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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재 Sep 06. 2016

당신의 밤을 황홀하게 만들어 줄 도시

밤에 즐길 수 있는 부다페스트의 즐거움 두 가지

부다페스트의 밤은 아름다운 선율에 젖어 들어가고 있네.


여행을 준비하며 '유럽에서 하고 싶은 것'에 대한 목록을 작성했었다. 그중에는 '현지의 유명한 공연을 보는 것'이 포함되어 있었다. 누군가는 체코에서 스카이다이빙을 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또 누군가는 맥주 투어를 목표로 하는데, 나는 왜 공연 관람을 선택했을까? 이유는 간단하다. 고소공포증이 있어서 스카이다이빙은 커녕 동네 뒷산 정상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것조차 하지 못하고, 술자리는 좋아하나 술을 잘 마시지 못하기 때문이다.


농담 같은 진담은 그만하고, 내가 공연 관람을 목표로 세운 것은 '여행의 색다른 재미를 느낄 수 있는 기회'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보통 늦은 오후나 저녁 시간대에 공연을 해서 그런 것일까? 낮 동안 먹고, 사진 찍고, 돌아다니며 두 발과 두 눈으로 즐겼다면 저녁에는 공연을 보며 감성을 충전시키곤 했다. 무슨 공연이 되었든 그것을 보는 동안은 현지인들의 생각과 마음을 조금이나마 경험할 수 있었다.


예를 들자면, 우리나라 안동 하회탈춤에는 우리 민족의 해학과 풍자가 깃들어 있다. 하회탈춤을 보는 동안 나 자신이 공연의 주체가 되는 순간을 경험하기도 하며, 선조들이 담아내고자 했던 해학의 미에 무릎을 탁! 칠 수도 있다. 이처럼 공연 관람은 그 국가에 내려져오는 전통과 정신을 접할 수 있는 방법 중 하나이다. 대한민국이라는 머나먼 땅에서 온 외국인이 여행지의 문화를 공유할 수 있는 기회는 바로 공연을 관람하는 것이었다.


베를린을 시작으로 프라하, 비엔나, 부다페스트까지 나는 2회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공연과 1회의 인형극, 1회의 오페라를 보았다. 그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바로 부다페스트에서의 공연이었다. 언어의 장벽이 없다는 것이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2~3시간 정도의 공연에서 가지는 언어의 중요성에 대해 절실히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다름 아닌 인형극과 오페라 덕분에 말이다.


두 공연 모두 이탈리아어로 진행되었는데 오페라는 다행히(?) 영어 자막이 함께 제공되었다. 그러나 무대의 배우를 보랴, 영어 자막을 읽으랴 멀티태스킹이 이렇게 어려운 것일 줄이야. 결국 집중도가 떨어지고 나중엔 '본 다는 것에 의의를 둔다'의 지경까지 이르게 되었다. 그러니 영어 자막조차 제공되지 않았던 돈 조반니 인형극은 오죽했으랴.


하지만 나에게 공연 관람이 가지는 의미는 '여기에서만 파는 기념품을 사는 것처럼, 이 곳이 아니면 접할 수 없는 유일한 것'이었다. 내용을 이해하면 매우 좋겠지만, 설사 이해할 수 없는 공연이라도 괜찮다. 그 시간만큼은 현지인이 되어 그들의 눈으로 그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시간이니까.


공연이 시작되기 전, 연주자들이 서로의 호흡을 맞추며 준비 중이다.


그래서 나는 오케스트라 공연을 좋아한다. 언어를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이 필수 조건이 아니기 때문이다. 현악기, 타악기 그리고 관악기들이 어우러져 만들어내는 소리는 마음을 열고 감상할 줄 아는 방법만 터득하면 된다. 물론 음악적인 재능이 있다면 금상첨화겠지만 이 또한 필수조건은 아니다. 나를 보니 그렇다.


각 악기의 고유한 음색을 굳이 구별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지만, 간혹 바이올린이나 첼로 같은 악기의 음색을 구분해 내는 나를 볼 때면 묘한 쾌감을 느끼기도 한다. '어랏! 내가 음악적인 재능이 있었나?' 혹은 '나의 귀는 음악적인 소질을 타고난 귀였구나!'라는 엄청난 착각과 함께.


공연 관람에 부담을 갖지 말았으면 하는 뜻에서 하는 말이다. 문화 체험을 할 수 있는 시간이라고 편하게 접근했으면 하는 바람이랄까? 우리나라의 오페라, 오케스트라 같은 공연의 티켓 값이 비싸게 책정되어 있는 이유를 도무지 알 수가 없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쉽게 접하기가 어렵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적어도 여기에서만큼은 1만 원 내외로 아주 제대로 된 힐링을 할 수 있으니, 좋은 기회를 놓치지 않았으면 한다.



부다페스트 필하모니 관현악단의 공연이 열렸던 국립 오페라 하우스의 외관이다. 1884년에 완공되었다 하니 100년은 훌쩍 넘은 건물로 세월의 흔적을 느낄 수 있다. 물론 건물 나이 100살은 유럽에서 아기에 속한다. 근데 아기 치고 좀 중후해 보인다 너?


국립 오페라 하우스의 내부는 화려하면서도 우아했다. 건물의 아름다움 뿐만 아니라, 음향 설비로 치자면 둘째 가라면 서럽다고 하니 기대치가 꽤 높아졌다.  CD나 MP3 파일로 듣는 음질이 아닌, 악기들이 내는 생생한 음의 빛깔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설레던지!


 내 옆에는 중학생 정도로 보이는 (외국인은 생각보다 성숙한 외모를 갖고 있는 경우가 많으므로 중학생이라고 하겠다) 학생 3명이 앉아있었다. 문화생활을 즐기기 위함이었는지 학교 과제였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들이 부러웠다. 이렇게 훌륭한 공연을 어릴 때부터 자주 접할 기회가 주어진 다는 것이 말이다. 공연 티켓은 로얄석을 고집하지 않는다면 그리고 헝가리의 물가를 고려한다면, 자신의 용돈으로도 충분히 구입할 수 있을 정도였다. 세 명의 청소년을 보며 나는 한 가지 꿈을 꾸었다. 자라나는 키만큼 감성력을 함께 키워줄 수 있는 우리나라의 모습을 보는 꿈을 말이다.


영화 아마데우스에서 독립적인 저 자리에 앉아 관람하는 모습이 왠지 멋있어 보였다. 비싼 자리라 이번엔 포기했지만, 언젠가는 꼭 저 자리에 앉아 공연을 보리라!


다뉴브 강을 물들인 황금빛 물감


부다페스트의 밤은 매혹적이다. 프라하의 밤이 담백한 아름다움이라면, 부다페스트의 밤은 다뉴브 강을 물들인 황금빛으로 화려함을 제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누군가 매일 밤마다 바쁘게 움직이나 보다. 다뉴브 강물에 황금빛 물감을 풀어서, 양쪽 건물을 예쁘게 칠해주고 있으니 말이다. 예술적 재능이 매우 뛰어남에 틀림없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완벽하고 아름다운 풍경을 만들어 낼 수 없을 테니.


나는 까만 하늘과 대비되는 황금빛이 뿜어내는 화려함도 좋아하지만, 더욱 좋아하는 순간이 있다. 완전한 검은빛의 하늘과 해가 지는 순간부터의 틈새이다. 그 틈은 오묘한 파란빛의 하늘을 가지고 있어서, 보고 있는 시간 동안 두뇌는 잠시 멈추고 가슴이 쿵쾅쿵쾅 요란한 소리를 내며 뛰기 바쁘다. 생각보다 길지 않은 이 시간을 오롯이 담아 두려는 목적 하나를 향한 움직임이었다. 파란색, 주황색, 붉은색, 남색 그리고 단어로 정의할 수 없는 자연의 색을 오래도록 기억하기 위한 움직임 말이다.


너를 눈썹달이라 부를까, 손톱달이라 부를까.
겔레르트 언덕에서 바라본 부다페스트의 야경. 왕궁과 세체니 다리가 황금빛 옷으로 갈아입었다.
에르제베트 다리의 야경.
자유의 다리 야경. 초록빛이 황금빛과 잘 어우러졌다.


부다페스트의 야경을 빠짐없이 담으려 한다면, 낮보다 더 많은 체력소모를 각오해야 한다. 야경 감상을 할 수 있는 장소가 매우 다양하기 때문이다. 서울의 야경을 남산에서도 볼 수 있고, 응봉산에서도 볼 수 있고, 북악 스카이웨이에서도 볼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겔레르트 언덕, 어부의 요새, 왕궁, 버차니 광장, 세체니 다리, 자유의 다리, 에르제베트 다리, 유람선 탑승 등등 개인의 취향에 맞게 고르면 된다. 각 장소마다 보여주는 모습이 다르다는 이유로 나는 부다페스트에 머무는 3일 중 이틀을 야경 감상에 할애했다. 아마 며칠을 더 보냈더라면 또 다른 곳으로 야경 탐닉에 나섰을 것이다.


부다페스트의 두 번째 밤, 나는 야경투어에 참여했다. 택시를 타고 뷰 포인트로 이동해 야경 감상을 하는 것이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다. 여행지의 야경은 언제나 나를 유혹하지만, 겁 많은 내가 야경 관람을 선택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특히 혼자 하는 여행에서는 더욱 그러했다. 보는 동안은 황홀함에 푸욱 빠져들지만, 숙소로 혼자 돌아가는 골목길에선 왕왕 후회하곤 했다. 항상 선택의 갈림길에서 있었지만, 나는 거의 야경 감상을 선택해왔었다. 이상하네, 야경에 뭐 중독성이라도 있는 건가?  


이런 고민을 할 필요를 없게 만들어준 야경투어는 꽤 유용한 프로그램이었다. 가이드가 따라다니면서 설명을 해주는 형식은 아니고, 여행객 몇 명이 모여 택시를 타고 이동을 하며 보는 것이었다. 야경투어를 함께 했던 두 분의 어르신들은 겔레르트 언덕과 어부의 요새에서 멈추지 않고, 왕궁의 야경을 보러 걸어가시겠다고 하셨다. 나는 그렇게 할 힘이 도저히 남아있지 않아서 포기했지만. 아쉬움이 조금 남았지만 그래도 괜찮다. 충분히 감성 충만한 밤을 보내고 있었으니까.



이 곳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하고픈 곳이었다


부다페스트의 마지막 밤. 낮에는 혼자서 여행을 하고, 저녁에 일행과 유람선을 탑승하기로 했다. 유람선 선착장에 조금 일찍 도착해 표를 구입하고 의자에 앉아, 내일이면 떠날 부다페스트를 향한 아쉬움을 달래고 있었다. 마지막 유람선 출발 시간은 저녁 8시. 야경 감상에 제격인 시간이었다. 파란 하늘에 노을이 지고 있었다. 이에 질세라 다뉴브 강물에도 노을이 지고 있었다. 바람과 함께 만들어내는 흔들리는 노을빛은 오히려 하늘의 그것보다 아름다웠다. 그리고 사랑을 속삭이던 한 쌍의 커플은 참으로 로맨틱했다.



남녀 관계의 신조어 중에 '썸을 탄다'는 말이 있다. 공식적인 정의를 내리기는 어렵지만, 나는 '서로 호감을 갖고 있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으면서, 사귀기 직전의 단계'라고 정의 내렸다. 한 가지 덧붙여 설렘의 정도를 표현할 수 있는 '설렘 지수'라는 것이 있다고 가정해보았다. 그리고 내린 결론은 '사귀기 전의 썸 타는 관계일 때가 남녀 사이에서 최고의 설렘 지수를 기록한다'였다.  


프라하 까를교의 야경을 보며 동생에게 말했다.

"썸 타고 있는 사람끼리 이 다리를 건너면, 아마 그 둘은 연인이 되겠지?"

그리고 유람선에 앉아 야경을 보며 동생에게 다시 말했다.

"썸 타고 있는 사람끼리 이 유람선에서 부다페스트의 야경을 보게 된다면, 아마 그 둘은 연인이 되겠지?"


떄로는  몽환적인 느낌의 초점이 맞지 않는 사진이 좋다
왕궁에도 황금빛이 드리워졌다


세체니 다리의 야경은 보는 내내 눈을  수가 없었다. 강물에 비친 불빛의 찬란함에 그러했고, 이 다리에서 시작된 영화 글루미 선데이의 O.S.T. 의 선율이 슬프도록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핸드폰에 음악 파일을 저장해 간 것은 나 자신에게 칭찬을 아끼고 싶지 않을 만큼 잘한 일이었다. 귓가에 울려 퍼지는 피아노 소리와 차가운 강바람이 슬픈 밤이었다.


세체니 다리를 더욱 화려하게 만들어주는 불빛들.
국회의사당이 더욱 화려해졌다.


한 시간 남짓의 야경 감상을 끝으로 나는 부다페스트에게 이별을 고했다. '안녕, 또 올게.' 라는 말을 나지막이 반복하며. 잊을 수 있을까, 마법에 걸렸던 것 같은 3일 동안의 밤을.

황홀했던 부다페스트의 밤이 조용히 저물어 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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