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담잡설(茶談雜說): 차 마시다 떠오른 별별 생각
마신 차: 무심헌 보이숙차. 3g, 99도, 50s-30s-50s
"이태원 클라쓰"를 몇 편 보았다. 드라마의 결말을 기다리기에는 감질이 나서 웹툰 줄거리를 찾아보았다. 14년 이상 차곡차곡 쌓아 올려가는 착한 복수극이다. 복수만큼 달콤한 것이 있을까? 일찍이 소련의 스탈린 동무는 "세상에서 맛볼 수 있는 가장 큰 기쁨은, 세심하게 준비를 하여 적에게 무자비한 한 방을 먹여 복수의 갈증을 충족시킨 뒤 집에 가서 자는 거야"라고 했었다.
반드시 복수하겠어
복수라고 하면 거부감을 갖는 사람들이 많다. 대부분 종교에서는 복수하지 말고 용서하라고 가르친다. 모두가 "눈에는 눈, 이에는 이"식의 복수를 한다고 나설 때의 사회적 혼란을 막기 위한 가르침이 아닐는지. 용서를 하고 화해를 할 때보다 죄지은 사람을 응징할 때 우리 뇌는 더 큰 쾌감을 느낀다. 이 쾌감을 굳이 포기할 필요가 있을까. 그리고 "이태원 클라쓰"에서 처럼 착한 복수라면 우리 삶의 동력이 될 수도 있다.
복수극 가운데 최고는 아무래도 박찬욱 감독의 "올드 보이"다. 이우진(유지태)은 완벽한 복수를 위해 오대수(최민식)를 15년씩이나 감금을 하고, 철저하게 상황을 조작하여 자기가 받았던 모욕감을 오대수가 그대로 느낄 수 있게 되갚아 준다. 복수를 마무리하고 우진이 엘리베이터에서 자살을 한 것은 복수를 마친 뒤에 밀려온 허탈감 때문이라기보다는 복수를 완성한 순간의 쾌감을 영원히 간직하기 위함이었을 거다.
넌 나에게 모욕감을 줬어
나의 삶의 동력이 될 수 있는 복수를 꿈꾼다. 나에게 모욕감을 선사한 사람뿐만 아니라, 사회 제도에 대해서도 통쾌한 복수를 하고 싶다. 그때그때 받아치는 복수 말고 "올드 보이," "이태원 클라쓰"에서 처럼 오랜 시간 공을 들여서 내가 당한 모욕감의 몇 배를 되돌려 주는 것이 더 짜릿하다. "이태원 클라쓰"와 같이 법의 테두리 안에서 완벽한 복수를 설계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어쩌면 "올드 보이"류의 유혈 낭자한 복수가 더 쉬운 것일 수도 있다. 그래도 한 번하고 내 인행을 때려치울 정도의 가치가 있는 복수는 거의 없으므로, 합법적인 복수의 방법을 항상 궁리한다.
어두운 방에서 장대한 복수의 계획을 설계하며 킬킬 거리는 나의 모습을 발견하면 섬뜩하기도 하다. 그러나 그 설계와 실행 과정은 언제나 즐겁고 에너지가 충만하다. 복수 대상의 인생을 탈탈 털어버려 피눈물을 쏟게 만들 것을 생각하면 머리 뒤쪽으로 뻣뻣함이 느껴질 정도도 흥분된다. 정말이지 쓰러진 나를 일으켜 세우는 힘이다. 예전에는 하이드씨와 같은 이런 모습이 끔찍하다고 생각했었으나 이제는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인다.
목표가 확고한 사람의 성장은 무서운 법이야
복수에 쏟는 에너지를 다른 생산적인 방향으로 돌려보라는 충고를 많이 한다. 좋은 말이다. 나는 이것을 비틀어서 "생산적인 방식으로 복수를 실천하라"라고 충고하고 싶다. 복수를 향한 극한 에너지가 자기 파괴로 흐르지 않고 나 자신이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줄 수도 있다. "이태원 클라쓰"의 박새로이가 이 과정을 잘 보여줬다.
복수에는 위험이 따른다. 내가 잡은 칼이 나도 찌를 수 있다. 그래도 그 과정과 실행에서 오는 쾌감이 보상을 해주리라. 혹시 내가 또는 당신이 이렇게 깊숙이 들어오는 복수를 당한다면? 모든 것이 카르마라고 생각하고 체념하자. 몇 년을 작정하고 들어오는 칼은 막을 수 없다.
누구냐, 너...
애당초 적을 만들지 말아야 한다. 진심으로 사람을 대하고 나의 잘못에 대해 사과를 해야 한다. 그렇게 못하겠다면 당신이 눈물을 쏟게 만든 사람을, 당신에게 원한을 품은 사람을 꼭 기억해두자. 적어도 나중에 복수를 당할 때 내가 왜 당하는지는 알고 당하는 게 덜 아플 테니까. "올드 보이" 오대수는 아무것도 모르고 15년간 군만두만 먹으며 갇혀 있지 않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