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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멍작가 Feb 24. 2021

그것에 대해 기억하다
-물건 모음집

욕조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

우리 집은 월세다. 나도 “네, 자가입니다 후훗”라고 말하고 싶지만 현재는 매달 꼬박꼬박 돈을 내는 월세집에 살고 있다. 사실 독일에 사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월세로 살기 때문에 크게 마음에 두지는 않는다. 다만 한 번씩 한국에 있는 친구들이 하나둘 집을 샀다는 얘기를 들을 때면 그 비싼 아파트를 사버린(대출이 큰 비중을 차지한다고 해도) 그들이 한편으론 대견하면서도 솔직히 조금은 아랫배가 찌릿하다. 사실 이 집도 예전에 살던 WG(셰어하우스)의 집주인과 트러블이 생기는 바람에 제이미가 혼자 사는 집에 잠시 얹혀 산다는 게 벌써 몇 년이 흘러버렸다.


당시 집주인은 50대 이혼남이었는데 내가 인터뷰(독일에서는 룸메이트가 되기 위해서도 면접을 봐야 한다.)를 보러 갔을 때만 해도 본인이 같이 사는 건 아니라고 분명히 말했다. 그때 그의 동유럽 여자를 비하하는 듯한 뉘앙스의 청소부 개그가 상당히 거슬렸음에도 불구하고 당장 일주일 뒤에 집을 비워줘야 하는 급박한 상황 때문에 한 귀로 흘려버린 게 잘못이었다. 이사 가는 날 그는 나와 또 다른 새 룸메이트인 20대 초반의 프랑스 여자를 환한 미소로 맞이해줬고 일이 생겨서 당분간 이 집에 함께 지내게 되었다는 소식을 전했다. 그 후 그는 시도 때도 없이 우리의 방문을 두드리며 끊임없는 대화를 시도했고 함께 밥을 먹고 산책을 하자는 등 드디어 그의 외로움을 해소시킬 좋은 방법을 찾은 듯해 보였다. 내가 가장 적응이 안 됐던 건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내 소중한 전기밥솥을 쇠숟가락으로 여기저기 긁어 상처를 내버린 것과 샤워 후 바로 화장실을 청소하는 일이었다. 그는 샤워를 하자마자 1층임에도 불구하고 창문을 90도로 활짝 열고 곧장 욕조를 세제로 깨 끗이 청소하길 원했고 매번 내가 샤워를 할 때마다 확인하며 만족스럽지 않은 듯 잔소리를 해대는 것이다. 학교 가기도 바쁜 아침 시간마다 타월 수건을 머리에 두른 채 창가로 지나가는 사람들과 어색한 인사를 나누며 청소를 해야 하는 건 여간 스트레스가 아니었다.


몇 번의 큰 싸움을 치르고 나서 같은 공간에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상당한 스트레스를 받고 있던 나에게 제이미는 너그럽게도 본인의 집을 내주었다.


돌이켜보면 엄마는 예전부터 입버릇처럼 말했다. 나한테 비싸고 좋은 걸 사줘 봐야 아무 소용없다고, 어차피 내 손에 들어가면 망가지고 엉망이 되어버린다고. 사실 엄마가 옳았다. 이 집에 들어와 살면서부터 난 참 많은 걸 망가트렸으니까. 한번은 샤워를 끝내고 샤워 커튼을 걷으며 한 발을 욕조 밖으로 내미는 순간 그만 물기에 젖어있던 바닥에 넘어질 뻔했다. 순간 번쩍이는 순발력을 발휘해서 붙잡는다는 게 하필 샤워 커튼과 샤워기가 달려있는 거치대였고 그렇게 내 몸 하나는 겨우 건사했지만 양쪽이 다 뽑혀버린 욕조 벽면은 엉망이 돼버렸다. 그리고 얼마가 지난 후 한 가게에서 나무로 만든 근사한 목욕 브러시를 구매했는데 몇 번 사용하다가 실수로 브러시를 떨어뜨리는 바람에 욕조 옆 타일이 깨져버렸다. 바로 수리를 했어야 했는데 귀찮기도 하고 월세집에 굳이 돈을 투자하기 싫어 대충 본드로 붙이고 구멍을 메워버린 지금 욕조의 상태는…. 상상에 맡기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지금 살고 있는 이 집의 욕조와 꽤 정이 들어버렸다. 불그스름한 어둠이 내려앉는 저녁, 내가 좋아하는 바다향 입욕제를 솔솔 뿌려 온통 파랗게 물든 좁은 욕조에 가만히 앉아있으면 평소에는 시간이 없다는 핑계로 하지 못 했던 다양한 생각들을 하게 된다. 그러다 보면 막혀있던 프로젝트의 실마리가 떠오르기도 하고 괜히 마음 한쪽에 찜찜하게 자리 잡고 있던 소심한 걱정들도 스르르 가라앉는 것 같다. 어디서 본건 있어서 와인 한잔을 옆에 뒀다가 두어 번 깨 트리고 난 후부터는 물병 하나만 덩그러니 두고 있지만.


멍하니 물 안에서 손가락으로 톡톡 물방울을 튕기다가 내 손이 거쳐간 잔인한 욕조의 흔적들을 한 바퀴 쓰윽 돌아보면서 미래의 어느 시점에는 가지게 될 거라 믿는 나만의 멋진 욕실을 투닥투닥 만들어 본다.






이 글은 이국과 모국 두 개의 공간을 가진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는 투룸매거진 2월호에 실린 콘텐츠입니다.

https://www.2roommagazin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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