔에 정성이 따라졌다. 찻물을 끓이고, 그릇을 데워내고, 찻잎을 우려내는 이 모든 과정은 생각보다 긴 시간이 필요하며, 손이 많이 가는 일이었다. 

찻잔에 담긴 따뜻한 누군가의 마음을 한 모금 마시고 나서야 말이 트인 아이처럼 재잘재잘 떠들기 시작한다. “이모들!”로 시작한 대화는 하루 동안 있었던 일을 모두 쏟아놓느라 끝날 줄을 모른다. 





언젠가는 꽃피는 봄날, 바람에 휘날리는 벚꽃 잎이 흙길을 덮어 꽃길을 만들어주었던 그 날, 하회마을에 있었다. 벚꽃을 원 없이 보아서 참 행복했다고, 나룻배에서 찰방찰방 낙동강을 건너는 게 참 재미있었다고, 충효당에서는 맛있는 김밥을 얻어먹으며 마을 안내도 받았다고, 재잘재잘 떠들곤 했다.


또 언젠가는 단풍이 빨갛게 세상을 물들이던 가을날, 천 원짜리 지폐에 있는 그곳, 도산서원을 갔었다. 들어가는 길목마저 빨갛게 물이 들어 입고 있던 와인색 후드와 세트처럼 잘 어울렸다고, 해 질 녘 소나무가 서 있던 풍경이 정말 멋있었다고, 소나무 잎 한 가닥 한 가닥에 노을이 끼어있었다고, 한참을 이야기했다. 


하회마을
임하댐 근처에서, 바람에 날리는 벚꽃잎이 걸려있는 모습이 하얀 베일 같아서. 
도산서원으로 가는 길, 봄과 가을.



나무 탁자에는 여행 이야기만 있었던 건 아니다. 사람이 빠지지 않았다. 안동에서 나고 자란 이모들은 안동의 소식통이었다. 서울에서 사는 어느 종갓집의 종손이 곧 결혼한다는 소식부터, 어느 댁의 어르신이 돌아가셔서 장례식장에 온 동네 할매, 할배가 모여계시더라는 후일담까지. 나는 얼굴 한번 뵌 적 없는 분들이지만 순간 친척처럼 느껴져, 행복과 명복을 빌고 있는 게 아닌가? 


안동의 한 대학교에 얽힌 일화부터, 어느 연예인의 조부에 얽힌 사연까지. 꽤 신기하고 재미있는 내용이 줄줄이 흘러나왔다. 굳이 알 필요는 없지만, 알아두면 쓸데없는 신기하고 잡다한 이야기랄까? 신나게 떠들다 보면 한 시간 두 시간은 금세 지나가 버렸다. 





“늦었네, 이제 올라가서 쉬어. 내일은 어디를 갈 거니?” 라는 평범한 질문이 어느 샌가부터 “이젠 뭐 거의 다 가봤으니 갈 데도 없겠네. 뭐 하러 자꾸 와.”라는 호기심이 묻어나는 질문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그러게요, 저는 무엇 때문에 여기를 계속 찾아오는 걸까요? 저도 답을 모르는 질문을 그렇게 하시다니요, 허허허.”


좋은 질문을 받았으니 훌륭하진 않더라도 진심을 담은 답변은 내놓아야지, 싶어서 어느 날은 한번 생각해봤다. 새로운 게 없음에도 계속 갔던 이유는 이모들과 함께 하는 티타임이 그리웠기 때문이었다. 변하지 않는 사람과 함께 나누는 새로운 대화, 그 재미에 푸욱 빠져있던 거였다, 그때의 나는. 


서울로 돌아온 이후, 제대로 다기를 갖춰서 차를 마셔본 적이 없었다. 다기를 사기 위해 이것저것 알아보긴 했지만 막상 결제단계까지 가지는 못했다. 게으른 탓이기도 했고, 자신이 없기도 했다. 퇴근 후 지친 몸을 이끌고 저녁에 차를 마실 여유를 가질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들었다.  


혼자서 차를 고르고, 찻물을 끓여서 데우고, 차가 우러나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음미하고. 모든 과정을 거침없이 해낼 자신이 없었다. 스스로 마실 수 없는 값진 차를 마시기 위해 이곳을 계속 찾았던 것이다. 




안동을 마지막으로 간 지 3년 정도 지났다. 이모들이 긴 여행을 떠난다고 했다. 생각보다 길어진 여행으로 나는 꽤 오래 안동을 찾지 못했다. 다른 숙소는 내키지 않았다. 안동의 처음을 함께 한 숙소, 꼭 그곳에 머물러야 했다. 무언가를 보기 위함이 아니라, 무언가를 듣기 위한 여행길이니까. 


오늘같이 추운 겨울, 그 따뜻했던 공간이 그립다. 커다란 나무 탁자 위에 놓여 있던 찻잔의 온기, 입안에 퍼지던 쌉싸름한 보이차의 맛. 찻잔에 담긴 누군가의 정성, 포근한 이불처럼 기분 좋았던 이야기들, 이 모든 게 그리운 밤이다.  



우물쭈물 하다가 내 이럴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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