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비
여름비가 내릴 때면, 나는 어김없이 당신을 떠올립니다. 언제나 예고 없이 내려와, 준비하지 못한 마음을 가만히 적시는 비. 빗소리는 오래된 편지의 활자처럼 귓가를 두드리고, 이미 다 읽었지만 잊히지 않는 문장을 되새기듯 마음 속을 흔듭니다. 그 소리에 묻혀, 나는 여전히 당신을 그립니다.
거리는 빗물에 잠겨 모든 흔적을 지워가지만, 이상하게도 당신의 발자국만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 또렷해져, 금세 나타날 것만 같은 착각 속에 나는 우산도 쓰지 않은 채 빗속을 걸어갑니다. 젖어드는 옷자락, 맨살 위로 스미는 물방울은 당신의 체온 같아 잠시 걸음을 멈추게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착각일 뿐, 당신은 이미 오래전 떠나갔습니다.
비는 모든 것을 씻어내는 듯 흘러내리지만, 내 그리움만은 지우지 못합니다. 오히려 빗줄기 속에서 더 짙게 번져, 내 안을 가득 메웁니다. 눅눅한 흙냄새가 오래된 사진첩의 종이 냄새처럼 번지고, 가로등 아래 흩날리는 빗방울은 한때 당신이 흘리던 웃음의 파편처럼 빛납니다.
여름비가 멎어 가는 길목에 서면, 세상은 한순간 맑아지건만 내 마음은 더 흐려집니다. 당신은 점점 멀어지고, 그리움은 끝없이 번져 또 다른 비가 되어 내 안에서 쏟아집니다. 비가 언제 멎을지 알 수 없듯, 나 또한 당신을 멈추어 낼 수 없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