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멍작가 Apr 24. 2021

별거인, 혹은 별거 아닌 취미

네 번째 물건 : 카펫용 요가매트

어쩌다 누군가 취미가 뭐냐고 물어보면 멋쩍을 때가 있다. 내가 취미라고 칭할 정도의 행위라고 하면 사실 이력서의 취미란에 기계처럼 적어내는 네 글자의 단어들, [독서하기, 음악 감상, 영화감상]이 전부였기 때문이다. 물론 구체적으로 파 들어가면 나만의 사사로운 특성을 지니고 있긴 하다. 예컨대 상업적으로 성공하지 못 한 보석 같은 영화를 발견했을 때 괜스레 혼자 뿌듯해하기도 하고 매일 한 두곡씩 쌓아 올린 나만의 음악 리스트를 누군가에게 들려줄 때의 두근거림 그리고 전혀 다른 스타일의 책들을 여러 권 쌓아놓고 몇 페이지씩 돌아가며 조금씩 아껴서 읽는 버릇들이다. 30여 년을 살아왔지만 여전히 '취향'에 대해서 논하라고 하면 조금 작아지기도 한다. ‘취향’이라는 것 자체가 매번 변하는 거라고 대범하게 넘겨버리려고 해도 솔직히 이 나이쯤 되면 뭔가 당당히 나만의 고유한 취향이 생길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직도 오락가락하기만 한다.


지나치게 평범하고 흥미진진하지 않은 이 '취미'에 대한 나의 열등감은 독일에 와서 더 지독해졌는데 그럴 수밖에 없는 게 한국에서는 어쩌다 띄엄띄엄 ‘우와’ 하고 감탄하게 되는 취미를 가진 사람을 만났다면 이 곳에서는 만나는 사람마다 뭐가 이렇게 취미도 제각각이고 또 관심사들은 왜 이렇게 다양한지. 그렇게 타국에서 나만의 취미를 발견하기 위한 긴 여정이 시작되었다.


처음에 시도한 건 핫요가였다. 요가를 잘 하진 못했지만 그래도 한국에서 일할 때 갑자기 몰려온 삶의 의욕 덕분에 점심시간에 끼니까지 거르며 한 달 동안 배운 기초 요가 실력이 있었기에 자신만만하게 핫요가 트라이얼 수업을 참여했다. 하지만 가뜩이나 힘든 동작들에 지치는데 그 안의 공기는 너무 더웠고 뜨거운 걸 유난히 견디지 못하는 난 무의식적으로 끄응 끄응 신음소리를 냈나 보다. 제발 코로 조용히 숨 쉬라는 요가 강사의 말이 몇 번이나 반복되고 나서야 정신을 차렸고 가뜩이나 더워 죽겠는데 일제히 나를 쳐다보는 듯한 사람들의 시선에 얼굴이 터질 것 같았다.


다음은 우연히 TV에서 보고 바로 이거다, 하고 충동적으로 시작한 클라이밍이었다. 다행히 집 근처에 할 수 있는 장소를 찾았고 난 당당히 들어가 10회권을 끊고는 미리 준비해둔 분필가루를 손에 잔뜩 묻히고 가장 쉬운 노란색 돌을 잡고 한 발을 띄었다. 그런데 이게 생각한 것보다 힘들지 않은 거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초록색, 빨간색으로 단계를 올려 올라가다 보니 어느새 맨 꼭대기에 다다랐다. 그런데 지금부터가 문제였다. 별생각 없이 온 힘을 다해서 올라왔더니 이미 기운은 다 빠진 데다 갑자기 돌들은 왜 이렇게 제각각 떨어져 있는지 도저히 다시 내려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 후의 일어난 상황은… 지금 생각해도 정말 끔찍하다. (주르르륵)

그래, 이번엔 마음을 단단히 먹고 마라톤에 도전해보기로 했다. 3개월 후에 열릴 마라톤의 참가비를 결제하고 일단 집 앞을 가볍게 뛰어볼 심산으로 스포츠브라부터 러닝 팬츠와 러닝화까지 갖추고 집 밖을 나왔다. 하지만 학창 시절 체육시간 이후로 진심으로 뛰어본 적이 없는 나의 저질 체력은 1킬로도 채 못 가서 숨이 턱까지 차 올랐고 식도에선 피 맛까지 느껴졌다. 두세 번의 산책 같은 조깅을 하고 나서 결국 결전의 날은 다가왔고 마라톤 출발을 기다리는 수많은 사람들과 함께 서게 되었다.


그러다 2년 전인가 우연히 길에서 롱보드를 타는 여자의 동영상을 보게 되었다. 기다란 보드 위에서 한 마리의 새처럼 사푼사푼 걸으며 춤을 추는 그의 모습에 난 한눈에 매료되고 말았다. 일단 처음 배우는 단계이니까 가장 작은 크루져 보드(사실 가장 저렴했다)를 구매했는데 이게 가장 큰 실수였다. 길이가 짧은 데다 폭도 좁아서 초보자가 다루기 가장 어려운 보드였던 것이다. 어렸을 때는 제법 겁이 없는 성격이었는데 나이가 한 살씩 들면서 그만큼 두려움의 총량도 비례하는 건지 선뜻 이 작은 보드에 올라타는 게 어려웠다. 결국 겁을 잔뜩 먹은 채 몇 번을 꽈당 넘어졌고 그러다 얼떨결에 타는 건 익숙해졌지만 내 상상 속의 모습(여름에 한 손에 아이스크림을 들고 여유 있게 보드를 타고 친구를 만나러 가는)과는 한참 거리가 먼, 누가 봐도 어깨에 잔뜩 힘 이 들어간 채 뒤편으로 달려오는 자전거들이 혼란스러워할 정도의 안정적인 속도로 타는 것이다.


예전부터 제이미는 나에게 말했다. 내가 꿈꾸는 이상적인 나의 이미지와 실제 나의 모습 사이에 괴리감이 너무 크다고. 어쨌든 스페인으로의 여행에 난 굳이 스케이트보드를 들고 가겠다고 우겼고 그렇게 난 허세 가득하게 백팩에 스케이트보드를 매단 채 비행기에 올라탔다. 바르셀로나에 도착해서도 하루 종일 그렇게 묵직하게 보드를 메고만 다니다가 해가 지고 숙소로 돌아갈 즈음에 한적한 길에서 보드를 바닥에 내려놓으며 제이미에게 말했다. 여기에 서서 빨리 사진 한 장만 찍어달라고.


가만 생각해 보면 난 그저 새로운 무언가를 쉼 없이 하고 있다는 사실에 안도했던 것 같다. 지금은 다시금 나의 특별할 것 없는 취미생활로 돌아와 어쩔 땐 소파에 누워서 책을 넘기고 몸이 뻐근하다 싶으면 요가 매트를 펼치고 한참을 밟고 지나다닌다. 있는 힘껏 뛰지는 않지만 자주 익숙한 곳을 걷는다. 가끔 샛길로 빠져 조금 돌아가는 작은 일탈 정도만 하는 익숙함이 난 좋다. 길을 걷다가 팬더믹 때문에 인적이 드문 오피스 건물들을 지나 쨍한 오렌지색 다리를 건너 산길로 들어선다. 다리 아래를 내려다보면 정체 모를 쥐 세 마리와 그들을 숨어서 지켜보는 고양이 조각 상이 있고 보드를 연습하는 아이들도 종종 등장한다. 그러다 영화가 보고 싶은 날엔 정성을 다해 지금의 취향인 영화를 찾아보다 결국 그냥 예능을 틀기도 한다. 작업을 할 때는 백그라운드가 되어줄 적당한 노래를 듣고 술 한잔 하면 흥이 오르는 음악을 선곡하기도 하고 한없이 우울한 노래에 빠져 괜히 센티해지는 것이다.


지금 누군가 나에게 취미가 뭐냐고 물어보면 망설임 없이 대답할 것이다. 별거는 없지만 그 순간 내가 하고 싶은 걸 아무 생각하지 않고, 마음을 다해한다고.



이 글은 모국과 이국 두 개의 공간을 가진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는 투룸매거진 4월호에 실린 에세이입니다.

https://www.2roommagazine.com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