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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먼가 프리만 Feb 20. 2020

35살 즈음에, 나를 위한 육아를 시작하다

育兒와 育我

2020년 1월, 육아휴직을 시작했다. 육아휴직이지만, 단지 아이를 기르기 위해서만은 아니다.


35살의 의미


대학원 4학기째를 다니던 시절, 돈이 필요해서 한 회사에서 인턴을 한 적이 있다. 내가 있던 부서의 부장은 괴팍한 사람이었다. 그렇게도 부하직원들을 갈구고 또 갈궜다. 부서의 분위기는 망하기 직전의 포차와 같았다. 그 특유의 을씨년스러움.


어느 날은 36살의 남자 직원 A가 그렇게도 그 부장에게 깨졌더랬다. 그는 박살이 난 다음, 별로 친하지도 않은 나를 데리고 카페로 향했다.


그가 왜 나를 데리고 카페에 갔는지는 명확하게 알 수 없다.


마음을 터놓을 직원이 회사에 없었거나,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에게 푸념을 하고 싶었거나. 강아지를 앞에 두고 푸념을 하는, 그런 상황이 필요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물정 모르는 인턴이나, 강아지나, 회사일을 모르는 건 매한가지다.


나는 A가 사준 커피만 말없이 홀짝였다. 부장에게 박살이 난 정규직님에게 위로를 건넬 배짱있는 인턴은 아니었다. 그의 말만 계속 들었다. A는 주저리주저리 얘기를 하기 시작했다.

예나 지금이나 커피는 사랑함

“나는 회사를 그만둘 거야. 마침 다른 회사에서 오퍼가 왔어. 무엇보다 이직 과정에서 조금 쉴 수 있는 시간을 벌게 됐지. 좀 쉬고 새 회사로 출근하려고.”


이후 이어진 워딩은 20대 후반을 향해가던 나에게도 큰 인상을 남겼다. 별 친분도 없었던(현재도 그가 어디서 뭘 하는지 모른다) A의 푸념을 여전히 기억하고 있는 이유다.


“나도 이제 35살이 넘었어. 인생 70살이라 치면 이제 반을 넘게 살았지. 35살이라는 게 그런 의미가 있는 것 같아. 내 인생도 한 번 돌아보고, 정리를 한 후, 남은 절반을 잘 살아야지.”


그렇다. 35살이라는 나이는, 인생을 절반 정도 산 시점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백세시대라고 하지만, 사회적 동물로의 수명은 70세 정도가 맞긴 하다. 넉넉잡아 80세를 잡아도, 35~40세 정도가 약 절반을 산 시점이 되는 것이다.


어느덧 인생의 절반을 살았다


그 날 이후 나의 35세를 항상 생각해왔다. 직장은 잘 다니고 있을까, 결혼은 했을까, 자식은 있을까,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고는 있을까.


그리고 만 36세가 되기에 이르렀다. 만으로 따져도 이제 35라는 숫자를 내 나이에 붙이지 못한다. 35세의 의미를 설파했던 A 보다, 이제 내가 나이를 더 먹었다.


다행이고 다행인 점은, 나쁘지 않게 살아왔다는 점이다. 직장인 10년 차, 결혼 생활을 훌륭하게 하고 있고, 딸도 콩나물 크듯 무럭무럭 자라나고 있다. 나름 하고 싶은 일을 마음껏 해보기도 했다.


하지만 지쳤다. 나쁘지 않은 현재는, '청춘'이라고 부르는 내 젊은 날을 연료삼아 만들어진 결과였다. 30대 후반을 앞둔 시점에서 번아웃에 가까운 상황에 직면했다.


극심한 스트레스. 일주일에 두 번은 한의원으로 달려갔다. 침을 맞지 않으면 팔, 다리, 허리, 목 통증에 시달렸다. 불면증에 시달렸고, 폭음을 했으며, 술 없이는 잠을 청하기도 힘들었다. 일과 시간에는 커피를 5잔씩 마셨다.


그렇게 번아웃이 진행되던 2019년 초여름, A와의 대화를 다시 떠올렸다. 인생의 절반을 지나고 있는 이 시점. 한 번 쉼표를 찍고 싶어 졌다. 남은 절반의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 고민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育兒와 育我를 위한 휴직


나의 선택은 육아휴직이었다. 사표를 내는 것 보다도, 이직 보다도 더 생산적인 일이라고 봤다. 아비가 아비인 줄도 모르는 딸에게 “아임 유어 파더”임을 확실하게 각인시키면서, 인생 2막에 대비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한 가지 미안한 게 있다면 딸이 22개월에 불과하다는 점이다. 육아휴직의 추억을 모두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절충안을 찾았다. 6개월만 이번 타이밍에 ‘나를 위해’ 쓰고, 남은 6개월은 딸이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에 쓰는 것이다. 딸이 6개월을 모두 기억하진 못하겠지만, 6개월 동안 형성된 '관계'는 이어질 것이라는 기대도 있다.


6개월 간의 육아휴직은 아이를 기르는 육아(育兒)의 시간이기도 하지만, 나를 위한 육아(育我)의 시간이기도 할 것이다.


아이에게 아침밥을 해주고, 책을 읽어주고, 점심밥을 해주고, 놀이터를 함께 가고, 산책을 같이 다니고, 저녁밥을 해주고, 목욕을 시켜주는 시간 외에는 모두 “남은 인생을 어떻게 살 것인가”의 구상에 맞출 생각이다.


가족이라는 이름의 사랑 안에서 이런 생각을 하고, 계획을 세우면서, 고장 난 몸도 추스르려고 한다. 나쁘지 않은 현재를 연장하면서, '꼰대'가 아닌 '어른'으로 성장할 수 있는 건강함을 갖추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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