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할 수 없는 여자들], 최성은
(북 저널리즘에서 나오는 콘텐츠가 마음에 든다. 특히 디지털과 아날로그를 둘 다 선보이는 컨셉이 좋다. 종이책의 판형도 들고 다니기 쉽게 디자인되었다. 한국사회의 약점인 깊이 있는 담론의 부재를 잘 메워 줄 훌륭한 포맷이라고 생각.)
저자 자신의 개인적 경험에서 나오는 뚜렷한 문제의식을, 충실한 연구결과와 reference들로 풀어내는 좋은 책이다. 책 뒤표지에 쓰여 있는 이 책의 문제의식:
고학력 여성이 노동 시장에 진입하지 못하고 있다. 기업 입장에서 여성은 투자 대상이 아니다. 여성에게는 학력 프리미엄도 작용하지 않는다. 결혼과 임신, 출산과 양육은 일하려는 여성에게 심각한 약점이다. 남성들의 사회에서 일하는 여성은 결국 직장을 떠나 고학력 전업주부가 되거나, 어떻게든 살아남아 독한 여자로 불리는 수밖에 없다. 여성에게 평등한 경쟁은 환상이다. [뒤표지]
유리천장, 경단녀, 초저출산 사회..... 한국의 여성노동과 관련한 이슈는 몇 년째 지속적으로 제기되고 있고, 정부도 여러 정책을 통해 노력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나, 해결은 요원하다. 어디서부터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까?
[나는 아기 캐리어가 아닙니다]와 이 책을 연속해서 읽은 소감: 한국의 여성노동자는 임신-출산-양육의 과정에서 유무형의 수많은 차별을 당한다. 이 과정을 거치면서 커리어를 이어나가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고 느껴질 정도. 그리고 살아남은 여성노동자에게 주어지는 '독한 여자'라는 수식어까지. 총체적 난국이다.
상식적으로는 여성의 학력이 높아지고 사회 진출이 활발해지면 부모 대신 아이를 돌봐주는 베이비시터 등 가사 노동의 외주화 규모가 커져야 한다. 그러나 한국은 공공 보육 서비스가 취약한 나라인데도 다른 국가에 비해 가사 노동 시장의 규모가 작다. [52]
나에게 육아 휴직은 우선순위가 아니다. 월급 전부를 아이를 돌보는 비용으로 쓰더라도 내 책상에서 일을 하고 싶다. [66]
더 근본적인 문제는 아이는 여성이 돌봐야 한다는 모성에 대한 막연한 기대다..... 미국의 경우 직장인 여성이 고용할 수 있는 베이비시터, 가사도우미 등의 집안일 외주화 시장이 충분히 형성돼 있다. 고연봉자가 아니더라도 시장에서 합리적인 가격에 서비스를 구매해 이용할 수 있다. [78]
이 전근대적 문화. 미국에서는 아기가 3개월만 되어도 데이케어를 보내기 시작한다. 그렇다고 욕하는 이웃도 없다.
[나는 아기 캐리어가 아닙니다]에서, 저자는 임신한 후 심한 입덧으로 고생하느라 많은 일을 하지 못한다. 서러운 것은, 이 때문에 직장 상사와 동료들의 따가운 눈총이 쏟아지는 장면. 한국사회가 임신한 여성을 이렇게 차별할 줄이야. 더 놀라운 것은, 그런 저자를 도와주느라 야근을 하지 않는 남편이, 이로 인해 승진 심사에서 누락되었다는 사실이다. 한국의 과로 문화의 단면을 보여준다.
노동시간을 전폭적으로 줄이면, 한국사회의 많은 문제점이 해소될 것이다.
장시간 노동은 한국 여성의 일과 가정 양립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장시간 근무는 충성심의 지표로 간주되어 근무 평가에 반영된다..... 한국 사회의 장시간 근로 문화는 노동 시간과 보육 시스템의 불균형을 초래한다. [43]
노동시간이 만악의 근원인 것은 많은 사람들이 느끼는 바다. 그런데, 한국 과로 문화에 관한 글을 읽을 때마다 드는 질문:
한국의 노동시간은 왜 이리도 긴 것인가.
왜 한국의 노동생산성은 이리도 낮은 것인가. 왜 한국은 미국-유럽처럼 한 달짜리 휴가를 가면 그 팀이 마비되는가. 이에 대한 체계적 연구를 읽어보고 싶다.
하지만 우선 비관적인 결론: 한국은 미국이나 스웨덴이 되기 힘들다. 바로 path-dependence 때문이다.
생산 레짐을 연구하는 한국 학자들은 한국의 발전주의 국가 전략에 주목했다. 한국은 정부가 금융, 기업과 긴밀하게 상호 작용하되 노동 부문을 배제하고 억압하며 발전한 나라다. 한국의 복지 체제는 스웨덴처럼 노사 간의 힘의 균형을 통해 상호 보완을 이루며 정착된 것이 아니다. 복지 정책은 권위주의 국가의 정치적 정당성을 확보하고, 산업화를 이룩하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보완 기제였다. [24]
국가 복지가 최소 비용을 지향하는 것과 달리 기업복지는 상대적으로 발전했다. 노사의 자율적인 협상을 통해 기업 복지가 발전한 영미 자유주의 유형과도 다른 형태다. [26]
한국의 path은 스웨덴과는 정반대이기 때문에, 스웨덴의 모델을 도입하는 것은 무리이다. 노동자들의 bargaining power가 스웨덴만큼 올라갈 수 있을까, 좀 회의적이다.
한국의 기업복지는 미국의 의료보험과 비슷한 점이 있기는 하다. 그런데 한국은 미국과도 조금 다르다. 미국의 시장중심주의는 굉장히 유연한 노동시장을 만들어내었고, 유연한 노동시장 안에서는 (고학력층) 남녀 간의 불평등이 덜 한 편이다. 또한, 고소득자의 수입이 양육비용을 감당할 수 있을 정도로 높아서, 여성들이 커리어에 올인할 수 있는 옵션이 주어진다.
다만, 스웨덴의 이 정책은 한국에서도 바로 써먹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위적으로 남성과 여성이 동등한 조건을 만드는 것.
1995년에 스웨덴 의회는 양도가 불가능한 한 달간의 부모 휴가를 도입하기에 이른다. 아버지가 아니면 활용할 수 없게 규정된 육아 휴직은 ‘부친 쿼터’로 불리며 2002년에는 2개월로 늘어났다. [85-86]
경제논리가 뒷받침되지 않으면, 정부 정책의 실효성은 급격히 감소한다.
> 그런데 여성은 고용 보호 제도가 강력할수록 오히려 투자를 받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국가에서 여성의 고용을 강력하게 보호할수록, 기업은 여성이 이탈할 경우 더 큰 손실을 부담하게 된다. 결국 여성을 뽑지 않는 방식으로 대응하게 된다. [16]
그런데, 여성노동에는 이미 뚜렷한 경제논리가 있었다! 조직 내의 다양성이 높으면 생산성이 높아진다는 연구결과가 많이 나와 있다. 미국은 이미 그 사실을 인식해서, “시장의 힘에 의해” 여성 노동환경이 크게 개선되었다. 한국에서도 비슷한 연구결과가 이미 존재한다.
> [미국에서] 1990년대 중반부터는 기업가 사이에서 2000년대가 되면 고급 인력이 부족해질 것이라는 위기감이 확산됐다. 미래의 노동위기에 대처하는 최선의 방법은 다양성 경영 전략이었다..... 여성고용을 선도한 기업들이 경제적 이윤을 창출하면서 여성 고용은 더 확대됐다. 중요한 것은 기업의 여성 지원 정책이 소수자 혹은 약자 집단을 지원하는 문제가 아니라, 전체 기업의 인력 개발 관점에서 논의됐다는 점이다. [70]
> [한국 여성 정책 연구원의 2009-2013년 조사에 의하면] 5년 동안 여성 관리자 비율이 증가한 기업이 감소한 기업보다 자기자본이익률(ROI) 평균이 2배 이상 높았다는 것이다. 또 여성 임원이 한 사람이라도 있는 기업이 전혀 없는 기업보다 매출액과 수익률 평균이 더 높았다. 여성 인력의 확대는 기업과 사회 전체의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서라도 시금한 과제다. [73]
그렇다면 왜 한국 기업들은 위의 연구결과에도 불구하고 여성고용을 장려하지 않는 것일까. 첫째, 시장 경쟁이 치열하지 않아서, 생산성이 낮아도 생존할 수 있다. 둘째, 조직 내의 기득권이 이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을 꺼려한다. 셋째, 회사들이 이 연구결과를 알지 못한다.
내가 추측하는 또 하나의 가설은, 여성고용을 불평등 해소&인권보호의 차원에서만 보는 시각일 것이다. 실제로 진보진영에서 여성고용운동을 펼칠 때, 약자의 시각으로만 보았던 부분이 존재. 약자의 인권도 물론 중요하나, 시장이 자발적으로 움직일 때 정책의 효과는 배가된다. 시장을 움직이는 담론이 필요한 시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