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뿐만 아니라 어마어마하게 많은 것들이 모습을 바꾸거나 사라진 시간이라고 하더라. 10년이면 강산이 한 번은 바뀐다고 했으니, 네 차례나 바뀌었을 시간이라고도 하더라.
내 생각과 마음속에서는 '그렇게 오랜 시간이 흘렀다고?' 하며 믿을 수 없는 것과는 별개의 의심을 던져야 하는 시간이기도 하지만. 그래, 어쩌면 그 시간 속의 장면들은 불과 하룻밤, 또 하룻밤, 거기에 기껏해야 또 하룻밤이 지난 생생한 내 기억 속에서 제멋대로 돌아다니는 것들일 뿐인 것이야.
때는 바야흐로 1985년, 꼭 40년 전 중학교 3학년 때 어느 봄날의 기억 속으로 들어가 보자구.
'레드~~ 썬!'
여전한 내 어깨 높이의 낮은 둑이 보여. 그 낮은 둑 너머로 고개를 들이밀어 넘겨다 보면 저기 저만치에서 하늘색 바다가 밀려와 찰랑거리지. 배를 계류하는 정박줄마다 작은 어선들이 한 척씩 찰싹 붙어있는 한가로운 바다풍경. 그 바다에서 눈길을 거두며 뒤돌아 서면, 10여미터도 채 되지 않는 시멘트 도롯길 건너에 정겨운 옛집이 보여. 그때의 내 키를 한번 더 더한 높이의 검붉은 벽돌담장 너머로 마당에서 한가롭게 뭔가를 다듬고 계시는 어머니. 아버지가 잡아오신 생선인 듯도 하고, 꽃게인 듯도 하고, 어머니로부터 조금 떨어진 좁은 마루에는 한쪽 다리를 걸치고 앉으셔서 담배를 태우고 계시는 아버지도 보인다. 내 유년기에 익숙하게 보았던 풍경이야. 옥상으로 난 계단을 오르면 파란 비닐 포장 위에서 소금기 묻은 바닷바람이 싣고온 햇살에 삐쩍 말라가는 빨간 참새우가 보이고, 넓지 않은 옥상 가득 먹새우 말리는 흔적으로 발을 디디기가 곤란하지. 이제 하루나 후면 커다란 자루에 담아 다락방 옆에 쌓아둘 거야. 그러다가 어느날 올라가보면 모두 팔려나가고 퀴퀴한 그 냄새만 남게 되겠지.
옥상에 서서 햇살에 반짝이는 윤슬에 빠져 있다가, 문득 소리나는 쪽으로 시선을 옮기니 멀지 않은 곳에 친구 놈들도 하나둘 보여. 지금은 다들 어떻게 사는지 소식이 끊어진 지 오래인데, 골목길 한 쪽 벽면에서 공을 튕기는 녀석과 가까운 초등학교로 공 차러 가자고 고집을 피우는 녀석도 있고. 물이 빠지면 바닷가에 내려가 갯벌을 뒤지고 다니기엔 아직은 차가운 바다. 우리에겐 바다가 아니면 오늘 같은 휴일 오전을 적당히 재밌게 보낼만한 놀이가 없었지.
그러는 친구놈들 중에 그 아이가 수줍은 듯이 낯을 가리며 한 발짝 물러 서 있는데. 불과 몇 달 전에 두미도 아님 욕지도에서 온 가족들이 이사를 오는 바람에 전학을 온 친구였어. 대개 바닷가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는 아이들이 그러했지만, 얘는 더욱 새까만 피부를 가졌었지. 조용했고, 바보스러울 정도로 선했다는 기억이 남아 있어. 공부랑, 책 읽기와는 친하지 않은 아이였는데, 그것은 제법 오랫동안 이어진 이 동네 아이들과 옆 동네 아이들의 손쉬운 차별적 특징이기도 했었지.
나와는 같은 반은 아녔지만, 어느 날 집으로 찾아온 그 아이의 부모님 때문에 함께 등하교를 하게 되었어. 그러면서 우리는 빨리 친해졌고, 이따금씩은 휴일에도 함께 축구공이나 농구공을 들고 20여분 남짓 걸어서 학교에 가고는 했었지. 학교에서는 다른 친구들과 함께 공도 차고, 틈틈이 공부도 하면서 너무 늦지 않게 집으로 돌아오곤 했었고.
그러던 어느 하루, 둘이서 축구공 하나 들고 함께 학교를 갔었던 오늘처럼 휴일이었을 거야. 애들도 몇 명 없는 교실에서 찔끔거리면서 공부를 하다가 점심 먹으러 가기 전에 공을 차러 갔었어. 그 친구는 공을 들고 곧장 운동장으로 갔고, 나는 화장실에 잠깐 들렀다가 운동장으로 갔었지. 내가 다른 친구들 몇이랑 함께 막 운동장에 내려섰을 그때, 그 일이 터진 거야. 그 친구와 같은 반이었던 아이 하나가 시비를 걸며 공을 빼앗으려 했던 것이지. 이놈이 지랑 친한 놈들이랑 차려고 들고 있던 공을 빼앗는데, 이 친구가 선뜻 내주지 않았던 거야. 요즘 하는 말로 일진놀이에 빠져있던 이 놈이 평소에는 군말 없이 자신을 따르던 이 친구에게 욕설을 하며 뺨을 후려쳤는데, 얼마나 놀랐던지. 금방 빨갛게 달아오른 그 친구의 볼과 금방이라도 눈물이 떨어질 듯 흔들리던 그 눈빛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어.
짧은 시간 마주친 우리 둘의 눈빛, 그를 흘겨보던 그 순간에 난 그가 뭘 원하는지 알았던 듯 해. 아무런 주저함도 없이 달려가서 그놈의 면상을 깨져라 하고 쥐어박아 버렸지. 내 가슴을 부여안으며 날 말리던 친구들, 그런 그들의 어깨 사이를 헤집고 보이던 그 몹쓸 놈의 코에서 흐르던 검붉은 피와 귓가에 들리던 쌍욕들.
하지만, 그놈이나 나나 친구들에게 둘러싸여 서로 다가갈 수는 없었으니 그날의 싸움은 그렇게 끝이 났더랬지. 나중의 어느 날 하찮은 시빗거리로 죽일 듯이 두들겨 팼었던 기억이 남아 있는데, 그놈이랑 두 번째 쌈박질을 하고 난 이후에 답답한 마음에 이 친구에게 했던 말을 기억하고 있어.
"왜 저런 놈에게 맞고 있어?"
"저런 놈들은 네가 아무런 반항도 안 하고 시키는 대로 하니, 거기에 재미를 붙여서 더욱 저러는 거야."
"한번 오지게 맞는다 생각하고 한대만 쥐어박아봐. 겁도 나고 맞으면 아프겠지만, 눈 딱 감고 한 대만 쥐어박아봐."
"그럼, 다음부턴 달라질 거야."
하지만, 끝끝내 이 친구는 그 몹쓸 놈이랑 드잡이 할 기회가 없었던 듯 해. 그런 기회가 있었어도 과연 그 성격에 어땠을지는 뻔하지만.
사실, 내가 그랬었거든 초등학교 5학년 때였어. 같은 반에 어느 날부턴가 날 못살게 구는 덩치 큰 놈이 하나 있었지. 지금이야 나도 183센티의 키에 85kg의 비만인 체구를 갖고 운동을 좋아했던 몸이지만, 초등학교 졸업할 때까진 작은 키에 병치레도 잦아서 그런지 볼품 없고 약해 보였었나 봐. 가만 생각해 보면, 녀석들이 특별히 폭력을 쓴다든가 하진 않았었는데, 쉬는 시간이나 점심시간에 왜 그렇게 성가시게 하며 귀찮게 굴었을까. 두세 명의 엇비슷한 놈들이 어울리며 싫다는 나를 괴롭혔었지. 그러던 어느 날 하굣길에 그놈들이 불러 세워서 무엇인가 해코지를 했는데, 그건 기억이 나질 않지만 그날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났는지 그 해코지를 참지 않고 그놈들에게 덤벼들었지. 심하게 싸우지는 않았어. 몇 대 맞았던 듯도 하고, 몇 차례 때리기도 했고. 그런데 그 다음 날부터 이놈이 내게 눈길도 주지 않더라고. 그렇게 아무 일도 없이 지났는데, 몇개월 후 여름방학 직전 소나기가 쏟아지던 날에 둘이서 비를 맞으며 흙탕물에서 제대로 된 쌈박질을 했었지. 그런 일이 있고 난 후에 그 녀석들이 더이상 나를 건들지는 않더라고. 나중에 6학년 때 학교에서 제일 큰 아이랑 나무의자 들고 좇아가며 죽일 듯이 싸운 적이 한 번 있었지만, 그 때는 다들 그렇지 않았나 싶어.
그런데, 그 친구와 오래전 그때를 생각하다 보니 우리 삶도 별반 다르지 않고, 그런 것은 아닐까 싶어.
물리적으로 그 친구를 괴롭혔던 그 몹쓸 놈과 나를 괴롭히고 성가시게 굴었던 그 놈들처럼, 조금 과장된 말이 될 수도 있겠지만, 결국에는 나에게 절망감을 주는 그런 사람들과 그런 일들이 얼마나 많았었는지. 그렇게 그런 이들이 그리고 그런 일들이 나에게 부딪혀 올 때마다 그래도 용케 잘 헤쳐 나오며 여지껏 잘 살아왔나봐. 물론, 그중의 몇 차례는 걷잡을 수 없는 깊은 절망감에 빠져서 좌절의 시간을 보낸 때도 있었지만, 어쨌거나 견뎌 내었으니 말이야. 그 힘든 시간들조차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본다면, 온전한 내 삶을 꾸려나가기 위해 꼭 지나야만 했던 경과과정이 아니었을까.
온전한 나의 삶을 꾸려 가기 위한 노력. 그런 노력과 열정만으로 나에게 절망감을 안겨줬던 몹쓸 것들에게 굴복하지 않기 위해서 얼마나 애를 썼던지. 때로는 이게 맞나 하고 자신의 선택을 의심하면서도 나를 지키기 위해 덤벼들었던 시간들. 맞아서 쥐어 터지고 무릎을 꿇었다가도 다시 일어나서 맞붙었던, 다시 또 덤벼들어야 했던 시간들. 그것이 내 삶을 지켜주었던 것이 아닐까.
설마가 사람 잡는다고 하지만, 결코 설마는 사람을 잡지 못해. 설마에서 내리지 않은 사람이 자신의 삶을 잡는 것일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