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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재 Jan 10. 2019

부족함의 가치

# 부족. [ 순천 선암사 , 대한민국 ]


“따뜻한 봄기운을 전국에서 느낄 수 있는 요즘입니다. 여기저기서 봄맞이 행사가 열리고 있는데요, 한결 가벼워진 옷차림으로 나들이를 즐기실 수 있겠습니다.”


일기예보를 믿지 말았어야 했다. 그래, 솔직히 나는 일기예보를 믿지 않는 사람 중 하나다. 하지만 출퇴근할 때는 상관없어도, 여행을 가거나 행사가 있는 날에는 어느 정도 의존해야 하는 게 또 일기예보가 아닌가? 적어도 비가 오는지 눈이 오는지는 알아야 하므로.  


그럼에도 결론은 ‘여전히’ 믿지 말았어야 했다. 일기예보에 포함되지 못한 산속의 어딘가는 봄기운이 풍요롭게 퍼지지 못했다. 만약 음악 기호로 그때의 봄을 표현할 수 있다면 아마 이렇지 않을까? 





서울의 봄은 늘임표로 할 거니까 보오오옴, 이라고 길게 읽어야 하고 산속의 봄은 스타카토로 할 거니까 봄! 이라고 짧게 끊어 읽어야 한다. 봄이 한참을 머무르고 있는 서울과 올까 말까 고민하고 있는 산속은 엄연히 차이가 나니까.


 순천 선암사의 봄은 스타카토 봄이었다. 따뜻한 봄기운을 느낄 수 있다고 일기예보에서는 얘기했지만, 여기는 해당되지 않았다. 아무리 그래도 전라남도인데 서울보단 따뜻하겠지 싶었던 내가 틀렸다. 완전히 틀렸다. 



옷을 껴입는다거나 두꺼운 옷을 입는다거나, 체온을 올리는 방법은 많이 있지만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나는, 여기 순천 선암사까지, 선암매라 불리는 매화나무 하나만 바라보고 왔단 말이다. 이렇게 쌀쌀할 줄 모르고, 3월 말이니 어느 정도는 꽃이 피어있겠지, 기대에 부풀어 왔단 말이다. 하지만 주차장에 내리는 순간, 기대감보다 불안감이 스멀스멀 기어들어 왔다. 


“어? 생각보다 추운데? 매화가 안 폈으면 어쩌지?”

“그래도 3월 말인데, 폈겠지.”


‘슬픈 예감은 왜 틀리지 않는 걸까?’라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었다. 누구나 적중률이 높아질 수 있는, 그러나 누구도 반기지 않을 정확한 예감. 나도 피해갈 수 없었다. 스타카토 봄 때문에 만개는커녕 홍매는 이제 꽃 몽우리가 맺힌 정도였고, 청매와 백매가 조금씩 꽃을 피우는 중이었다. 



아! 짧은 탄식이 나왔다. 아쉽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다. 오직 선암매를 위한 여행이었으니까. 일정을 조정하기엔 무리가 있었기에 일단 강행했던 거였다. 전국이 늘임표 봄인 줄 알고. 실망한 마음을 어떻게 달래주어야 할까 싶어 일단 한 쪽으로 가 가만히 서 있었다. 


발을 바삐 움직일 때는 마음이 같이 조급해했었는데, 잠깐 멈추고 바라보니 마음이 조금씩 가라앉으면서 느긋함이 자리 잡아갔다. 그리고 보이는 것들. 어? 제법 꽃이 피었구나. 군데군데 꽃을 피우기 시작한 대견한 나무들이 분명히 있었다. 실망감에 가려져 미처 보지 못했던 풍경이었다. 





물론 몇 그루 되지 않았지만, 꽃이 풍성한 청매와 백매를 이리 보고 저리 보고, 바로 옆에서 보고 멀리서 보면서 제일 마음에 드는 한 그루를 골랐다. 너로 정했어, 스타카토 봄의 전령으로. 


꽃잎 하나하나, 꽃 몽우리마다, 가지마다 시선을 조금씩, 조금씩 나누어 두었다. 빨리 볼 수가 없었다. 꽃이 피어있는 나무가 별로 없었으니까. 힘들게 왔는데 최대한 오래오래 머물렀다 가고 싶었다. 너와 함께 한 모든 느낌을 온전히 기억하겠어, 라는 생각으로 천천히 훑었다. 바람에 흘러나오듯 코를 자극하는 향기, 작지만 옹골진 꽃잎, 그 사이를 분주하게 돌아다니는 벌들의 일과까지.




가만 보니 여기 이 나무에서, 봄이 시작되고 있었다. 봄이 올까 말까 고민하는 지점도 여기, 그럼에도 봄이 조금씩 퍼져나가고 있는 곳도 여기. 봄의 전령은 열심히 스타카토를 늘임표로 바꾸고 있었다. 꽃 한 잎 한 잎이 세상과 인사를 할 때마다 조금씩 늘려졌을 음표의 박자. 그 일을 스스로 바지런하게 해내고 있는 거였다. 


미안하다, 기대한 모습에 미치지 못하였다고 실망해서 미안하다. 봐주는 이 없이도 묵묵하게 잘 해내고 있었다는 걸, 자세히 들여다보고 나서야 알아서 미안하다. 고맙다, 그럼에도 이토록 어여쁘게 피어줬으니. 충분하지 않기에 내 눈앞에 있는 한 그루가 더욱 소중하고 고마웠다. 부족함이 알려준 가치였다. 





만약 여기 있는 매화나무 모두가 만개했다면, 정말 기뻤을 거다. 너무 아름다운 나머지, 정신 못 차리고 분주하게 돌아다녔겠지. 이 매화나무와 사진 찍고 저 매화나무 아래서 사진 찍고. 그리곤 기쁨에 한껏 들떠 말했을 거야. “와! 진짜 너무 예뻐! 이래서 사람들이 선암매, 선암매 하는구나!” 어느 하나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았을 거면서. 안 봐도 훤하다. 


하지만 그렇게 대충대충 넘어가기엔 세상엔 경이로운 순간이 너무나 많다. 때로는 작은 순간이지만, 어떤 큰 사건의 시발점이 되는 경우도 있으니까. 매화나무에 어떤 변화가 생기고 있는지, 나무가 들려주는 이야기에 귀 기울일 잠시의 틈이 필요했던 걸지도 모르겠다. 조금 더 세심하게 들여다보면, 여태 볼 수 없었던 소중한 순간을 찾을 기회를 얻을 수 있다는 것, 그걸 배웠다. 





완벽한 여행이었다. 봄이 시작되는 지점에서 봄의 전령을 만났으니까. 조금씩 봄이 오고 있음을, 곧 이 깊은 산속에도 따스한 봄이 가득하게 채워질 거라는 걸, 그래서 일기예보처럼 모든 곳에서 봄기운을 느낄 수 있으리라는 걸, 이 매화나무 한 그루에서 볼 수 있었던 완벽한 여행 말이다. 


선암사에서 받은 선물을 풀어 보았다. 큰 것을 보지 못했다는 아쉬움 대신 작은 것의 소중함을 깨달았으니 되었다, 라고 적혀있는 카드였다. 고이 접어 주머니에 넣고 그곳을 떠났다. 어쩌면 세상은 작은 것에서부터 시작되었을지도 모른다. 봄도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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