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만이 남은 밤
밤이 올 때면 하나의 그림자가 내 안으로 걸어온다. 어디선가 부스러진 말 한 조각이 다시 입속을 맴돌고, 이미 지나간 그날의 얼굴이 창을 기웃거린다. 말하지 못했던 한마디가, 하지 않아야 했던 침묵이, 너무 또렷하게, 너무 질기게 다시 살아난다. 나는 눈을 감지 못하고, 그 밤을 다시 처음처럼 살아내야 한다.
몇 번이나 되뇌었던 문장들.
‘그땐 왜 그렇게 밖에 못했을까.’
‘조금만 더 기다렸다면, 조금만 덜 자존심을 세웠다면…’
그 모든 말은 지금의 나를 구하지 못한다. 그날의 나 역시, 지금의 나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니 이 모든 후회는 누굴 위한 것인가. 나는 그 물음 앞에서 끝내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
풀벌레 소리마저 입을 닫고, 별빛은 창가에서 등을 돌린다. 달조차 뜨지 않은 밤이었다. 나를 바라보았다.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던 나의 안쪽에서, 아무 표정 없이 멍하니 고여 있는 나를. 그 어두운 물웅덩이 같은 눈빛을 들여다보다가, 문득 내가 이미 오래전 무너졌다는 것을, 이미 오래전부터 돌이킬 수 없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건 체념이라기보다는, 더 이상 기대할 것이 없다는 안쪽의 감정. 기다림도, 용서도, 다 끝난 자리에 남겨진 공허였다.
나는 기도하지 않는다. 용서를 구하지도 않는다. 애써 괜찮은 척할 힘조차 없다. 그저 나를 둘러싼 침묵 속에서, 아주 오래도록 깨어 있는 것이다. 누구도 들어주지 않는 말들을 가슴 안에서만 부풀렸다가, 한없이 작아지는 밤. 아무도 오지 않는 이 방에서, 내가 가장 오래 응시하는 건 나 자신이라는 사실이, 더 이상 슬프지도 않다는 사실이, 이 밤을 더욱 차갑게 만든다.
나는, 그렇게 또 하나의 불면을 통과한다. 언제부턴가 잠은 나를 떠났고, 어둠은 나를 떠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