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성이 곧 일이 되는 건 아닙니다

일은 그냥 잘하면 되는거에요.

by 하루

‘이 일이 나에게 맞는가?’
이 질문은 언제나 조용히, 그러나 지속적으로 내 안에서 증식해왔다.


어떤 날은 실수라는 이름으로, 어떤 날은 비교라는 감정으로, 또 어떤 날은 이유 없이 느껴지는 무력감이라는 정체불명의 그림자로 내 안에 침투한다. 그럼 나는 반복해서 자문한다.
이 일이 나라는 존재의 형태와 부합하는가?


하지만 곧 나는 다시 생각을 정리한다.

적성이라는 단어는 실은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사후적으로 붙이는 일종의 ‘합리화된 프레임’일지도 모른다고. 마치 이것이 현실을 직면하지 못하는 우리들의 자기 위안이자 선택의 곤란함을 유예하기 위한 정서적 장치일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아이러니 하게도 ADD인 내가 정확성과 반복을 요구하는 RA QA 업무를 하고 있다.

일을 하는 동안 의식은 끊임없이 방랑하고 집중은 손에 잡히지 않는 안개처럼 흩어지는데, 업무는 디테일을 요구한다.
규칙을 전제로 하고 정확성 위에서만 존재를 허락받는 일이다.


그럼에도 나는 이 자리에 머문다.
어떤 날은 버티는 쪽에 가깝고, 어떤 날은 받아들이는 쪽에 가까우며, 대부분의 날은 단지 무표정한 얼굴로 시간을 통과한다.


그렇다면 나를 붙잡은 건 무엇이었을까?
처음에는 아주 사소한 성취감이었고, 최근 몇 년은 나의 매니저가 건넨 한마디였던 것 같다.

'넌 잘하고 있어'

그 말은 비단 일의 결과에 대한 칭찬만이 아니었다.
내가 받아들였던 이 말의 의미는 적어도 이 조직에서의 나라는 존재와 나의 방식에 대한 신뢰의 선언이었고, 그 인식은 나를 단순히 ‘버티는 사람’에서 ‘계속해나갈 수 있는 사람’으로 전환시켰다.

그 말은 위태로운 순간의 내게 위로가 아닌 확신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확신은 때때로 능력보다 강한 추동력을 만든다.


일과 존재가 기막히게 일치하는 소수의 사람들이 있다. 이들을 보며 마치 그것이 ‘정상’인 양 오해한다. 그러나 정작 대부분의 우리는 일이라는 구조에 자신을 억지로 끼워 맞추며 살아감을 느낀다.
내 인식속의 '천직'이라는 단어는 신화에 가깝다. 그렇다면, 잘하는 사람은 꼭 일이 적성일까?

아마 대부분은 생존하기 위해 획득한 습관, 반복의 기술, 그리고 자기 규율의 체화를 통해 그것을 가능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무릇 인간의 체화된 '성실'은 인간의 본질이라기보다, 생존을 위한 진화일지도 모른다.


때때로 모든 것을 포기하고 완전히 다른 길을 선택하는 이들도 있다.
그들은 용기를 가졌거나 혹은 절박했거나, 혹은 둘 다였을 것이며, 나는 그런 선택 역시 존중한다.


그러나 동시에 매일을 견디고, 아무 말 없이 주어진 일을 반복하는 이들도 있다.
나는 그들을 향한 경외 또한 놓치고 싶지 않다. 그들은 적성이라는 말을 빌리지 않아도 이미 ‘존재하는 것’ 자체로 그 의미를 증명하고 있으므로.


우리는 되묻는다.
‘이 일이 나의 적성인가?’


그러나 더 근원적인 질문은, ‘나는 지금 내 일을 잘 감당하고 있는가?’일지도 모른다.

적성은 선택의 언어지만 일은 생존의 언어이다.
그 둘 사이에서 우리는 여전히 부정확하게 존재하지만, 불완전하다는 사실이 곧 무의미함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어쩌면 우리는 모두 적성이 아니라 의지와 감내력으로 살아가고 있는 존재들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의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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