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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서연, 다시 걷다

by 몽유

걷고 싶다는 생각이 든 건

정확히 언제부터였을까.

아무도 없는 오후의 공원,

낙엽이 절반쯤 사라진 산책로에서

서연은 조용히 발을 내디뎠다.


이 길은 예전에도 걸은 적이 있다.

진우와 함께였던 기억은,

놀랍도록 선명하지 않았다.

그냥, 어딘가 한쪽 구석에

비어 있는 듯한 감각만 남아 있었다.


서연은 그 감각을 억지로 지우지 않았다.

기억은 마치

스치는 바람처럼

지나가게 두는 게 더 자연스럽다고

이제는 생각하게 되었다.


걷는다는 건,

어쩌면 잊기보다 견디는 방식일지도 모른다.

그녀는 벤치에 앉지 않았다.

멈추면 마음이 쏟아질까 두려웠고,

발끝에 실려 있는 말들이

아직은 완전히 내려앉지 않았기 때문이다.


길가에 핀 작은 꽃을 보았다.

진우라면

"저건 이름이 뭐야?"라고 물었겠지.

서연은 대답하지 않고,

그 꽃을 잠시 바라보다

그냥 지나쳤다.

이제는, 대답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과

함께 걷고 있는 것이 아니니까.


그녀는 잠시 두 눈을 감았다.

햇빛이 눈꺼풀을 통과해

따뜻한 붉은 기운으로 안쪽을 비췄다.

그 안엔 여전히,

이름 지을 수 없는 감정들이 살아 있었다.


하지만 그것들이 이제는

그녀의 발목을 붙잡지 않는다는 걸,

서연은 알고 있었다.

아프다는 건

그 고통을 말할 수 있을 때 끝난다는 걸

조금씩 배워가고 있었다.


그날 저녁,

서연은 오랜만에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예전의 얼굴 같지 않았다.

그러나 낯설지도 않았다.

어딘가 모르게

무언가 지나간 자리를 품은 얼굴.


다음 날,

그녀는 편의점에서 작은 꽃을 샀다.

한 송이,

작고 노란 국화.


꽃병에 꽂으며

그녀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나, 잘 걷고 있어.”


그리고 다시,

창문을 열었다.

바람이 스쳤고,

서연은 그 바람에 잠깐 눈을 감았다.


어느 계절은 그렇게

서서히 다시 걸을 수 있게 만든다.

완전히 잊지 않아도,

조금씩 살아질 수 있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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