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공주일장춘몽 May 17. 2022

<1> 겁 없이 뿌려댄 씨앗의 참혹한 결과


실험실을 차렸다. 그곳에서는 모든 게 내 손에 죽기도 하도 살기도 한다.

어제의 결과와 오늘의 결과에 차이가 없으면 그렇게 실망스러울 수가 없다.



원래 식물 키우는데 젬병이다. 요즘 말로 ‘살식마’다. 선물로 화분을 받으면 한숨부터 났다.

보나 마나 또 죽일 텐데... 미안하고 아까워서 어떻게 하나... 이사할 때 깨버린 화분이 한두 개가 아니다.     


그런 내가 올해 벌써 배양토를 50리터 두 번, 10리터 두 번, 총 120리터를 소비했다. 지금 그 많은 흙 위에는 루꼴라, 바질, 호랑이 콩, 고수, 상추가 누워있다. 참, 허리 잘린 대파도 있다. 화분은 따로 없다. 스티로폼 박스에 구멍을 뚫고 흙을 부어 작은 밭을 만들었다. 언제 죽일지 얼마나 키울지 알 수 없기 때문에 멋지고 좋은 화분을 살 생각은 애초에 없었다.     



처음 종자를 사서 뿌린 시기가 4월 10일. 코로나 격리로 꼼짝 못 할 때였다. (그렇지 않아도 이곳에 와서 일상이 자택격리와 같은 상황이었지만...) 늘 안 나갔는데 이제는 못 나간다고 하니 그렇게 답답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일 거리를 만들고 말았다.  지금와서 보니 사고를 톡톡히 친 거였다.    


몰랐다. 루꼴라의 발아율이 그렇게 높은 줄. 진짜 몰랐다. 바질과 호랑이 콩은 5월이 지나서 파종을 해야 하는 줄.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루꼴라도 바질도 그냥 냅다 뿌렸다. 그래도 호랑이콩은 나름 머리를 써서 띄엄띄엄 묻었다.      


일 벌이기 전에 주변의 식물 집사들한테 물어나 볼 것을. 인터넷에서 찾아라도 볼 것을. 냅다 뿌린 씨앗들 때문에 한동안 고생 많이 했다. 밭을 만든 지 사흘 만에 올라오기 시작한 루꼴라는 며칠이 지나자 감당하기 어려울 지경이 됐다. 우후죽순. 꼭 콩나물처럼 생긴 것들이 마구잽이로 올라오는데 겁이 덜컥 났다. 이것들을 다 살릴 수 있을까? 내 손으로 키운 루꼴라를 뜯어 먹어볼 수는 있을까? 그에 비해 바질과 호랑이 콩은 감감무소식. 열흘, 보름이 지나도 도무지 싹을 보여줄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하는 수 없이 황금손 식집사에게 SOS를 쳤다. 모든 씨앗을 발아시켜 아파트 베란다를 간이 식물원으로 만드는 재주를 가진 선배에게 현재 우리 집 베란다 상황을 보고하고 솔루션을 받았다.     


루꼴라는 뿌리 다치지 않게 조심해서 분가시키고 물을 많이 줘 웃자란 녀석들에게는 무거운 흙을 구해 목까지 덮어줄 것. 바질은 발아온도가 중요하니 안으로 들여놓고 밤이면 신문지와 뽁뽁이 비닐로 이불을 덮어줄 것. 호랑이 콩은.... 방법이 없으니 그냥 기다릴 것. 베란다를 실험실이라 생각하고 이것저것 겁먹지 말고 해 볼 것.     


아.. 이럴 줄 알았으면 밭을 만들지 말걸... 씨앗을 사지 말걸... 코로나 걸렸을 때 그냥 푹 쉴걸...     


얘네들... 살릴 수 있을까?



마구 마구 웃자란 루꼴라


이불 덮고 누운 바질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