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 후반 처음 스페인 바르셀로나에 발을 디딘 후 지금까지 총 11번의 이사를 했다. 처음 머물게 된 곳은 여자 셋과 함께 사는 셰어하우스였는데 그들 중 포르투갈에서 온 친구 두 명이 함께 가장 작은 방을 쓰고 있었다. 창도 담벼락으로 막혀 있는 방이 답답한지 그들은 점점 거실에 나와 머물기 시작하다 결국 작은 방은 옷가지 등 짐을 보관하는 창고로 사용하고 공동 사용 구역인 거실을 마치 그들의 침실처럼 만들어 버렸다. 그 후 독일로 이사와서도 집을 찾지 못해 한두 달 내놓은 집(Zwischenmiete)에서 잠시 머물기도 했고 공동묘지 바로 옆에 위치한 으스스한 집에 살기도 했으며 룸메이트가 제2의 가족처럼 되어주길 원했던 집주인 아저씨와 전쟁처럼 싸우기도 했다.
최근 이사 온 집은 1층이라 테라스와 크지 않은 정원이 딸려 있는 공간이다. 여태껏 머리로만 상상했던 전원 라이프를 드디어 실현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새로 지은 집이라서 나의 소중한 프라이버시를 지켜줄 울타리 나무들은 여전히 앙상한 나뭇가지일 뿐이고 맞은편에는 한창 공사가 진행 중이었다. 양 옆으로 모래산 두 개가 떡하니 세워져 있고 곳곳에 파이프와 각종 공사 잔재들이 굴러다니는 풍경에서 그나마 위로가 되어 주는 건 우연히 뒤편 공원에서 내려와 흥미진진한 놀이터를 발견한 듯한 토끼와 소심한 옆집 고양이였다.
테라스와 정원은 반투명한 유리 벽을 경계로 이웃과 나눠서 사용하고 있는데 그들은 선천적으로 부지런함을 몸에 탑재한 사람들이었다. 난생처음 ‘잔디’라는 걸 가져본 나로서는 막 이사 왔을 때만 해도 눈앞에 펼쳐져 있는 평원(내 상상 속에서)에 마음껏 취하곤 했다. 그런데 하루하루 시간이 지날수록 잔디는 수확할 시기가 다가온 논밭처럼 황금빛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그에 비해 옆집의 잔디는 이미 준비해놓은 잔디 깎는 기계와 정원용 가위로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일단 우린 도시에서 살았던 사람도 상식적으로 알 만한 ‘비료’라는 걸 사서 뿌려 보기로 했다. 물론 장비는커녕 물뿌리개조차 없어 물컵을 들고 몇 번을 오고 가야 했지만 말이다. 다음으로 닥친 문제는 잡초였는데 사실 난 어차피 뽑을 사람도 없고 그다지 보기 싫은 것도 아니니 우리 정원에 함께 자라도 좋다는 너그러운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인이 말하길 잡초들은 생명력뿐만 아니라 번식력도 굉장히 뛰어나서 결국 소중한 잔디를 죽게 만든다는 거였다. 결국 난 작은 과도를 들고 나와 쭈그리고 앉아서 잡초를 캐기 시작했다. 한껏 구부렸던 허리가 아파오고 따가운 햇빛에 땀으로 온몸이 젖으면서 짜증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뭘 그렇게 멋진 정원을 갖겠다고 이 고생을 하나 싶고 앞으로가 막막하기만 했다. 이외에도 작은 라임 나무에 정체 모를 벌레 떼들이 생겨나고 큰 맘먹고 구입한 화분의 잎들이 쩍쩍 갈라지며, 심지어 처음 갖게 된 내 작업실 벽에 물이 새는 등 숱한 우여곡절이 이어졌다.
지금은 괜찮냐고 묻는다면 나름의 안정을 찾아가고 있다고 하겠다. 예전에 살던 집은 일층에 음식점이 있고 도로 옆에 위치해서 창문을 열고 통화하면 상대방이 지금 밖이냐고 물어보는 게 일상이었다. 하지만 이 집은 블라인드까지 내리면 아무 빛도 소리도 없는 고요한 공간이 되어버린다. 처음엔 이미 시끌벅적한 소음에 익숙해져서 그런지 세상에 혼자 남겨진 듯한 이 느낌이 낯설고 두려웠다. 지금은 느지막이 아침에 일어나 제일 먼저 블라인드를 올리고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 간밤에 깻잎이 얼마나 자랐는지, 잔디가 시들지는 않았는지 여유롭게 둘러본다. 물 뿌리는 호스를 달그락달그락 돌려서 작은 한 바퀴의 물을 주고는 커피를 내려 잔을 들고 의자에 자리 잡고 앉는다. 오도카니 있다 향긋한 민트를 한 두 잎 뜯어 킁킁 냄새를 맡기도 하면서. 여전히 왼쪽에서는 굴착기가 땅을 파고 있고 반대편에는 콘크리트 건물 위에 인부들이 돌을 쌓고 벽을 뚫고 있다. 옆집의 푸르름에 비할 순 없겠지만 다행히 우리 집 잔디도 다시 살아나기 시작했고 라임 나무에 벌레도 말끔히 사라졌다. 한 번씩 나타나는 토끼는 방해받기 싫다는 듯 꼭 뒤돌아서 풀을 뜯다 홀연히 사라지고 겁이 많은 옆집 고양이는 여전히 허리를 내리고 조심조심 왔다가 자그마한 소리에도 쏜살같이 도망간다. 며칠 전에는 집 앞 공원을 산책하다 별안간 풀숲에서 까만 고양이 한 마리가 튀어나와 긴 꼬리로 슬쩍 내 다리를 감싸더니 냐앙 하고 울며 따라오는 게 아닌가. 혹시 이 아이가 주인에게 버려진 집 고양이이고 우리 집까지 계속 따라온다면 운명이라 생각하고 키워야겠다고 생각했다. 꽤 긴 거리를 냐앙 거리며 뒤따라오던 고양이는 이내 허공의 어떤 보이지 않는 물체에 매혹되어 자리 잡고 앉아버렸지만.
큰 걱정이나 고민 없이 마음이 느슨한 상태로 오늘을 마무리하는 것. 요즘은 그게 그냥 행복인 것 같다. 물론 이러다 또 책상에 앉아 머리를 쥐어뜯으며 마감 때문에 안절부절못하겠지만. 하루하루 최선을 다하되 기다란 인생에서는 할 수 있는 만큼 되는 대로 살 수 있다면 더 바랄 게 없겠다. 괜스레 진지하게 삶의 의미를 고찰하려는 찰나에 어김없이 엉덩이를 실룩대며 나타난 토끼는 한참 동안 뒤돌아서 풀을 뜯었다.
#길을 잃은 토끼
#옆집 고양이
#현장 포착
이국과 모국, 두 개의 공간을 가진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는 온라인 매거진, 투룸매거진 8월호에 연재한 에세이입니다. '여행'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를 담은 투룸매거진 9월호는 지금 웹사이트에서 구독하실 수 있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