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이때부터가 시작이었다.
떠나면 벗어나질 줄 알고...
주변에서 나가는 걸 보니 나도 할 수 있을 것 같아서
태어나서 처음 외국을!
아니 두 번째 외국을 유럽으로 떠났다.
자유여행으로...
(첫 번째 외국은 동남아 신혼 패키지였다. 빼고 싶은 기억이지만 어쨌든 갔다 온 거니까 두 번째가 맞다.)
2010년 스마트폰도 없던 시절.
첫 유럽을 혼자 자유여행을 하려고 마음을 먹었다.
80년대 말 자유로운 해외여행이 가능해지고
90년대 동기선후배들이 배낭여행(그때는 진짜 진정한 배낭여행이었지!)을 다녀오는 걸
옆에서 종종 보아 왔지만
나는 용기가 없었다.
용기도 없고 돈도 없었다.
먹고사느라 바빴다.
혼자 여행을 생각했지만
아이가 생긴 후 처음 외국으로 나가려다 보니 중학생 아들이 마음에 걸렸다.
마음을 바꿔먹었다.
같이 가기로...
"이번만이야~~~
이번만 같이 가고 다음부터는 엄마 혼자 다닐 테니 너는 알아서 가자!"
지금처럼 자녀들과 함께 자유여행을 많이 다니던 시절이 아니었다.
아이폰이 뭔가 스마트한 기능이 있다고는 들었지만
그런 건 나의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2G 폰만 가지고
그것도 아들은 휴대폰도 없이 짐을 싸서 유럽으로 떠났다.
그래도 인터넷은 가능한 때이니 지도만 들고 다닐 때보다는 나은 거 아닌가?
.
그보다 더 용기를 낼 수 있었던 건 사실 네덜란드에 지인이 있었기 때문이다.
한국을 떠나 잠시 쾰른을 거쳐 스키폴 공항에서 바로 지인 가족을 만났다.
몇 박만 머물고 남쪽으로 가겠다고 그렇게 얘기를 했건만
로테르담도 굉장히 가까운 거리라고 하두 만류를 해서 민폐란 민폐는 다 끼치며
그 집에서 열흘이나 머물렀다.
(정말로 정말로 그러면 안 되는 일이었다...)
낮에는 아들과 둘이서 여행을 다니다가 저녁때 들어가서 같이 보내곤 했는데
가끔 교외 지역은 같이 나들이를 가기도 하고
그렇게 우리의 여행을 이미 많이 도와주었는데
마지막 남은 주말에 따로 또 시간을 내어준다고 하는 거다.
우리는 그저 목가적인 네덜란드 풍경을 보고 싶었을 뿐인데
내가 건축 쪽 일을 한다고 하니 주말에 건물들을 보여주겠다고!
.
우리가 도착하기 전에 이미
볼만한 건물들을 찾아서 건축답사 루트를 전부 짜놓았더라고...ㅠ.ㅠ
그렇게 시작이 되었다.
...
워낙 먹고살기가 힘들기도 했고
건축에 그닥 재주도 호기심도 없는 열등감 덩어리인지라
어떤 건축가가 최근 유명한지~ 어떤 설계를 하고 있는지~
어떤 좋은 작품이 지어지고 있는지~
잘 알지 못하던 때이다.
(이건 사실 지금도 그닥 나아지지 않았다...)
그들이 나보다 훨씬 더 잘 알아서 일정을 짜놓은 덕분에
나는 생전 처음 해외에서 건축가의 작품이라 할만한 건축물을 보게 되었다.
그렇게 첫 건축물을 보러 갔다.
마침내 책 속의 사진으로만 보았던 건물을 실제로 보게 되었다.
게다가 처음 마주하게 된 건물이 하필 우연찮게 건축잡지에서 인상 깊게 보았던 건물.
(그런 일이 흔치 않은데...)
그 건물이 내 눈앞에 생생하게 서 있는 게 아닌가~~~
이 감정을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요즘 세대들은 이게 무슨 이야기인 건가 싶겠지만
비행기만 타면 쉽사리 아무 데고 갈 수 있는 지금은 이게 무슨 호들갑이냐 싶겠지만
너무나 어렵사리 떠났던 첫 유럽여행에서 첫 건축물을 마주했던 그 순간의 희열감은
정말 생전 처음 느껴보는 감정이었다.
줄곧 건축에 열등생으로만 살았던 나로서는
건축에 이런 감정을 가지게 될지 몰랐던 일이다.
그렇게 벅차오르는 감정을...
정면 쪽을 둘러보며 벅차올랐던 감정을 잠시 진정하며 건물 뒤로 돌아갔을 때였다.
사진으로도 보지 못했던 건물의 뒷면...
헉! 하는 놀라움에 절로 감탄사가 나왔다.
완전히 사로잡히고 말았다.
너무나 이쁘지 아니한가~
나를 단번에 사로잡은 건 엄청나게 화려한 이 컬러감이었다.
원래 유명한 이 건물의 앞모습은...
설계... MVRDV
그렇다. 이 건물은 무려 1997년 MVRDV의 첫 공동주택 설계작품
55세 이상의 노인을 위한 100세대 아파트.
(...라는데 이거 좀 너무하지 않나? 55세가 노인이라니......ㅠ.ㅠ)
100세대를 만들어야 할 건물에 일조권 및 여러 가지 배치 여건상
13세대를 저렇게 철골 트러스 켄틸레버 안에 채워놓은 걸로 유명한 건물.
안정감 있게 튀어나와 있는 켄틸레버의 자유로움은
나의 첫 건물에 대한 설레임과 흥분을 충족시키기에 충분했지만
사실 구조적인 해결이야 뭐 어떻게든 했겠지~ 라는 생각에 호기심이 막 일진 않았었다.
하지만 앞서 밝혔듯이
실제로 보면 더 상콤하고 컬러풀한 발코니들이 쏙쏙 박혀있는 배면의 모습은
그야말로 신선한 충격이었다.
이미 전조증상은 있었다.
암스테르담 주변을 왔다갔다하며 차창 밖으로 보았던 건물들.
빌딩들은 여기저기 잡지에서 툭 튀어나온 듯하고
공장은 파랗기도 하고 보라보라 하기도 하고
주변의 낮은 공동주택들은 아기자기한 색상들이 막 섞여 있고
네덜란드에 세계적인 설계사무소며 건축가들이 있는 건 알았지만
어떻게 이렇게 온 도시가 멋스럽고 디자인스러운지~~~
(덕분에 중학생 아들은 무척 실망을 하고 있었다.
풍차가 돌아가고 튤립이 쫙~ 깔려 있는 그런 모습을 기대하고 왔는데
도시들이 세상 전부 현대적이었으니!
풍차마을의 풍차조차 기계로 돌아가는 걸 보고 무척이나 실망을...)
당시에 네덜란드를 몰라고 너무 몰랐던 것이다.
지인은 이후에도 다음날까지 정말 나는 잘 알지도 못하는 곳으로
차량으로 이리저리 많은 곳을 데려다주었다.
구글지도도 없던 시절이니 어느 동네를 다니고 있는 건지도 모르는 상태로...
ING 사옥
동부 도크랜드(항만지역)
Silodam
Bus station in Spaarne
등등
또
혼자 보러 다녔던...
ZUID역 고층 건물들
NEMO
이전날 다른 도시에서 보았던...
위트레흐트 대학 건물들
슈뢰더 하우스
로테르담의 큐브하우스
룩소르 극장
등등
처음 본 네덜란드의 건물들은 정말로 다채로웠다.
좋다 나쁘다를 떠나서 과감한 컬러감에 적잖이 놀랐다.
.
그렇게 첫 유럽여행에서 첫 건물을 마주하며 가졌던 희열감은
이후 불행인 건지 다행인 건지
건축을 계속 하면서도 무덤덤했던 나를 새로운 바닥으로 이끌었다.
그 나이에 갑자기 설계를 잘 하고 싶었던 건 아니다.
건물을 보며 뭔가를 배우고 싶었던 것도 아니다.
단지 그때의 그 감정을 또 느끼고 싶었다.
그렇게 나는 자주 짐을 싸기 시작했고
힘든 사정에도 매달 조금씩 적금을 들기 시작했고
어딘가로 가면 가본 김에 볼 수 있는 건물들을 찾아냈다.
떠나면 모든 게 잊혀질 줄 알고 떠났던 여행은
새로운 여행을 계속 낳았다.
잊고 싶었던 건 따로 잊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