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율과 금리로 보는 3년 경제전쟁의 미래], 오건영
통화정책에 대한 좋은 입문서. 1980년대부터 현재까지 일본 (버블폭락), 한국 (IMF), 유럽 (재정위기), 중국 (부채위기), 미국 (2008년 금융위기) 등의 사건을 환율과 금리 두 개의 키워드로 읽어나간다. “환율과 금리의 현대사”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다.
중앙은행의 기본적 역할은 경제가 (1) 레버리지-인플레이션의 고리 혹은 (2) 디레버리지-디플레이션의 고리에 빠지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경제를 움직이는 것은 신용이다. 그런데 신용의 고약한 특징이 바로 사이클에 빠지기 쉽다는 것이다. 버블의 경우를 들어보자.
자산가격이 상승한다 -> 지금 사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으니 사람들이 돈을 빌린다 -> 돈을 빌려서 자산을 산다 -> 수요가 증가한다 -> 자산가격이 상승한다.
이렇게 부채와 자산가격이 동시에 증가하면, 소비가 실물경제의 성장률보다 더 많이 성장한다.
중양은행의 기본적 목표는 신용의 흐름을 조절하여 경제가 실제 생산량과 크게 어긋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왜? 하이퍼인플레이션 혹은 디플레이션은 결과적으로 실물경제를 망가뜨리기 때문. 신용이 확장하려고 하면 (버블의 기미가 보이면) 금리를 높여서 돈을 빌리기 힘들게 만들고, 신용이 거꾸로 축소하려고 하면 금리를 낮춰서 돈 빌리기 쉽게 만든다.
일본의 경우가 중앙은행의 대표적인 실패사례이다. 너무나 명백한 반면교사라서 이 책에서도 1장에서 가장 먼저 설명하는 것이 아닐까 한다. 90년대 초, 일본 자산가격의 거품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 일본은행은 (아마도 더 큰 버블을 방지하기 위해서) 높은 금리 수준을 오랫동안 유지했다. 문제는 버블이 터지기 시작하고 디레버리지가 발생한 이후에도 계속 높은 금리를 유지하고 있었다는 것. 이러자 거꾸로 “신용축소” 고리가 작동하기 시작했다.
자산가격이 하락한다 -> 사람들이 지출을 줄이고 빚을 갚는다 -> 실물수요가 하락한다. 또한 자산을 기다렸다가 사야겠다는 심리가 커져서 자산수요가 하락한다 -> 자산가격이 하락한다.
> 일본 중앙은행이 빠르게 금리를 인상하던 당시 일본의 주식 시장은 매우 빠른 속도로 붕괴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일본 중앙은행은 이런 상황이 벌어졌음에도 경기부양이나 자산 가격 방어를 위한 완화적 통화 정책을 별달리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마이웨이로 6%까지 기준금리 인상을 강행했죠. 부채가 많은 상황에서 벌어진 자산 가격의 폭락, 이는 소비 심리를 극도로 위축시키면서 일본 경제에 상당한 내상을 입히기에 이릅니다. 그리고 이 내상이 신속히 치료되지 않고 만성화되자 디플레이션이 장기화되었고요 (일본편 2)
현재 일본의 상황은 90대 초에 시작한 이 디플레이션 고리가 끊어지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아베 정권이 과감한 확장정책으로 상황을 조금 완화시키기는 했다). 통화정책이야말로 “호미로 막을 구멍을 가래로 막는다”는 격언이 정확하게 들어맞는다. 버블이든, 디레버리지이든, 사이클 형성의 초기에 빨리 흐름을 바꾸지 않으면 나중에는 막대한 비용을 초래하게 된다.
중앙은행이 해야 할 일은 이미 간단하지 않다. 그런데 여기에 중앙은행의 손발을 묶어버리는 강력한 변수가 등장한다. 바로 환율이다.
이 책에서 얘기하듯이 금리와 환율은 모두 돈의 가격이다. 금리가 대내적인 돈의 가격이라면, 환율은 대외적인 돈의 가격이다. 그런데 이 대외적인 돈의 가격 역시 국내 실물경제에 큰 영향을 미친다. 내가 이해한 고리는 크게 두 가지이다.
1. 수출과 수입의 가격을 결정: 자국의 환율이 강해지면, 수출가격이 상승하고 수입가격이 하락한다. 국민들에게는 단기적으로 효용이 증가하지만 수출경쟁력이 약해지니 생산이 하락한다. 환율약세의 경우는 정반대.
2. 해외자본의 유입과 유출을 결정: 자국의 환율이 약해지면 (앞으로 더 약해질 것이란 예측을 하기 시작하면), 해외자본이 유출하기 시작한다. 자국통화에 대한 공급이 늘어나니, 환율은 더 약해진다. 해외자본의 움직임 역시 위의 신용과 마찬가지로 사이클을 타기가 쉽다.
변수가 하나에서 수십 개로 늘어난다. 국내신용의 사이클, 해외자본 유출의 사이클, 수출경쟁력 (특히 다른 나라와 비교하여) 의 변동을 종합적으로 고려해야 한다. 그런데 중앙은행의 수단은 “기준금리” 하나뿐이다. (확장정 재정정책은 조금 다르긴 하지만, 같은 dimension에 있으니). 이 책을 읽어보면, 미국을 제외한 나라의 실물경제에는 금리보다 환율이 더 큰 영향을 주는 듯 보인다. 오로지 미국만이 다른 나라를 별로 고려하지 않고 금리를 조절할 수 있는 듯 보인다.
> [국제금융이론의] ‘불가능한 삼위일체 (impossible trinity)란 국제통화를 쓰지 않는 한 어떠한 국가도 ‘자유로운 자본 이동’, ‘독립적인 통화정책’, ‘안정적인 환율 (고정환율)’의 세 가지를 모두 택할 수는 없다는 이론입니다. (중국편 2)
“국제통화를 쓰는 국가”는 2차 세계 대전 후 지금까지 미국 하나 뿐이다. 이 책의 모든 에피소드에서 코앞에 닥친 위기를 극복하려는 국가들은 자국통화와 달러와의 관계를 고려하느라 추가적인 어려움을 겪는다.
또 중요한 제약조건은, 한 나라의 통화정책이 다른 나라의 경제상황 뿐 아니라, 더 나아가서 외교-정치 관계에도 영향을 받는다는 점이다. 다시 일본의 경우로 되돌아 가보자. 방금 일본은행이 버블이 터지는 과정을 방치했다고 했는데, 그러면 버블은 처음에 왜 생긴 것일까? 바로 미국의 정치적 압력 때문이다.
> 많은 논란이 있지만 일본 경제를 버블로 이끈 원인으로 1985년 9월에 있었던 플라자 합의(Plaza accord)를 꼽는 데는 큰 반론이 없을 듯 합니다. 그리고 플라자 합의만큼의 유명세(?)는 아니지만 1987년 2월의 루브르 합의(Louvre accord) 역시 중요하죠. 플라자 합의는 환율 변동이 마켓에 미치는 영향을, 루브르 합의는 금리 변동이 마켓에 미치는 영향을 극적으로 보여준 중요한 분기점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일본편 1)
“엔화 환율이 너무 낮으니 미국 차가 안 팔린다. 엔화를 세게 만들자”가 플라자 합의의 핵심이다. 플라자 합의 이후 엔-달러 환율은 딱 두 배 정도 상승한다. 일본 기업들의 수출 경쟁력이 절반으로 하락한 셈이다. 이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대미수츨흑자가 줄어들지 않자 미국은 이번에는 “일본 내수경제를 부양”시키라고 요구하고, 일본은 이를 받아들인다. 루브르 합의이다. 일본은 이 이후 기준금리를 내리고, 부동산담보대출규제도 완화한다. 일본 소비자들에게는 환상적인 시간이었을 것이다. (유가를 포함한!) 수입품 물가는 한순간에 절반으로 싸지고, 돈을 비려서 집 사기는 쉬워지고. 당연히 자산가격이 상승하기 시작한다. 버블의 시작이었다. (1980년대 후반 당시 일본의 LTV는 120%에 달했다고 한다. 지금으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정책인듯)
자연스럽게 드는 질문. 왜 일본은 플라자-루브르 합의에서 미국의 요구를 다 들어준 것일까? 내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미국의 bargaining power가 강했는가? 아니면 일본이 환율-금리 조정의 후폭풍을 너무 간과한 것은 아닌가? 좀 더 알아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