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글 015
서른세 살 까지는 괜찮았었던 것 같다.
올해 나는 서른네 살, 누가 뭐래도 삼십 대 중반이 된 것이다.
나이가 들어간다는 것을 받아들일 준비가 아직 안 되었는데,
받아들일 준비도 안 된 사람에게 세월은 그저 밀려온다. 슬그머니 던져놓고 떠난다.
생물학적으로 늙어가면서 눈에 보이는 신체적인 노화들.
늙어간다는 서러움이 컸다.
일을 쉬고 있던 올해 초의 대부분의 시간들 동안 나는 그것을 생각하고 슬퍼했다.
지나가는 노년의 사람들만 봐도 곧 있을 나의 모습이 보였다. 서글펐다.
시력이 많이 좋지 않은 나는, 언젠가 내가 시각장애인이 되는 상상을 했다.
깨끗한 시력은 아니지만, 볼 수 있음에 감사했다.
나와 나이가 같은 친구들도 나처럼 이렇게 슬픈 걸까.
우리 부모님도 이렇게 슬펐던 걸까.
친구들에게도 나이가 들어가는 서러움이 있냐고 물어봤다.
그들의 대답은 나와 달랐다. 그저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나도 그것을 그냥 받아들이기로 했다.
다가오는 것을 슬퍼하지 않고, 정면에서 바라보기로 했다.
받아들이고 나니 마음이 좀 편해졌다.
그렇게 살던 어느 날 한 모임에서,
말 한마디 한마디가 세상을 이미 통달한 것처럼, 성숙해 보이는 한 친구를 만났다.
모두가 그의 나이를 삼십 대 중반, 유부남, 목회자, 혹은 아이가 있을 수도 있다고 추측했다.
모두가 입을 틀어막았던 그의 나이는 스물일곱이었다.
직업 특성상 죽음과 끝을 많이 접했던 그는 나와 똑같은 마음의 경험을 하고 있었다.
늙어간다는 서러움은 서른네 살에게만 오는 게 아니구나.
생물학적인 나이는 상관이 없었다.
마음의 크기와 속도는 다 다르니까.
누구나 한 번쯤 그런 시기가 올 테지만, 다만 그 '때'가 다를 뿐이었다.
그 시기가 찾아온다면, 우리는 누구나 똑같이 늙어가고 있으니
그저 나답게 살아가며 그 서러움과 슬픔을 정면에서 바라보라고 말해주고 싶다.
오늘 그리고 매 순간을 어떻게 살아가느냐가 중요하지 않을까.
그렇게 슬픔에 잠겨 있던 때에,
과거에 내가 가지 못한 길에 대한 아쉬움과 현재의 '내'가 과연 옳은지에 대한 고민도 많았었다.
그 당시 읽었던 책인 매트 헤이그의 '미드나잇 라이브러리'에서 나오는 한 문장은 나에게 잔잔하게 위로를 주었다.
'중요한 건 무엇을 보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보느냐이다.'
내가 살아온 삶은 어찌 됐건 내 삶에서 최선의 선택이었다.
어느 것 하나 부정할 수 없는 선택이었다.
그 선택이 없었다면 지금의 나도 없을 테니까.
내가 또 다른 삶을 선택하고 살아왔어도 나는
가보지 못한 다른 길을 아쉬워하고 후회했을 것이니까.
나의 모든 선택과 결과들로 인해 그저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어떻게 보느냐, 어떻게 살아가느냐 이다.
생각지 못했는데 그 순간이 마지막이었던 경험들이 있다.
화가 나서 던진 말, 성의 없었던 말, 신경질적인 말투, 귀찮아서 대충 한 행동들.
마지막으로 기억될 나의 모습과 나의 말들은
나를 다 보여주지 못하고도 그렇게 내 모습으로 기억되었다.
물처럼 밀려오는 세월과 내가 가지 못한 길들을 바라보며 슬퍼만 할 것이 아니라
나의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모습들이 가장 나답고 아름다울 수 있게 최선을 다한다면,
그런 마음가짐으로 살아간다면 매 순간을 유의미하게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