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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여름의수박 Dec 15. 2018

제주에서 직장생활 할 수 있을까

제주 이주민의 직장 구하기

학창시절부터 지금껏 대체로 나는 무난한 아이였다. 뭘 좋아하는지는 때때로 헷갈려하면서도 어디까지가 마지노선이고 경계선인지 본능적으로 알아차렸다. 견고한 저 울타리가 보호막인 것처럼, 나는 울타리 밖으로 발 한 짝 내밀지 않았다. 낯섦에 대한 동경이나 호기심보단 경계심이 더 컸던, 어리고 서툴렀던 시기였다. 


그렇게 일상의 작은 파동 하나 없이 잔잔하던 내 삶에 어떻게, 어디로 튈지 모를 자유분방함이 찾아왔는지 지금 생각해도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어떤 특별한 계기가 있던 것도 아니었다. 좋아하는 것들이 조금씩 익숙해졌고, 익숙해지니 더 알고 싶어 자주 들쳐봤을 뿐인데, 어느 순간 그곳에 있었다.



생각은 참으로 놀라운 힘을 가졌다. 

카오산로드에서 만난 세계 각국의 배낭여행객들의 이야기가 쓰인 책을 가까이 두고 읽었을 뿐이다. 저곳의 매력이 대체 무엇이기에 사람들은 모두 저곳에 모여드는 것일까. 불과 200미터의 짧은 거리에 세계 각지의 사람들이 있다니... 그렇게 카오산로드를 생각했고, 그곳이 어딘지 찾아봤고, 그곳에 있는 사람들을 상상하고, 거닐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렇게 한 일 년 가까이 마음속에 카오산로드를 품었더니, 어느 날인가 '그래. 지금쯤이면 그곳에 가도 되겠다.' 싶어 졌고 나는 그렇게 직장을 그만두고 카오산로드로 떠났다.


혼자서 뭔가를 해냈다는 성취감은 이십 대의 나에게 큰 경험이었다. 배낭여행은 기폭제가 되어, 내가 내 삶을 선택할 수 있는 용기를 줬다. "이십 대엔 꼭 OO 해야 한다."는 누군가의 기준이나 잣대가 전부가 아님을 알게 됐다. 큰 길로만 성큼성큼 앞만 보고 걷던 내가 작은 골목이나 샛길의 매력을 알게 된 것이다. 불쑥 고개를 내미는 위태로움이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럴 때마다 돌아서도 가고, 잠시 쉬어가며 유연함을 익혔다. 5,6년 동안의 그 경험치들이 모여 서른의 나는 조금 더 단단해졌다. 


"회사를 그만둬야겠다. 이렇게 태어난 곳에서 평생 살아가게 되면 어쩌지? 서른 평생 내가 이 도시를 떠난 시간들을 아무리 헤아려봐도, 고작 1,2년이 전부겠다 싶었다. 앞으로 십 년씩만 다른 도시에 산다고 해도, 그렇다고 해서 죽을 때까지 살아보지 못한 곳이 더 많은 거잖아? 꼭, 여기 이곳에서 살 이유가 있나? "


그런 생각들이 불쑥불쑥 튀어나왔다. 나는 가슴이 설렜다. 첫 배낭여행 이후 나는 때때로 가슴이 답답하거나, 일상의 휴식이 필요하면 홀로 짐을 싸서 떠나기를 반복해왔다. 혼자서 무언갈 한다는 것에 조금씩 더 익숙해지고 있었고, 마침내 나는 이 도시를 떠날 결심을 하게 된 것이다. 


"회사를 그만둬야겠어요. 제주로 갈게요."

나이가 서른이나 됐는데도, 엄마 눈엔 아직 품 안의 자식인 건지 엄마는 기함을 했다. 친구들은 놀란 입을 다물지 못했고, 그 사이에 나는 살던 집을 정리했다. 익숙했던 것들과 작별이다. 안녕. 사람이 변화하고 싶을 때는 주변 사람을 바꾸든가, 살던 곳을 바꾸든가, 다시 태어나야 된다고 했던가. 나는 살던 곳을 바꾸었으니, 새로운 사람이 될 수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제주로 내려왔다. 나는 그 길로 동사무소에 가서 주소이전을 신청했다. 주민등록 주소지를 변경하고 났더니 그제야 다른 도시로 떠나온 것이 실감 났다. 뭐든 익숙해지려면 시간이 걸린다. 나는 그 시간들을 서두르지 않고 싶었다. 종종 찾던 제주였지만 그것이 생활터전이 됐을 때는 달라질 것을 알고 있었기에 조금씩 제주와 친해지고 싶었다. 


당시에도 제주 이주는 붐이었다. 세종시를 제외하고, 전국에서 유일하게 인구가 증가한 곳은 제주가 전부였다. 제주에 내려온 이주민들은 휴지기를 맞아 쉬러 왔거나, 아니면 이 곳에서 새로운 출발을 준비하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카페를 하거나 게스트하우스를 하거나. 왜냐하면 제주에서의 이직은 척박하기 때문이다. 주변에서도 제주에서 이직했단 말은 들어보지 못했고, 제주 관련 책 어디에서도 볼 수 없었다.  


퇴직금이 바닥을 보이자 나 역시 이직 준비를 시작했다. 제주에서 직장생활이라니... 제주 이주를 결심하기 전에는 생각해본 적 없는 그림이지만, 어쨌든 잘해보자. 그렇게 생각했다. 이곳도 사람 사는 곳인데, 나 하나 일할 곳이 없을까? 싶어 취업사이트를 열었을 때... 나는 충격을 받았다.


그래. 이곳도 사람 사는 곳이긴 하나, 이 도시를 먹여 살리는 것은 관광. 취업사이트의 다수는 '호텔이나 리조트, 펜션 등에서 일할 사람'을 뽑고 있었고, 그 외 일자리는 열심히 살피고 또 살펴야 할 지경이었다. 월급도 형편없었다. 아무리 해도 이건 너무하잖아 싶게 박봉이기 일쑤. 괜찮다 싶어 눌러보면, 경력과 신입의 경계가 없다. 이게 말로만 듣던 경력직 같은 신입인가. 


이래서 이주민들의 이직성공기를 못본건가? 역시 현실은 상상 속의 그 무엇보다 몇 곱절 더 잔인하다. 

나는 두어 달 그렇게 취업사이트를 전전했다. 프로필을 정리하고, 포트폴리오를 다듬고 또 다듬어도 내가 원하는 급여 수준과 할 수 있는 분야의 일은 정말이지 바늘구멍이었다. 잘할 수 있다는 패기는 어디로 가고, 나는 조금씩 의기소침해졌다. 면접은 고사하고, 어떻게 이력서 낼 곳도 없다니. 


"나 이곳에서 먹고살 수 있을까?"

그렇게 하이에나처럼 취업사이트를 뒤지고 뒤졌다. 아니 요즘 같은 세상에 연봉도 안 적혀 있다니. 그래 놓고 희망급여는 왜 적으라는 거야? 직군과 업무분야가 왜 이렇게 애매모호하지? 죄다 하라는 건가. 나는 오만 잡생각을 하며 취업사이트를 뒤졌다. 언젠가 내가 회사를 차린다면, 명쾌하게 직원을 뽑고 말겠다며. 이렇게 알듯 말 듯 모를 구인공고는 서로에게 해롭다고 생각하며.


그러다 겨우 괜찮다 싶은 곳을 발견하고, 이력서를 냈다. 

그리고 얼마 후, 면접에 오라는 전화를 받았다. 

역시 인생은 실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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