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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재 Sep 10. 2016

등산과 담을 쌓은 그대, 자코파네로 초대합니다

산을 무서워하던 아이가 산을 즐길 수 있게 해 준 곳

나는 등산을 즐기지 않는 수준을 넘어, 산을 무서워하는 아이였다


초등학교 때부터 할아버지, 할머니 손에 이끌려 경기도에 있는 천마산을 참 많이도 다녔다. 산을 다닌 횟수로 치면, 산과 '베스트 프렌드'까지는 아니더라도 '최소 6개월에 한 번은 만나는 친구' 정도의 친분을 쌓았어야 했다. 하지만 산은 친구는커녕, '인사만 몇 번 나눈 서먹서먹한 친구의 친구'도 아니었다. 고소공포증은 정상에서 느낄 수 있는 쾌감을 빼앗아갔고, 산을 내려갈 때는 다리에 힘이 풀리는 바람에 앞으로 꼬꾸라질 것만 같은 두려움이 엄습했다.


나이를 한 살 한 살 먹어가며 키는 172cm까지 컸지만, 두려움을 극복해내는 내공은 키우지 못했다. 오히려 나이를 먹을수록 겁이 많아진다더니, 딱 그 짝이었다. 어릴 때는 할아버지가 손을 잡아주셔서 그나마 두 발로 내려갔었다. 지금은 산을 내려갈 땐 항상 미끄럼틀을 타듯이 쭈그려 앉아, 신발을 흙바닥에 질질 끌면서 네 발 달린 짐승처럼 두 손을 짚어야 간신히 내려올 수 있을 정도이다. 그렇게 내려오고 나서 남는 건 손바닥의 돌멩이 자국과 더러워진 신발과 바지였다. 그리고 아! 무사히 내려왔구나, 하는 안도감과 동시에 극도의 피로감이 무섭게 몰려왔다.  



나는 항상 이렇게 내려온다. 두 손 두 발로 흙썰매를 타듯이.


나는 '자코파네 당일치기 여행'이라고 왜 썼던 것일까


유럽 중에 전혀 흥미가 생기지 않았던 국가가 있었으니, 바로 '스위스'였다. 스위스의 대표 여행지를 꼽으라면 융프라우요흐가 아닐까? 체르마트도 요즘 인기 있는 여행지이니까 'TOP 5'에 넣어주고. 그런데 이 곳들 모두 '산'이다. 거기다가 한여름에도 쌀쌀하단다. '산'과 '추위' 이 두 가지는 내가 담을 쌓고 있는 것들이었다. 그래서 나는 '스위스를 가고 싶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었다. 정말로.


그랬던 내가 왜 폴란드라는 국가에서 '자코파네'라는 마을에 이끌렸는지 모르겠다. 심지어 가이드 북에서조차 제대로 다루지 않을 만큼 정보가 많지 않은 마을이었다. '동유럽의 알프스라고 불리는 곳'이라는 타이틀 아래, 간단한 소개와 사진 몇 장으로 페이지를 채운 게 다였다.


모험 정신이 특출 나게 뛰어나다고 생각해본 적이 있었던가? 아니 그건 아닌 것 같다. 정보도 많이 없는, 잘 알려지지 않은 곳을 가겠다니 대체 무슨 생각인 거야?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을 하지 못한 채 나는 크라쿠프 일정에 '자코파네 당일치기 여행'을 넣어버렸다.




여행의 묘미는 자연이라는 변수이다

자코파네도 구경할 겸, 이 곳에서 케이블카로 비교적 쉽게 갈 수 있는 카스프로비 비에르흐 (Kasprowy Wierch)를 가기로 했다. 설경이 매우 환상적인 곳이라고 했다. '설경이 얼마나 멋있길래?'라고 가만 생각해보니 하얗게 눈 덮인 산을 제대로 본 적이 없었다. 겨울 여행은 즐기지 않으니 그럴 만도 했다. '눈 덮인 산을 보는 첫 번째 경험'을 폴란드에서 하는 것은 참 특별할 거라 생각했다. '처음'이라는 것은 쉽게 잊히지 않는 법이니까.


하지만 기대와는 달리, 자연 앞에 인간은 나약한 존재라는 걸 처절히 깨닫게 해 준 경험이 되었다. 케이블카를 타고 이동해야 하는데 강풍이 불어 운행을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오는 내내 파란 하늘이 보여 당연히 오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전혀 예상치 못한 전개였다.



아…. 이 여행 쉽지 않다, 쉽지 않아


잠시 생각 좀 하고 있으려니 매표소 직원이 지도를 펴 보이며 다른 방법을 알려줬다. 어차피 카스프로비 비에르흐는 갈 수 없으니, 자코파네 마을로 되돌아가서 구바우프카 (Gubałówka)를 가라는 것이었다. 푸니쿨라를 타면 쉽게 갈 수 있다는 친절한 맺음말까지 함께.


'아쉽네. 하필이면 오늘 강풍이 불 건 또 뭐람.'

어쩔 수 없이 발길을 돌려야만 했다. 하지만 아쉽다, 아쉽다 계속 생각하면 뒤의 일정이 제대로 진행될 수가 없다는 걸 어느 순간 깨달은 후부터 이런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보고 싶은 것을 다 보고 가면, 다음에 이곳을 또 올 이유가 없어지잖아. 나중에 다시 오게 되면 오늘 보고 느꼈던 것과는 새로운 것들을 보게 될 텐데. 그 재미도 맛봐야 하지 않겠어? 이번에 못 본건 그때 다시 보면 되는 거고'


사실 언제 또 폴란드를 오게 될지 모른다. 폴란드 대신 다른 유럽 국가를 여행할 수도 있다. 폴란드를 오더라도 자코파네에 오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생각하고 나면, 아쉬움이 또 다른 기대와 희망으로 바뀌게 된다.            

                                                                                                                        

강풍으로 오르지 못한 카스프로비 비에르흐. 이름은 왜 이렇게 어려운거야?!



자연이 품고 있는 마을, 자코파네


버스를 타고 자코파네로 다시 돌아왔다. 간단히 마을을 둘러보고, 구바우프카를 오르기로 했다. 물론 푸니쿨라를 이용해서 말이다. 워낙 자연경관이 훌륭하다 보니 하이킹을 하기 위해 오는 사람도 꽤 보였지만, 내가 그랬다간 중간에 발이 묶여 이도 저도 아닌 상황에 처할 수 있었다. 어찌 돼었건 숙소는 돌아와야 할 것 아닌가?


눈 덮인 산이 바로 보였다. 자연은 마을을 품고 있었고, 마을은 자연과 어우러져 있었다. 마을 중심가를 걷다 보면, 쇼핑가인가?라는 느낌이 들 정도로 온갖 상업 시설들이 들어와 있지만, 자연과 전통을 배제하지 않았다. 세부적인 것은 조금씩 다를지언정 전체적으로 풍기는 건물의 느낌은 비슷했다. 어느 하나 거슬릴만치 눈에 띄는 것이 없었고, 모두 자연과 어우러져 하나의 풍경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폴란드 전통의상을 파는 상점이다. 선명한 빨간색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뾰족한 지붕들이 산을 형상화 한 것 같아, 이 곳과 더욱 잘 어울렸다.



아이야, 너의 웃음이 나를 미소 짓게 만드는구나


사람들이 다니는 곳에 공터가 있다면, 빠지지 않는 것이 '비눗방울을 만드는 아저씨'였다. 자코파네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비눗방울이 있는 곳엔 언제나 아이들이 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아이들은 비눗방울을 좋아하는가 보다. 투명한 듯하면서도 무지갯빛을 담고 있고 또 비치는 모든 것들을 담고 있으니 시선을 끌기 딱 좋은 놀잇감이었다. 투명 구슬도 이렇게 예쁜 투명 구슬이 있을까 싶다. 톡 터질 것 같아 애지중지 만들어 내면서도, 톡 터트리는 재미에 비눗방울을 향해 손을 뻗는다.


하늘로 날아가는 비눗방울을 보면 다들 뛰어가서 잡아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것인지, 그 조그만 발로 폴짝폴짝 열심히 뛰어다녔다. 소리를 지르며 깔깔깔 웃어대며 두 손과 두 발은 바쁘게 움직였다. 아이들의 웃음소리를 듣고 있으니 나도 비눗방울 놀이에 초대된 것 같았다. 아이들은 참으로 신나게 뛰어다녔다.


별 거 아닌 일에도 저렇게 즐거워하던 때가 나도 있었다. 나에게 남아있는 동심이 있을까?라고 질문할 수 있는 나이가 되어버렸음을 깨달았을 때 나는 슬펐다. '둘리보다 고길동 아저씨가 불쌍한 캐릭터야'라는 말에 자연스럽게 고개가 끄덕여졌을 때 나는 더욱 슬펐다.


하지만 이 놀이에 초대되어 함께 즐기는 순간만큼은, 나도 어린아이가 되었다. 고길동 아저씨의 구박을 받으면서도 꿋꿋하게 살아가는 둘리가 더 불쌍하다고 여기고 있던 때로 되돌아 갈 수 있었다. 아이들과 함께 비눗방울을 쫓아다니며 잃어버린 동심을 찾아 붙들어 두었다. '어디 가지 말고 내 옆에 있어, 지금 이 순간만큼은.'




따스한 햇살, 시원한 바람, 눈을 즐겁게 하는 풍경. 행복할 수밖에 없구나

푸니쿨라를 타고 채 5분도 안된 듯한데 벌써 도착했다. "우와!"라는 감탄사가 저절로 툭 튀어나왔다. 이런 풍경을 본 적이 있던가? 없었다. 어쩌면 볼 수가 없었던 것 일 수도 있다. 나를 쓸데없이 옭아매고 있는 고소공포증이란 녀석 때문에. 하지만 그 녀석 때문에 구바우프카에서의 즐거움을 놓칠 수는 없었다. 어떻게 온 곳인데…. '무서움'보다는 '자연의 아름다움에서 오는 감동'이 더욱 컸던 것은 참 다행이었다. 이 곳에서 나는, 사람들이 왜 그렇게 스위스를 가는지 조금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구바우프카에서 내려다본 자코파네 마을. 그리고 처음에 가려고 했던 카스프로비 비에르흐.


자연으로부터 받는 감동은 인공적인 것의 감동보다 깊고 부드럽게 다가왔다. 먹물 한 방울을 화선지에 떨어트리면 화선지는 금세 검은 먹물을 쭈욱 빨아들인다. 깊숙이 그리고 부드럽게. 빠르지만 힘 있게 먹물을 머금고 화선지는 검은빛으로 재탄생한다.

자연의 아름다움이 나의 몸과 마음속으로 스며드는 듯했다. 나른하면서도 따스한 햇살에 나는 눈을 감았다. 햇빛이 얼굴 위로 쏟아져내리고 있었다.



 

시원한 사이다를 한 모금 삼켰을 때의 청량감에 대하여

본격적으로 이 에 집중하려면 어디든 자리를 잡는 것이 좋을 듯 싶었다. 잔디밭도 있었지만 경사진 곳이라 편하지 않을 것 같아 두리번거리던 중 마침 의자에 자리가 빈자리가 보였다. 이런 행운이! 의자를 향해 가방을 던지기엔 아직은 부끄러움을 많이 느끼니까, 경보를 하는 듯한 걸음으로 돌진했다. 몸을 거의 반 눕다시피 하니, 그렇게 편할 수가 없었다. '천국'을 나타내는 이 세상에 존재할 모든 단어를 갖다 붙이고 싶을 정도였다.


눈 앞에 펼쳐진 풍경은 누워서 보니 또 달랐다.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속이 뻥 뚫리는 것 같은 시원함이 몰려왔다. 뜨거운 여름날 한껏 목이 마른 상태에서 냉장고에 들어있던 시원한 사이다를 발견했다. 뚜껑을 돌려 따자 '푸-식'하고 탄산이 올라오는 소리가 났다. 마음 같아선 벌컥벌컥 마시고 싶지만 식도가 따가운 느낌은 싫으니까, 딱 한 모금 삼키기로 했다. 꿀꺽, 아! 입안 가득 퍼지는 청량감! 그것을 여기서 느꼈다면 조금이나마 전달이 될 수 있을까?

언니들, 나도 같이 놀아요!
경사진 잔디밭에서도 편하게 누워있는 유럽사람들.
사이다는 없고, 대신 아이스크림이라도 한 입 해야겠다


의자에 누워 생각했다. '자코파네를 당일치기로 하기에는 너무 아깝다. 다음에는 1박이라도 해야지. 아니다, 모르스키에 오코까지 가려면 1박으로는 모자랄 수도 있다. 안전하게 2박은 해야겠다.' 또 생각했다. '나도 스위스에 가보고 싶다.' 자코파네에서 제대로 보지 못한 설경을 보고 싶었다. 궁금했다. 어떤 느낌일지. 세상이 하얗게 변해버린 곳을 딛고 서있는 기분이 어떨지.


자연 속에서 몇 번의 숨을 쉬고 내뱉었을까. 가는 시간이 야속하기만 했다. 숨을 천천히 쉬어서 시간이 느리게 간다면 기꺼이 30초에 한 번씩 숨을 쉬겠노라 생각했다. 떠나야 한다니, 이렇게 아름다운 곳을 떠나야 한다니. 발걸음이 쉬이 떨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여행이 소중한 이유는 돌아가야만 하는 일상이 있기 때문이라 했다. 물론 나의 폴란드 여행은 며칠 더 남아있었기에 바로 일상 복귀는 아니었지만, 이 멋진 곳을 뒤로하고 떠나야 한다는 사실이 서글펐다.


푸니쿨라에 몸을 실었다. 다행이었다. 네 발 달린 짐승처럼 내려가지 않아도 되니까. 나에게 있어 푸니쿨라는 이 곳의 매력을 한층 더 높여준 좋은 시설이었다. 산을 오르고 내리는 수고를 덜어주면서, 충분히 자연을 느낄 수 있게 해주니까. 그렇게 짧은 5분을 타고 다시 마을로 돌아왔을 때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언젠가 꼭 다시 올게, 구바우프카와 약속을 하기 위해서. 약속을 남겨두고 나는 자코파네를 떠났다.
  



자코파네에서

나는 폴란드의 아름다움을 알게 되었다.


자코파네에서

나는 폴란드를 사랑하게 되었다.  


"자연이 살아 숨쉬는 자코파네로 오세요~"




크라쿠프 여행기, 다음 편에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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