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아침 보르도행 기차를 타려 몽빠르나스역 Gare Montparnasse으로 향했다. 전철역에서 나오니 앞에 거대한 빌딩이 서있다. 고층 빌딩이 없는 파리에 송곳니처럼 우뚝솟은 몽빠르나스 빌딩은 멀리서는 검고 멋없는 건물로 보였는데 가까이 와보니 검은 턱시도를 입은 멋쟁이 초현대식 빌딩이었다. 파리에서 가장 높은 59층 건물로 파리의 남쪽을 사수하는 듯하다. 오랜 역사를 지닌 파리의 다른 건물들 사이에 생뚱맞게 튀어나온 그의 큰 키가 난장이 나라의 키다리 같다. 파리와 어울리지 않는 외관으로 아직도 파리지엥들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있는 외로운 키다리 아저씨다.
가족모두 기차를 함께 탄건 런던 여행이후 처음이다. 아이들이 성인이 되니 가족이 함께 한다는 게 참 어렵다. 더군다나 거대한 미 대륙에 동쪽과 서쪽 끝에 떨어져 사니 더하다. 가족의 반경이 한집에서 한도시로, 한나라에서 대륙으로 점점 넓어져 미래엔 지구에 함께 사는 것만으로도 가깝다 여길려나. 한 공간에 가족이 다 모이니 다시 아이들 키우던 시절로 돌아간 것 같았다. 아이들이 떠나고 엄마의 자리도 함께 사라진 것 같아 허전했는데 다시 이렇게 모이니 내 자리로 돌아온 듯 편안하다. 아이들에게 뭔가 해줄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기쁜 게 엄마 마음이다. 부모가 이끄는데로 따라다니던 아이들이 이제 우리를 이끈다.
파리북역 만큼은 아니지만 남역인 이 몽빠르나스역도 규모가 크다. 커피와 빵을 사들고 SNCF기차에 올랐다. 프랑스엔 기차종류가 회사에 따라 유레일, 떼제베, SNCF, RER 등 종류가 많았다.
파리를 벗어나자 끝없는 밀밭이 펼쳐진다. 프랑스 땅은 넓고 비옥해 각종 먹거리가 풍부하다. 대서양과 지중해를 끼고 있으니 해산물 또한 풍부하다. 자급자족이 되니 남부러울 것 없다. 자고로 땅이 크고 좋은 위치에 차지하고 볼 일이다.
들녁너머 차창으로 보이는 농가가 아침 안개에 싸여 신비롭다. 멀리 지평선이 보이며 끝없는 평야가 이어진다. 안개인가 했더니 곧 비로 변해 차창으로 빗방울이 함께 달린다.
창밖의 그림같은 풍경을 즐기며 갈 줄 알았는데 아들 녀석은 주섬주섬 노트북을 꺼내더니 게임을 시작한다. 어릴 때나 직장을 다니는 지금이나 여전한 모습에 웃음이 나온다. 중고등학교 시절 아들 친구들이 자주 집으로 몰려 왔었다. 각기 게임기를 들고 와 거실에서 게임을 신나게 하다 가곤 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을 다니게 되면서 방문이 뜸해졌다. 성탄을 앞둔 어느날 녀석들의 군단이 몰려왔는데 손에 손에 쇼핑백을 들고 왔다. 아 녀석들이 성인이 되니 철이 들어 크리스마스 선물을 서로 주고 받나보다 했다. 거실에 자리를 잡곤 떠드는가 싶더니 에구 웬걸 쇼핑백에선 각자의 게임기가 나왔다. 또다시 신나게 한판 게임 전쟁을 치르는 녀석들을 웃으며 바라보다 아 쟤네들이 저러다 장가를 가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에도 여자들은 결혼 하는 순간 남자들이 뭐든 알아서 척척하길 기대한다. 헛웃음이 나왔다.
초록의 밀밭과 황금색 밭사이로 노랑 꽃밭이 드문드문 보인다. 무슨 꽃일까.. 차창 가까이 다가온 노랑 꽃밭에는 해바라기가 가득했다. 끝도 없이 펼쳐진 해바라기의 바다다. 저 많은 해바라기가 일제히 고개를 쳐들고 해를 바라본다. 입을 벌리고 어미새의 먹이를 기다리는 새끼새들 같다. 들판 가득핀 무수한 새끼들에게 해는 뜨거운 사랑의 먹이를 나른다. 어미새의 사랑에 해바라기가 무럭무럭 자란다.
어젯밤 제대로 잠을 자지 못했는데도 이 아름다운 풍경을 눈에 담고 싶어 잠들 수가 없다. 푸른 들과 구릉과 숲들이 나타났다 사라지고 오래된 돌집과 농장이 차창으로 다가왔다 멀어지며 어느새 스르르 잠이 들었다. 꿈결에 자전거를 타고 이젤이 아닌 카메라를 메고 해바라기 가득한 들길을 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