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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먼가 프리만 Jul 25. 2021

베로나의 한 숙녀에 대하여

[그 도시에 대하여]①

이탈리아 베로나, 2016년 6월.


아이를 낳기 전까지 나와 아내는 한 가지 삶의 원칙을 정했던 바 있다. 한 달에 한 번은 국내 어디든 여행을 가기. 1년에 1번은 해외여행을 가기. 해외여행은 서로 가고 싶은 곳을 번갈아 가면서 지정해 가기. 그런 원칙 아래서 2016년 나의 차례가 왔고, 나의 픽은 이탈리아였다.


자주 설명할 기회가 있을진 모르겠지만 나는 이탈리아 덕후에 가깝다. 1994년 지중해 바닷빛 유니폼을 입은 로베르토 바조를 봤을 때부터, 유럽 역사 만화들을 들추며 율리우스 카이사르 등 영웅들의 무용담을 접할 때부터 그런 생각을 한 거 같다. 10대 시절 선망의 대상 같은 땅이었던 셈이다.


2016년 이탈리아행에 있어서 반드시 거쳐가야겠노라고 생각한 곳은 베로나였다. 베로나는 시에나, 아그리젠토 등과 함께 꼭 가고팠던 이탈리아의 중소도시였다. 각종 미디어로 접한 베로나의 모습은 이탈리아의 명품 지갑 같은 이미지였다. 도시의 전체적 모습이 그저 클래식하지 않고 견고해 보였고, 그래서 꼭 가고팠던 것 같다.


베로나에 도착한 것은 이탈리아 여행 막바지였다. 그래서 지쳐있었다. 일정이 베네치아→밀라노→친퀘테레→베로나→베네치아였으니 컨디션이 썩 좋을 리는 없었던 것 같다. 베로나 역에 내렸을 때 아내와 나는 피로함에 절어있었고, 어서 빨리 예약했던 에어비엔비 숙소에 도착하길 바랐던 것으로 기억한다.


집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지만, 문제는 에어비앤비 숙소의 벨을 눌러도 아무런 응답이 없었던 것에 있다. 여행이나 출장을 갔을 때 뜻밖의 상황이 나오는 것을 썩 즐기지 않는 편이다. 예정과 계획이 있다면 그대로 착착 진행되는 것에 묘한 쾌감을 느끼는 성격인데, 숙소에 집주인이 없는 상황은 결코 유쾌하지 않았다. 아니, 여행 막바지의 피로감까지 겹쳐 짜증이 살짝 올라왔다. 슈퍼호스트라면서 손님이 도착할 때 집에도 없어? 그런 생각을 갖고 일단 호스트에게 전화를 걸었다.


나: "너네 집에 도착했는데, 아무도 없어."

호스트: "내가 볼일이 있어 잠시 밖에 나왔는데, 우리 엄마가 열쇠 가지고 갈 거야 조금만 기다려. 쏘리 ㅎㅎ"


그런 통화가 있은 후 약 15분을 숙소가 있던 골목에 서있었던 것 같다. 다행히 골목은 아름다웠다. 오래된 건물의 발코니마다 붉은 꽃들이 심어져 있던 게 기억난다. 인간들은 껄렁해도 도시는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인간들이 별로면 그 여행은 망치는 경우가 많던데.


정신이 멍해질 쯤 골목에 하얀색 피아트 소형차가 도착했다. 그 이후에는 이탈리아 여행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순간 중 하나로 아내와 아직도 얘기하는 상황이 펼쳐졌다. 영화 'Christiane F.'에서 데이비드 보위가 붉은 재킷을 입고 슬로우 모션으로 콘서트 스테이지로 등장하는 장면이 내 머릿속에 오버랩됐었다.

대략 이런 모습. 'Christiane F.' 데이비드 보위 등장신.

단정하게 칼 각을 잡은 백발 단발에, 멋스러운 레이스가 달린 푸른색 계통의 재킷과 무릎 근처까지 내려오는 딱 맞는 스커트를 입고, 검은 구두를 신은, 우아하고 우아하면서 우아한 할머니, 아니 숙녀가 동양인 커플에게 걸어왔다. 그리고 봄바람 같은 미소와 함께 나온 멋들어진 중저음의 목소리. "헬로우."


힐러리 클린턴이나 미셸 오바마 옆에 서계셔야 할 법한 숙녀가 여긴 어떤 일이세요? 에어비앤비 호스트의 엄마가 자기란다. 길에서 지나가다 마주쳤으면 말도 못걸 것 같은 분이 침실과 화장실의 위치, 조식 시간과 메뉴를 설명해주고 있었다. 시종일관 친절하기까지.


여행을 다녀온 지 5년이 지난 현시점에 나와 아내에게 있어 '베로나'라는 도시의 이미지는 '멋쟁이 에어비앤비 호스트의 어머니가 사는 도시'로 정리가 된다. 적어도 나에게 있어서는 그 숙녀가 로베르토 바조나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동급의 인물이 됐다.


그 숙녀처럼 베로나라는 도시는 하나의 명품 같이 아름다웠다고 기억하고 있다. 오래된 건물만 있는 도시가 아니라 오래된 건물들 사이사이에 멋진 사람들이 생기를 불어넣고 있는 살아있는 도시로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베로나에서는 옷을 잘 입은 멋쟁이들을 너무나도 많이 본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멋쟁이들이 골목마다 튀어나오는 명품같은 도시.


외모 지상주의로 빠지는 건 경계할 일이지만, 외모가 천 마디 말 보다도 강력한 메시지가 될 수 있다는 점은 항상 생각해야 할 듯하다. 자신의 모습을 가꾸고 관리하는 것은 곧 상대방에게 강력한 신뢰를 주는 길이기도 하다. 내가 건강한 정신을 갖고 생기있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기도 하다.


문제는 이런 삶의 진리를 생각만 하고 실천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지난해 육아휴직을 할 때 아내가 사줬던 나이키 런닝화는 코로나19를 핑계로 격납고에서 나오지를 못하고 있다. 운동을 거부하는 내 몸뚱아리는 지속되는 팬데믹에 정신승리만 거듭할 뿐이다.

그 자체로 명품 같은 베로나의 야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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