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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니카 Apr 03. 2021

[서툰자서전] 단순한 시작

제 1장 / 단순한 시작.


남미에 가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아마도 중학생일 때였던 것 같다. 잉카문명에 관한 책을 뒤적거리다 우연히 마주한 페루 마추픽추의 전경이 가득 찬 두 페이지가 시작이었다. 산꼭대기의 이국적인 마을은 신비스러움 자체였고, 그런 유적지가 있는 나라는 특별한 무언가가 존재할 것이라고 믿으며 아주 단순한 호기심만으로 남미에 대한 막연한 환상을 마음 한 켠에 담아두었다.

평소 외국어에 관심이 많았던 나는 고등학생이 되어 진로에 대해 결정할 시기가 되자, 다시금 남미를 떠올렸고, 내 돈 안 들이고 그럴 듯한 이유로 남미를 경험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일까 생각했다. 그래서 포르투갈어를 전공하기로 했다. 사실 남미에서 브라질 이 외의 국가는 모두 스페인어를 사용하지만 스페인어과는 합격 컷이 높았기에 안전하게(?) 포르투갈어로 우회하는 방법을 택했다.

그렇게 대학교에 진학 후, 브라질과 포르투갈에서 어학연수를 마치고 갓 돌아온 선배들의 자랑 + 경험담을 들으며 남미에 대한 꿈을 키워나갔었다. 3학년이 되자 대부분의 동기들이 당연하다는 듯이 브라질행 티켓을 끊고 살 집을 알아보기 시작했고, 나도 그 중 하나였다. 사실 브라질에 대한 기대와 두려움보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두고 떠나는 것에 대한 슬픔이 너무나도 커 타지에서의 생활에 대한 생각을 할 겨를조차 없이 25시간을 날아 브라질 땅에 떨어진 것에 더 가까웠다.


쿠리치바라는 곳에 도착하여 아침에 눈을 떠 보니 알아듣지 못하는 말들이 방문 밖에서 들려왔다. (이 것은 브라질에서 사는 내내 내가 한국이 아닌 다른 땅에서 살고 있음을 새삼스레 깨닫는 순간이다.) 미리 살 집을 구하지 못한 채 브라질에 도착해 버린 나는 먼저 가 있던 대학 동기의 브라질 친구 소개로 어느 집에 도달해 있었다. 한국인 남자 1명, 브라질 여자 2명, 브라질 남자 열 몇 명으로 구성된 이 특이한 집은 마치 시트콤 ‘논스톱’을 떠올리게 했다. 브라질 친구들의 대부분은 이제 갓 대학에 입학한 새내기들이었고, 그 말은 즉 조용하고 차분한 생활은 불가능에 가까울 것임을 말했다. 밤마다 축구를 보며 욕을 해대는 친구들 덕분에 웬만한 브라질 욕은 한 달 만에 깨우칠 수 있었으나, 2년 동안 학교에서 공부한 것들은 다 어디 갔는지 처음 일주일 간은 꿀 먹은 벙어리로 방에 틀어박혀 지냈다. 거실에 나가면 나보다 액면가 10살은 많아 보이는 어린 친구들이 알아들을 수 없는 그들의 모국어로 그들만의 즐거운 일상을 공유했고, 나는 그 소외감을 견디기가 어려워 번번히 방으로 들어오기 일쑤였다. 그 때의 나는 그 아이들과 친해질 의지도, 용기도 없었다.


그런 생활 중에서도 내가 좋아하는 순간이 있었다. 살던 집이 아파트가 아닌 주택이었기 때문에 현관 계단에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을 구경하는 게 재미있었다. 날씨 좋은 날 가끔 그렇게 앉아 울타리가 주는 안정감 속에서 바깥의 낯선 브라질 세상을 바라보며 멍 하니 시간을 보내곤 했다. 그러다가 밖에 지나가던 이웃 주민들과 눈이라도 마주치면 그 쪽에서 먼저 “Ola!”하고 인사를 건넨다. 나는 브라질 사람들의 살가운 인사를 좋아했다. 버스기사 아저씨나 식당 종업원, 은행 직원들 모두 자연스럽게 서로에게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하고,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시작한다. 친한 사이끼리는 베이쥬 (beijo) 라고 불리우는 볼 인사를 한 번 혹은 두 번 양쪽으로 나누고 포옹을 하며 이야기의 시작과 끝을 맺는다. 처음에는 볼 인사가 너무나도 어색해서 엉덩이를 뒤로 쭉 빼고 엉거주춤한 자세로 볼만 닿을 듯 말 듯 인사했었다. 보기만해도 까슬해보이는 수염이 덥수룩한 친구들이 셋 이상 있으면 나는 동양인이라 그런 인사할 줄 모른다는 듯 멀뚱멀뚱 쳐다보기만 했다. 상상만으로도 전달되는 감촉이었다.

하지만 어느 정도 익숙해 진 뒤로는 볼과 포옹에서 느껴지는 체온이 좋았고, 나를 정말 소중한 사람처럼 꼬옥 안아주는 그들의 표현이 너무 좋았다. 어떻게 보면 브라질 사람들에게는 아무 감정 없는, 딱히 특별할 것 없는 인사의 한 순간일 수 있지만, 나는 멋대로 그 속에서 따스함을 찾았다. 새로운 사람을 만날 일이 생기면 만나기 전부터 그 사람의 볼 인사는 어떨지 상상하곤 했다. 만남의 시작에 하는 베이쥬는 다소 형식적이고 가벼웠지만 몇 시간을 함께 보낸 뒤 끝에 하는 작별 인사의 베이쥬에서는 확실히 감정이 더 진해짐을 느낄 수 있었다. 나에게는 그 차이가 정확히 느껴졌다. 그럼 귀갓길에 오늘 하루를 잘 보냈다고 생각하며 집으로 돌아간다. 그래서 한국에 돌아온 뒤로도 좋아하는 지인들을 만나면 예고없이 끌어안아 그들을 당황시키기 일쑤였다. 하지만 그 습관이 브라질에서 가져온 좋은 것들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돈과 시간을 들이지 않고 나와 상대방을 기분 좋게 만드는, 서로간의 관계를 산뜻하게 시작할 수 있는 아주 간단한 묘책이라고 생각한다. 앞으로도 내가 포옹을 거리낌없이 할 줄 아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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