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뜬금없는 그리움이다

by 몽유

나는 '첫눈에 반한다'는 말을 믿지 않는다.

또한, 나는 '반한다'는 말이 당신과 성적 관계를 갖고 싶다는 말의 또 다른 표현이라거나, 무의식적 교감의 표출이라는 말 역시도 믿지 않는 그런 사람들 중의 한 사람이다.


하지만, 그녀를 처음 본 그날, 그 비 속에서 발길을 돌리지 못하고 결국, 그녀를 따라가게 만들더니 기어코 그녀의 옆자리에 앉아서 수업시간 내내 힐끔힐끔 그녀를 훔쳐보게 만든 내 감정은 무엇이었을까.


얼떨결에 따라 들어간 그녀의 수업이 끝나기를 기다리며 지켜본 그녀의 모습이란...

뚫어져라 책을 보는 눈과는 달리 산만하게 펜을 돌리던 길고 하얀 손가락과 무릎 아래로 드러난 도톰하고 하얀 종아리.

하얀 운동화가 숨기고 있을 듯한 작고 귀여운 발.

티 없이 맑은 눈이란 그녀의 두 눈을 두고 하는 말이다.

하지만, 어딘가 장난기도 있어 보였고, 나를 끌고 당겼던 화사한 웃음을 머금고 있는 두 눈이었다.

그 웃음 띤 얼굴을 마주하지 않았더라면 그날 그렇게 엉뚱하게도 그녀의 수업에 따라 들어가진 않았을 텐데.

지금 생각해도 다소 우스꽝스러운 치기의 발로였던가 싶다.


그날 비가 오지 않았더라면, 난 널 볼 수 없었을 텐데.

그리고, 그날 비가 없었더라면 너의 강의실에서 잠깐동안 훔쳐본 네 모습에 만족해하며, 끝끝내 아무런 말도 건네보지 못하고 나중에라는 말로 인연운운 하며 지나쳤겠지.

하지만, 선뜻 비 속으로 나서지 못하고, 서성이고 있던 너와 작은 우산 하나에 의지한 채 어색하게 어깨를 맞닿으며 비 속을 걸었던 그 짧은 시간.


축축하게 젖어갔던 내 왼쪽 어깨처럼 이내 너에게 젖어들 것이 너무 선명해서 오히려 걱정스럽기도 했었어.


하얗고 검정의 학교 앞 찻집에서 낡은 진공관앰프를 통해 흘러나왔던 노래들의 이름을 알아맞히며 간간이 내게 보였던 너의 미소가 여전히 좋았고, 노랫가락 사이로 흐르는 듯했던 너의 음성과 나중엔 장난기 잔뜩이었던 너의 눈짓이 내겐 사랑이었으니.

어찌해야 했을까.


찬 한 잔을 사이에 두고 흔히들 거쳐간다는 서로를 알아가던 시간이 꽤 지났고, 그 사이에 비는 그쳤더랬지. 배고픔을 달래러 옮겨간 곳이 막걸리에 파전과 고갈비를 내놓는 곳이었으니 그것도 너의 장난기 어린 배려였음을 알고 얼마나 고마웠었는지.

하지만, '네 눈에 난 얼마나 답답한 사람이었을까'


"선배, 재밌었어요. 이런 데이트도 재미있네요."

"우리 내일은 뭐 할까요?"

하며 애써 나를 위로했던 헤어짐의 인사가 내겐 다음날의 스케줄을 그리게 했는데, 그것이 또한 너에겐 얼마나 미안했었는지 모를 일이다.

그저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이 영화 아니면 연극, 그리고는 가수들의 소극장 공연이 전부였으니.


진즉에 자칭타칭 연애박사라는 동기 놈들의 조언을 구했으면 더욱 기억에 남았을 텐데.

그래도 싫다고 하는 말 한마디 없이 뚜벅이로, 지하철을 타고 다녔던 너와 나의 봄과 여름은 그렇게 즐거웠었나 보다.

지금도 소극장이 즐비한 대학로에서나 명동에서는 너와 함께 했던 기억이 떠오르는 것을 보면.


그리고, 기억 속의 한 면을 단단하게 차지하고서는 결코 자리를 내어주지 않을 듯한 그해 여름의 산행.

오늘처럼 지독한 무더위도 결코 막지 못했던 우리들의 첫 산행.

이틀간의 밤을 함께 보냈던 지리산.

그래서 지리산은 또렷한 그리움을 품고 있다.


그해 여름도 올해처럼 무척이나 무더웠을 거야.

새벽녘에 나섰다고 해도 우리가 남원에 도착했던 그 아침이 무척이나 더웠지만 너는 씩씩하게도 잘 오르더구나.

산을 오르는 모습을 보면 그 사람의 평소 삶의 모습을 알 수 있다는 말이 있어.

난 네가 산을 오르는 모습을 보고 평소와 다름없는 너의 그런 모습이 더욱 사랑스러웠는지, 조금 더 시간이 지나 우리들의 사랑이 깊어가는 모습을 상상하며 그 힘든 산행을 계속했던 듯해.


쉬엄쉬엄 오른다고 했지만, 네가 너무 잘 오르는 바람에 계획했던 것보다 시간이 단축되었고 달궁계곡 상류에서 하루를 보내려던 계획을 수정해서 네가 지칠 때까지 올랐었었지.

그리고,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던 그 저녁에 텐트를 치고 밥을 해서 먹었더랬는데, 약간 설익었던 듯한 밥을 얼마나 맛있게 먹어주던지 그런 네가 난 얼마나 좋았는지 몰라.

그 밤에 흐릿한 랜턴 불빛 아래에서 쏟아져 내릴 듯한 별을 보며 한참이나 이야기를 나눴었는데, 우린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오래도록 나눴을까.


"지리산에 올라야 산을 보고, 물을 보고 그리고, 인간을 보고 세상을 본다."는 말씀을 남기신 남명 조식선생님의 바람처럼 우린 산을 보고, 물을 보고 인간을 보고, 세상을 보았을까.


그 아침 산에서 맞았던 서로의 부스스한 모습에 우린 얼마나 웃었는지. 넌 내게 그만 웃으라고 보챘지만 더없이 사랑스러웠던 네 모습에 웃음이 멈추질 않았으니 그걸 어쩐단 말이겠니.

다리가 아플 법도 한데, 다시 오른 산행길에 지금이야 자동차로도 오르는 노고단을 거쳐 장터목으로 그리고 천왕봉에 올랐었던 이튿날.

많은 사람들이 천왕봉에서 인사를 나누고 있었는데, 수줍은 듯 그렇지 않은 듯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던 너의 모습에서 어쩌면 난 십 년 후의 우리를, 그보다 훨씬 더 시간이 지난 어느 날을 상상해 보기도 했었지.


제석봉 아래의 고사목들을 보며 아쉬워하던 네 모습과 천왕봉의 해넘이를 보던 네 모습이 어찌나 그렇게도 꼭 닮았었는지.

사실 한 사람이니 꼭 같을 수밖에 없는 것인데.


지금은 야영을 할 수 없는 듯하던데, 장터목산장 근처에서 텐트를 치고 하룻밤을 더 보내며 우리는 무슨 이야기를 나눴을까.

옆 텐트의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더니 금방 친해져서는 맥주 한 잔 얻어 마시고는 내게 치근대던 네 모습이 당황스럽긴 했지만, 얼마나 귀엽던지.

그 밤에 난 네 덕분에 윤동주시인의 '별 헤는 밤'을 몇 번이나 암송했는지 몰라, 넌 기억 못 하겠지만.


다음날 하산 길에 함양 마천의 친구네 집에서 하루를 묵었는데, 마당에는 여전히 벌통이 몇 개 놓여 있었고, 고3 때 봤던 그 거대한 호두나무도 그대로였는데, 그 모습들이 네겐 참 신선한 풍경이었겠지.

년 만에 본 친구도, 어머니께서도 널 참 이뻐하셨는데.

넌 그런 친구였었지, 누구에게나 생글생글 잘 웃고 다정하게 인사를 하며 웃으며 말을 건네는 따뜻한 사람.


그렇게 지리산을 다녀온 후 우린 각자의 생활에 바쁘면서도 점심과 저녁은 늘 함께 했던 듯해.

주말과 휴일은 함께 보냈었고.

평일 학교에서 한 번은 꼭 보는 듯했는데도 주말과 휴일엔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이 좋았으니 다른 cc 친구들도 대개 그렇게 연애를 했던 것일까.


그러는 사이 가을은 빨리 지나갔고, 겨울은 서둘러 왔지. 날이 차가워지니 더욱 따뜻한 시간을 찾았던 것일까. 방학중에는 이따금씩 가족들과 함께 하는 시간도 좋았었고, 틈틈이 시간을 만들어 추억 만들기에 몰입했던 것도 같았지.

해가 바뀌었지만, 너와 나의 애정에는 변함이 없었고, 개학하자마자 1박 2일 짧은 코스로 덕유산으로 산행을 다녀오기도 했었지.


그러던 어느 날 중간고사를 얼마 남겨두지 않았던 어느 날에 아버지께서 쓰러지셨지.

병원에서 사경을 헤매고 계시던 아버지를 어머니께만 맡겨두는 것은 아닌 듯해서 옆에서 간병을 했는데, 그 먼 길을 찾아줬던 네가 얼마나 고마웠었는지.

그런 네게 어머니와 다른 가족들도 모두 가족이 될 거라고 생각했었더랬지.

아버지의 병원생활은 예상보다 길어졌고, 그동안 네가 몇 차례 더 다녀갔었지.


학교에선 중간고사를 치르지 않은 날 위해 구제방법을 제시했지만, 난 그것이 싫었을 뿐이었고, 아마도 그때 처음으로 우리가 다퉜었는데, 네가 기억할는지.

그리고, 그 뒤 몇 개월 후에 아버지께서 어느 정도 기운을 차리시고 그 겨울에 퇴원을 하셨더랬지.


아버지의 건강은 퇴원 후 어느 정도까지는 회복을 하시는가 싶었지만, 더 이상의 호전은 힘들 수도 있다는 의사들의 말.

가족회의에선 내가 가능한 한 빨리 졸업을 하고, 취업을 함과 동시에 결혼을 하길 원하는 쪽이었지.

그래서 너에게 이런 이야기를 했을 때 네가 보였던 반응은 내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었고, 그것은 너에게도 나에게도 큰 부담이 되었었나 봐.

결국, 난 이듬해에 졸업을 하면서 취업을 했고, 그때 네가 나와 결혼을 했었더라면 지금의 삶과는 또 조금은 다른 삶을 살아가고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우리의 인연은 아마도 거기까지였나 보다 싶어.


그날처럼 쏟아져 내리는 비에, 너를 처음 봤던 그날처럼 문득 오늘 네가 기억나는 것은 뜬금없는 그리움의 한 조각일까.

벌써 30년이나 지난 희미해진 추억 속의 한 장면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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