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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몽원다인 Jul 19. 2020

바다부터 계곡까지

다담잡설(茶談雜說): 차 마시다 떠오른 별별 생각

언제는 안 그랬냐마는 특별히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다. 큰 잘못을 저질러서 주변의 여러 사람들을 힘들게 하고 있다. 죄송한 마음뿐이다. 작가가 평소에 온실의 화초처럼 심약해 보였는지 오히려 걱정을 많이 해주어서 고마운 마음이다. 신기하게도 좌절의 순간마다 기적의 동아줄 같은 지인들의 연락이 있어서 그 줄을 잡으며 연명하고 있다. 


기분전환을 할 겸, 하루 휴가를 내고 배를 타러 갔다. 모질게 몸을 혹사해서 잡념을 떨쳐내고 죄송스러운 마음의 빚을 갚고 싶었다. 평소 꼭 탐험해 보고 싶었던 긴 물길을 찾아 나섰다. 강이 바다를 만나는 지점에서 시작해서 강을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 한계까지 노를 저어 가기로 했다. 


아침 출근 시간 교통체증을 뚫고 휴가를 가는 야릇한 기분. '너희는 일해라 나는 놀게, ' 묘한 우월감이랄까? 평일 강변에는 사람이 없어 좋았다. 마침 바람도 별로 안 불고, 햇빛은 뜨거웠지만 장마철 중간에 만날 수 있는 보석 같은 날씨였다.


서둘러 카누를 조립해서 띄웠다. 짐은 최대한 가볍게. 점심으로 에너지바 2개와 콜라 1캔, 그리고 물 1리터를 챙겼다. 강 한가운데로 서서히 노를 저어 나오니 갑자기 마음이 가라앉는다. 마침 만조 후 물이 빠지는 시간이라 배가 하류로 밀린다. '돈몰*?' 이대로 노를 던져 버리고 강물에 몸을 맡겨, 먼바다로 흘러가 버릴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바다로 흘러가 사라져 버리면 모든 것이 편안해지지 않을까?'


[*돈몰: 김훈의 판타지 소설 "달 너머로 달리는 말"에 나오는 고려장과 유사한 풍습. "새벽에 늙은이들이 강물을 따라 사라지는 풍속"]


복잡한 마음에 잠시 하류 먼바다 쪽을 멍하니 바라보며 잠시 표류하다가 상류로 뱃머리를 돌려 노를 젓기 시작했다. 목적지까지는 물길로 약 8km. 3시간 정도 쉬지 않고 노를 저어야 도달할 수 있는 거리다. 


물 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물오리, 백로, 왜가리, 가마우지 등 물새만 가끔 퍼덕거릴 뿐. 나 혼자만 물과 하늘이 맞닿은 점을 찍으며 나아갔다. 구름이 끼어서 햇빛이 덜 따가웠다. 햇빛이 강하게 내리쬐더라도, 물 위에서는 피할 방법이 없다. 가끔 강 한가운데서 휴식을 취할라 치면 우산을 펴고 좁은 그늘에 몸을 구겨 넣어야 한다. 


별 얘기 없이 갑자기 휴가를 내버려서 그랬는지 여기저기서 안부 전화가 걸려 왔다. 반가운 마음에 받기는 하지만, 전화 통화를 하느라 노젓기를 멈추면 10m고 20m고 죽죽 밀려 가버리는 걸 아실는지... 그 정도 거리를 다시 따라잡는 건 안부를 묻고 걱정해 주는 고마운 마음에 비하면 아무 수고도 아니기는 하다. 


계속 노를 저었다. 상념을 잊으려 젓고 또 저었더니 이제는 무슨 기계가 되어 버린 듯했다. 아무 생각 없이 앞으로, 앞으로만 갔다. 2시간 정도 지났을 때 중간 목적지인 수변공원에 닿았다. 접안 시설은 없지만 작은 카누라서 어디든 정박하고 내릴 수 있어 좋다. 잠깐 내려 바위에 배를 묶고 화장실도 들르고, 에너지바와 콜라를 먹었다. 가볍게 스트레칭을 하고 배에 올라 다시 젓기 시작했다. 가끔 강변에서 자전거 타는 분들이 자전거를 세우고 빤히 쳐다보다 손을 흔들었다. 


상류로 올라갈수록 수심이 급격하게 얕아졌다. 어느 다리 밑을 지날 때는 암초에 카누 바닥이 살짝 스치기도 했다. 배 주변으로 고기가 자주 뛰었다. 숭어가 제일 많았고, 가끔 잉어도 육중한 몸으로 뛰어올랐다가 떨어져서 깜짝 놀라게 만들었다. 혼자 떠난 여정을 심심치 않게 만들어 줘서 고마웠다. 


3시간쯤 배를 저어서 드디어 목적지인 수중보에 도달했다. 콘크리트로 만든 수중보는 아니고 자갈을 쌓아 놓은 수중보였다. 여기서 배를 돌릴까 하다가 보가 크지 않아서 배를 끌어서 타고 넘을 수 있어 보였다. 카누의 장점이랄까, 육상 이동이 간편하다. 내리려는 쪽 방향에 패들을 지팡이처럼 짚고 조심스럽게 발을 물속으로 내디뎠다. 물이 제법 차갑고 바닥에 이끼가 끼어서 미끄러웠다. 예전에 한 번 멋모르고 발을 불쑥 내디뎠다가 모래 수렁에 발이 쑥 빠져 버리는 아찔한 경험을 한 적이 있다. 카누를 들고 끌어서 폭이 2m 정도 되는 수중보를 넘었다. 


약간 망설이다 보를 넘어왔는데 보 너머에는 바다와 접한 강의 풍경 같지 않은 아기자기하고 아름다운 내륙 수로가 펼쳐졌다. 버스를 타고 이 부근을 지나갈 때마다 꼭 한 번 탐험해 보고 싶은 수로였는데 직접 와서 노를 저어 보니, 더 환상적이었다(타이틀 사진). 작은 섬과 섬 사이로 조용히 노를 저으면서 우리나라 같지 않은(개인적으로 이 표현을 쓰기 싫어하지만, 이게 가장 분위기를 정확하게 전달하는 표현이다) 이국적인 풍경을 만끽할 수 있었다. 협소한 수로를 따라 들어가니 마치 비밀의 정원 같은 웅덩이가 나왔고, 갑작스러운 카누의 등장에 질겁한 물고기들이 사방에서 튀어 올랐다. 


물가의 이쪽저쪽을 넋 놓고 구경하며 30분여를 더 노 저어 올라가니 이번에는 정말 육중한 콘크리트 수중보가 나왔다. 오늘의 탐사는 여기까지. 수중보도 수중보지만, 건너편으로는 수심이 얕아서 카누로도 항행이 어려워 보였다. "바다부터 계곡까지" 자력으로 노를 저어 올라가 보는 것이 목표였는데 카누로 더 이상 이동할 수 없는 곳까지 왔으니 목표는 달성한 셈이다. 


이제 왔던 길을 되돌아서 귀항해야 한다. 마침 구름이 걷히고 오후의 햇빛이 내려 쬐기 시작한다. 모자, 선글라스에 선블락까지 꼼꼼히 쓰고 발랐지만 물 위에서는 꼼짝없이 햇빛에 요리가 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더 힘들게시리 역풍이 불기 시작했다. 이건 완전히 예상과 다른 상황이었다. 상류로 거슬러 오르면서 대부분의 체력을 쓰고 하류로 내려갈 때는 물살을 타고 편하게 내려간다는 것이 원래 계획이었다. 카누는 바람에 매우 취약하다. 바람이 거세면 조향이 거의 불가능할 정도다. 이미 손에는 물집이 잡히기 시작했는데, 역풍에 맞서려면 노를 두 배, 세 배는 더 힘 있게 저어야 한다. 


노를 저을 때 반드시 명심해야 하는 점은 팔 근육이 아니라 등과 허리 같은 큰 근육을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팔만 써서 노를 저으면 금방 피로해지고 멀리 갈 수 없다. 나름 단련해온 등근육을 써서 노를 저었음에도 이미 팔은 너덜너덜했다. 복귀를 위해 3시간 넘게 노를 저어야 하는데 맞바람과의 싸움이 걱정이었다. 


맞바람과의 싸움. 마치 지금 나 자신의 처지처럼 느껴졌다. 앞으로 나아가기가 무척 어려운, 그런. '여기서 모든 걸 내려놓아 버릴까?' '배도 버리고 나 자신도 버리고, 바람 속으로 물 속으로 사라져 버릴까...' 가족과 친구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만신창이가 되어버린 내 모습이지만, 그래도 그들에게는 의미가 있는, 소중한 무엇이지 않을까?' 


정말 포기하고 싶은 순간에 하류의 목적지가 보이기 시작했다. 그래도 1시간 넘게 배를 저어야 하지만, 뭔가 가시적인 목표가 있다는 것은 영혼과 몸에 힘을 불어넣어 준다. 잠시 했던 약해 빠진 생각은 접고, 해가 떨어지기 전에 복귀해야겠다는 일념만으로 젓고 또 저었다.  


상류로 올라올 때와 달리 하류로 내려갈 때는 힘들고 마음이 급해서 주변 풍경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어떻게든 안전하게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뿐. 그렇게 총 7시간 이상 노를 저어서 "바다부터 계곡까지"의 여정을 마쳤다. 경험한 중에 최장시간 노를 저은 것인데, 3시간 이상은 무리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노출된 피부는 까맣게 타버리고, 손가락에는 물집이 잡혔다. 온몸의 근육이 후들거려서 차에 카누를 옮겨 싣는데 고생을 하였다. 집으로 출발하기 위해 차 시동을 거는 순간, 마침내 기진맥진하면서도 무언가를 내 힘으로 이뤄냈다는 성취감이 모든 안 좋은 기분을 씻어 버릴 정도로 샘솟았다.


최근 들어 너무 힘이 들어서 나쁜 생각까지도 했었는데, 그렇게 흘려버리기에 인생이란 강물 위에서 만나는 풍경과 모든 순간이 너무 아름답다. '너는 강을 거슬러 올라갈 자격이 없어'라고 욕을 먹더라도, 기를 쓰고 상류의 끝, 수원지까지 가봐야 하지 않겠나. 거센 역풍과 물살에 배가 죽죽 밀려 나가더라도 조금 돌아가는 셈 치고 계속 노를 저어 보는 거다. 


누구는 인생의 역풍을 만날 때 이른 돈몰로써 모든 것을 쉽게 정리한다. 그러나 굳건히 자신의 힘으로 역풍과 물살에 맞서면서 돈몰의 반대 방향인 상류로 배를 저어 가야겠다. 그렇게 바다부터 계곡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만나는 물가의 모든 아름다운 순간, 순간을 모조리 만끽하고 몸의 힘이 빠지는 날 아주 자연스럽게 먼바다로 흘러갈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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