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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류재숙 Monica Shim May 24. 2023

Amboy로 가는 길

Day2. 2023.3.9 목

 세상을 뒤집어 엎을 것 같던 바람이 오늘은 잠잠해졌다. 날씨가 언제 그리 유별났었냐는듯 시침을 떼곤 하룻밤 사이 완전히 바뀌었다. 모래를 움켜쥐고 바람에 날려가지 않으려 애쓰던 사막의 덤불들이 오늘은 주먹을 펴고 좀 쉴 수 있겠다. 다행이다. 적당한 구름 사이로 햇살이 밝다.


 어제 입었던 옷을 집어드니 모래가 우수수 쏟아진다.  햇살에 터니 반짝이는 금모래가 수없이 날린다. 고이 가져다 금가루를 모으면 부자가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신발에도 카메라에도 모래가 서걱댄다.


 오늘은 엠보이로 간다. 캘리포니아 드림을 꿈꾸며 서부로 오던 사람들이 모하비사막을 건너며 쉬어가던 도시다. 겨울 동안 잠시 내린 비로 엠보이를 향하는 사막엔 초록 풀들이 솟아있었다. 뜨거운 태양 아래 긴 시간 움츠리고 있던 사막이 생명을 맞아 기지개를 켠다. 적은 양의 비로도 타던 갈증만큼이나 간절하게 초록을 키워낸다. 간절함이 피워낸 결정체다.


  멀리 화물을 실은 기차가 산을 돌아 나오며 사막을 가로질러 간다. 동부에서 서부로 서부에서 동부로 부지런히 물자를 나른다. 거대한 컨테이너 박스를 두 개씩 얹어 이층으로 싣고 달린다. 끝이 보이지 않는 기차행렬이다. 차량이 몇 개인가 세어보다 50개를 넘어서곤 숫자를 놓쳐버렸다. 인간이 살면서 필요한 물건은 얼마나 될까.


 루트 66번 길을 자전거로 달리는 사람들이 보인다.  사막을 횡단하는 젊은이들이다. 젊은 날엔 배낭여행도 하고 싶었고 대륙횡단도 하고 싶었다. 언젠가 할 수 있으리라 했던 일들이 이젠 리스트에서 하나 둘 지워야 할 일이 생긴다. 나이 드니 몸이 마음을 따라잡기 힘들어진다. 내가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구분할 줄 아는 지혜가 세월이 흐르며 생겼다.  내 능력의 한계를 수용한다는 것, 반항 없이 받아들인다는 것이 지혜인지 슬픔인지 모르겠지만 현실은 냉혹하다. 마음 한편이 씁쓸해진다.


 젊을 땐 메마른 사막경치를  좋아하지 않았다. 나이 드니 싫던 것도 달리 보인다. 사막은 사막이라서 좋고 바다는 바다라서, 숲은 숲이라서 좋다. "난 이런 게 좋아" 하던 젊은 날의 개성 있는 선호도는 세월이 가며 옅어졌다. 싫던 것도 다른 관점에서 보면 좋은 점이 보이고, 유별나게 좋아했던 것도 어느 한 구석 빈틈이 있는 걸 알았다. 그래서 몸도 마음도 나이 먹을수록 두리뭉실해져 간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말라.' 하던 말처럼 누군가 나를 속여도 그럴만한 사정이 있었겠지 하게 된다. 기쁨과 슬픔의 파고가 얕아진다.


 루트 66을 따라 버려진 집들이 간간이 나타난다. 저 집들도 지어질 땐 누군가의 꿈과 희망이었을 것이다. 그 꿈의 무게를 감당키 어려웠던 걸까. 지붕은 내려앉고 벽은 허물어져 있다. 찬란한 날 뒤엔 쓸쓸한 날이 오고 또 그 반대의 날이 오고 감이 삶이라 말하고 있다.


 루트 66은 1926년 완공되었다. 시카고에서 캘리포니아까지 8개 주를 넘나들며 미국 경제불황기 때  동부에서 서부로의 이주를 책임지던 길이었다. 1950년대에  40번  프리웨이가  생기면서 한때 잘 나가던 루트 66은 뒷방 늙은이로 밀려나 버렸다. 지금은 차들의 왕래가 거의 없고 옛 추억을 더듬는 관광객이나 사진에 담으려는 사람들이나 기웃거리는 정도다.


 앰보이에 가까워지자 높은 탑 위로 'Roy's Motel Cafe'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한때 사람들로 북적였을 앰보이는 황량했다. 낡은 주유소와 작은 가게하나, 사람들이 떠난 지 오래인 교회, 텅 비어 쓰러져가는 집과 빈 방갈로가 남아 있었다. 우체국 건물만 과거와 현재의 소식을 전해주듯 성조기를 날리며 굳건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


 노부부가 연식이 오래된 차에 가스를 넣고 있다. 텅 빈 도시에 Roy's  Motel Cafe 간판은  빈방 없음 No Vacancy이란 사인을 당당히 내걸고 하늘 높이 서있었다. 속이 비었을 망정 겉으론 당당하고픈 빈방 없음이란 허세는 차라리 아픔이었다. 찬란했던 시절이 다시 돌아오기를 바라는 늙은 여배우가 젊은 시절 옷을 입고 극장가를 서성대는 모습이었다.


 밴 두대를 세우고 그 사이 그늘에서 물을 끓여 점심을 준비했다. 사진반 선배들이 길가에 쪼그리고 앉아 컵라면으로 끼니를 때운다. 영락없는 홈리스 모습인데도 다들 즐겁다. 대학시절 엠티 가서 도로 가에 퍼질고 앉아 깔깔대며 먹고 떠들던 때가 떠올랐다. 남의 시선이나 잣대가 그리 중요하지 않던 시절이었다. 사회적인 지위나 위치에 맞춰  나를 살아온 게 언제부터였던가. 선배들이 그때의 대학생으로 보인다.


 사진이 도대체 무엇이길래 모래폭풍도 사막의 열기도 홈리스 모습도 아랑곳하지 않는 걸까. 길 가다 어디에 내려줘도 찍을 거리를 찾고야 마는 이 끈질긴 열정이라니. 중독도 이만한 중독이 없다.


 각자 카메라를 들고 유령이라도 나올 것 같은 빈집을 카메라에 담았다.  버려진 집은 무섭다며 평소 눈길도 피해 가는데 카메라만 들면 달라진다. 내가 살다 떠난 곳이라도 되는 냥 버려진 공간과 물건 하나하나에  의미를 두게 된다. 깨진 유리창, 쓰러진 의자, 뒹구는 장난감과 떨어져 나간 문짝이 마음 한켠에 바람을 일으킨다. 저 의자에 앉았을 누군가를 생각하게 하고 부서진 장난감을 가지고 놀았을 아이를 떠올린다. 카메라를 통해 공간과의 감정이 교류된다.  


 오늘의 과제는 해가 떨어질 때  Roy's cafe 네온사인에 불이 들어오면 주위배경과 어울러 네온사인의  색을 살려 촬영하는 것이다. 높다란 카페 사인판 아래 일렬로 삼각대를 세우고  포커스를 미리 맞추었다. 모델은 늘씬한 Roy's cafe 간판이다.


 석양 아래 한 줄로 늘어선 열다섯 개의 삼각대와 회원들의 모습이 장관이다. 멋진 작품을 남기겠다는 각오가 비장하다. 해가 서산아래로 떨어지는 순간 정확히 Roy's 글자에 초록색 네온사인이 켜졌다. F값을 11에 맞추고 ISO는 100 셔터스피드는 80분의 일초에서 6초까지 단계씩 내려가며 찍어본다. 어둠 속에 카메라 셔터소리만 요란하다. 모델은  홍등을 밝히고 사진작가들을 유혹한다.  타는 노을과 요염한 모델 앞에 하늘도 카메라도 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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