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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편지

보내지 않은 편지

2. 서연의 오후

by 몽유

햇빛이 너무 투명해서,

창문에 기대어 서 있는 것만으로도

서연은 투명해지는 기분이었다.

세상의 빛이 그녀의 어깨를 지나

방 안 가득 번지고, 그 빛 속에서 서연은 문득,

자신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진우가 떠난 지, 열이틀째 되는 날이었다.

정확히 셌던 건 아니다.

그저, 아침마다 물을 주던 화분의 흙이

열 번쯤 마르고 다시 젖는 걸 지켜보았을 뿐.


오전에는 커피를 내렸다.

진우가 쓰던 그 컵은 여전히 선반 안쪽에 있었고

서연은 그 컵을 꺼내지 않았다.

다만, 문득 그 컵을 꺼낼까 고민하는 순간,

자신이 아직 그만큼도 못 떠났다는 걸 느꼈다.


거실 구석에 놓인 두 권의 책.

한 권은 진우의 것이었고, 한 권은 서연의 것이었다.

서로 읽다 마주친 문장을 포스트잇에 써 붙이던 날들.

거기엔 아직도, '괜찮을까, 우리가.'라는

진우의 손글씨가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그 말은 질문이었을까,

아니면 그가 이미 알고 있었던 결말의 기록이었을까.


서연은 오후 내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혼잣말조차 조심스러웠다.

방 안의 공기가 너무 얇았, 감정이 너무 두꺼워

말이 닿을 자리는 어디에도 없었다.


오후 세 시가 조금 넘어,

그녀는 처음으로 창밖을 보았다.

멀리 우체통에

누군가 편지를 넣는 모습이 보였다.


문득 편지를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진우에게.

보내지 않아도 되는 편지.

도착하지 않아도 괜찮은 말들.


'나는 여전히 거기 있어.

네가 말하지 않던 슬픔과

내가 꺼내지 못했던 망설임 사이에.

우리는 서로를 다 이해하지 못한 채

조금은 사랑했고

조금은 외면했지.

그게, 우리가 할 수 있었던 최선이었을까.'


편지를 다 쓰고 나니

노을이 지고 있었다.

그 붉은 빛에 편지지 가장자리가 물들었다.

서연은 그 편지를 봉하지 않았다.

서랍 안에 조용히 놓고

등을 켰다.


오늘은 그렇게,

이별 이후의 어느 오후가

조용히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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