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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주일장춘몽 Apr 26. 2022

어쩌다보니 공주댁

아들이 집을 떠났다. 


늘 어리고 보살펴줘야만 할 것 같은 하나뿐인 아들이 국방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서 훈련소로 떠났다. 남들 다 가는 거라고 하지만 우리 가족에게는 일생일대의 큰일이었다. 훈련소에 데려다 주고 온 날은 어찌나 눈물이 쏟아지던지 밥도 안 먹히고 잠도 오지 않았다. 하지만 마냥 눈물을 짜고 늘어져 있을 수가 없었다. 나 혼자 또 하나의 큰일을 치러내야 하기 때문이었다.


아이가 여섯 살 때 이사 와서 스무 살이 넘도록 살던 집을 떠나야 했다. 15년 가까이 주말부부로 살았다. 마흔을 눈앞에 두고 지방으로 혼자 내려간 남편은 벌써 50줄 가운데 서있다. 나도 혼자 애 키우고 살림하고 일 하느라 늘 종종거리며 살았다. 하지만 아들이 옆에 있었다. 어려도 큰 의지가 됐다. 

반면 남편은 늘 혼자였다. 평소 자기주장을 강하게 하지 않는 남편이 아들이 군 문제로 집을 비운 2년 만이라도 같이 살고 싶다고 힘주어 말했다. 물론 주말이면 길에 뿌리는 교통비와 두 집 생활비를 줄여보자는 현실적인 문제도 컸다. 겁이 많은 편인 남편은 밤이면 TV를 틀어놓고 잔다고 했다. 그런 사람이 혼자 지내는 게 얼마나 힘들었을까 생각하니 내키지 않지만 남편이 원하는 대로 해주고 싶었다.


아들을 군에 보내고 제대로 슬퍼할 겨를도 없이 혼자 이사 준비를 했다. 무려 15년을 살았던 집에서는 버려도 버려도 또 버릴 것이 쏟아졌다. 남편이 주말에 와서 도와주기도 했지만 일주일간 정리해 둔 것 가운데 무거운 짐을 버려주는 정도. 남편과 함께 이사 준비를 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아들을 군대 보내고 3주 후에 이사 했다. 경기도 일산을 떠나 내려온 곳은 충청남도 공주시.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자라고 서울 인근에 살면서 서울에서 일을 해 온 나로서는 난생 처음 지방에서 살게 된 것이다. 내려 올 때 가까이 살던 친정엄마가 제일 서운해 하셨다. 나도 그게 제일 마음에 걸리고 죄송했다. 결혼하고 20년 넘도록 친정 부모님 신세를 참 많이도 지고 살았는데...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 좋아하는 것들을 모두 두고 떠나 오려니 발걸음이 한없이 무거웠다. 신이 난 사람은 남편뿐이었다. 얄밉기도 하고 안됐기도 하고... 마음속의 복잡한 실타래가 점점 더 얽혀가는 것 같았다. 


남편이 처음 지방으로 내려왔을 때는 세종이란 도시가 없었다. 지금 세종시가 들어선 자리는 허허벌판, 터다지기 작업이 한창이었다. 그래서 남편은 공주에 거주지를 마련했다. 십 수 년 간 공주에서, 세종에서, 대전에서 살아봤던 남편은 공주에 집을 마련했다. 어차피 아주 내려와 살 생각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이왕 지방으로 내려온 김에 조용하고 한적한 곳에서 살아보자는 생각에서였다.


어디서 살지, 어떻게 살지 깊게 생각해보지도 못하고 쫓기듯이 내려왔다. 정신 차리고 보니 이곳이었다. 그렇게 나는 공주댁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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