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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재 Jan 13. 2019

단어로 엮는 여행의 순간들

# 에필로그.



단어로 엮어보고 싶었다.


여정은 길 수도, 짧을 수도 있다. 하지만 길고 짧다는 건 절대적인 게 아니다. 단 하루의 여행일지라도 여행자의 심리에 따라서는 한 달처럼 길게 느껴질 수도 있을 테니까. 반대로 한 달간의 여행일지라도 단 며칠만 하는 여행처럼 느껴질 수도 있을 테다. 그만큼 주관적인 게 여행이다.


사고가 터지고 나면 고단한 몸을 뉘며 “아휴, 하루가 정말 길었어.”라고 하기도 하고, 행복한 일들이 많았다면 “벌써 돌아가야 한다니 아쉽네.”라고 하지 않던가. 여행과 상대성이론이 닮은 구석이 꽤 있다고 생각했다.





누구는 맛집 탐방을 우선순위로 두고, 누구는 현지 경험을 우선시하고, 또 다른 이는 휴식을 가장 중요시한다. 모두 여행에서 놓칠 수 없는 재미다.


일상에서 벗어나 새롭게 무언가를 접한다는 건 상상만으로도 즐거운 일이니까. 다만 너무 바쁘게 움직이지는 않기를, 빠르게 지나치지는 않기를, 가끔은 조금 찬찬히 머무를 수 있기를 바랐다. 여행하며 마주치는 수많은 상황에서 때로는 너무나 평범해서 보지 못하고 지나쳤던 순간을, 때로는 가슴 저미게 아팠던 순간을, 또 때로는 소소한 것에 행복을 느꼈던 순간을 담아내고 싶었다.


내가 의미를 부여했던 장면에 집중해보고 싶었다. 다른 사람에게는 아무것도 아닐지언정, 내게는 소중한 사람을 떠올리게 해주었고, 그 사람을 더욱 이해할 수 있게 되기도 했다.




글을 쓰기 위해 지나온 여행을 돌아보며 제법 행복했다. 컴퓨터 하드디스크에 옮겨만 두었던 사진첩의 사진을 여러 번 훑어보며 그날의 날씨, 기분, 나누었던 대화가 머릿속에 다시 꾸며졌다. 영화 장면처럼 스르륵, 재구성되었다가 사라지고 새로운 다음 장면이 나오곤 했다.





베를린에선 이런 일도 있었다. 이스트사이드 갤러리를 가기 위해 탔던 지하철에서였다. 데이비드 베컴이 제일 잘 생겼던 시절의 모습과 똑 닮은 남자와 눈이 마주쳤고 순간 너무 당황하여 고개를 푹 숙여버렸다. ‘아이구 깜짝이야! 진짜 엄청 잘생겼네!’를 속으로 외치면서.


그 후로는 이스트사이드 갤러리에서 찍은 사진만 보아도 그 남자가 자연스레 떠오르곤 했다. 남들 눈에는 당연히 보일 리 없겠지만. 사진 속에서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라는 거다. 그 사진을 찍기까지 있었던 일들을 스스로는 잘 알고 있지 않은가. 추억이 되어버린 일 말이다.


이스트사이드 갤럴리에서 볼 수 있는 역사의 기록.



어느 날은 그림으로 그리는 여행을 떠나보자 해서, 연필과 종이를 가지고 한참을 앉아 스케치했던 날도 있었다. 안동과 영주에서였다. 그림으로 담으려면 오래도록 보아야 하고 자세히 봐야 하므로 기억에 더욱 잘 남는다고, 책에서 그랬다. 정말 그랬다. 몇 년이 지났지만 사각사각 연필이 종이 위를 움직이며 내었던 소리까지 기억하고 있었으니까.



2011년 영주, 2014년 안동. 그림보단 낙서에 가깝지만, 괜찮다.



그 모든 여행이 있었기에 지금의 내가 있다. 정말 많은 사람을 스쳐 지났고, 만났으며, 말을 섞었고, 마음을 나누었다. 다양한 교통수단을 이용하며 잠시 옆에 머물렀다 떠난 사람, 하룻밤을 꼬박 함께했던 사람들이 있었다. 모두가 ‘나’라는 존재를 함께 빚어준 사람들이었다.


혼자 떠났지만 둘이었다가, 셋이었다가, 그러다가 혼자였다가, 다시 넷이었다가. 여행은 마법이었다. 언제나 즐거울 수는 없었지만. 여행은 인생과도 구석구석 참 많이도 닮았다.

여행의 순간을 단어로 엮어보고 싶었던 건, 어쩌면 인생을 알고 싶었던 이유였을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결국은, 일상을 여행처럼, 여행을 일상처럼 보내고 싶은 마음이었다.


안녕, 치앙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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