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님, 내 약속 지킸심 데이. 행님 하고 한 약속 인자 지켰어예. 이 성태가 대한민국 산업명장이 됐다 안캄니꺼”
저녁 늦게 걸려온 성태 삼촌의 들뜬 전화 목소리에 온 가족은 잔치 기분이 되었다.
“우리 성태가 명장이 됐다 카네예. 예 대한민국 산업명장이라카이!”
아버지는 친척들에게 이리저리 전화를 돌려 자랑을 해대셨다.
할아버지께서 중풍으로 쓰러지셨을 때 아버지는 고등학교 졸업반이었다. 한복 바느질로 생계를 돕던 할머니를 도우느라 학교를 마치면 물지게를 지고, 밤에는 좁은 방 한 귀퉁이에서 전깃불 아끼라는 할아버지의 호통 속에서 공부하며 법대 지망의 꿈을 키우고 있던 때였다. 주위에선 “뒤 돌아보지 말고 네 갈길 가거라.”라고 등 떠미는 사람들도 많았건만 아버지는 젊은 날의 꿈을 고스란히 가슴 속에 접고 대가족을 위해 한 집안 가장의 길을 택했다. 중풍으로 누운 할아버지를 대신해 아버지는 법학도의 길 대신 소박한 이발사의 길을 시작하셨다.
셋째 동생인 성태 삼촌이 유독 속을 썩였다. 하라는 공부는 하지 않고 철공소에 들어가 돈을 벌어 성공하겠다는 고집에 아버지께 몽둥이로 맞기도 했다. "지금 공부 안 하면 니 인생 망친다카이. 이느무 짜식이 그래도 공부 안할끼가“ 갖은 설득에도 아랑곳 않고 결국 학교를 중퇴하고 철공소로 들어간 것이다. 내 어린 시절 성태 삼촌은 늘 기름때 묻은 작업복 차림에 어느 뒷골목 조직에서 일하는 사람처럼 허스키하고 껄렁한 목소리로 기억된다. 어느날 삼촌이 주먹으로 벽을 쳐 움푹 파인 자리는 삼촌의 상징처럼 내게 각인되었고, 삼촌이 나타나면 무서워 슬금슬금 피하곤 했다.
그런 삼촌이 어느 날 크고 날씬한 몸매에 긴 머리를 늘어뜨리고 멋진 바바리코트를 입은 불란서 영화에나 나올 것 같은 아가씨를 데리고 나타났다. 어린 내게 그렇게 멋진 분은 처음이었다. 방에 다소곳이 앉은 그분은 내가 문 앞에서 힐끔거리자 함빡 웃었다. 그 모습이 내게 오래 남았다. 그 멋진 아가씨는 성태 삼촌과 결혼하여 두 아들을 둔 듬직한 아줌마로 변했고, 언제나 허허 웃으며 큰 목소리로 정을 듬뿍 쏟아내는 울산 큰 애기 같은 우리 작은 엄마가 되었다.
내가 중학교 다닐 즈음 현대 조선소에 다니던 성태 삼촌은 명절에 집에 들를 때면 언제나 우리 형제를 모아놓고 말하곤 했다. “임마, 너거들 억수로 열심히 공부해야 된데이. 내가 조선소 있어보니깐 학력이 진짜로 중요하더라. 나보다 한참 신참도 대졸 딱지 하나로 직급이 단팍에 나보다 높아지더라카이. 행님이 와 날 때리가미 공부하라 캤는지 알겠더라. 내 그래서 억수로 열심히 일한데이. 영어도 혼자 공부하고...”
대구 집을 들를 때마다 성태 삼촌의 이야기는 우리의 영웅담이 되었다. “행님, 이번에 지가 반장이 됐심더.” “행님, 이번 달에 드디어 과장이 됐어예.” 어린아이처럼 들떠서 형님께 보고하는 삼촌의 얼굴은 언제나 아버지에게 자랑스러움이 되고픈 아들의 얼굴이었다. 아버지 같은 형님에 엄마 같은 형수님이었다. 친정 나들이하고 오면 으레 떡을 해오던 형수에게 삼촌은 어릴 적 떡이 먹고 싶을 때마다 “행수님, 친정에 안 다녀 오십니꺼?‘ 하고 채근했다 한다.
치매로 십여 년을 앓던 할머니 간호에 지쳐 엄마가 병이나 드러누웠을 때 성태 작은 아버지와 작은 엄마는 선뜻 “행수님, 저희도 어머니 한번 모셔보겠습니다.”하고 결코 쉽지 않은 할머니 간호를 자청하셨다. 벽에 똥을 칠해대던 할머니를 모셔보곤 형수님이 얼마나 대단하신가를 더 깊이 알았다던 두 분. 그때 난 어린 나이였지만 형수님을 생각하는 고운 마음의 성태 작은 아버지와 작은 엄마가 참말 고마왔다. 형수님 아플 땐 약을 지어 보내고 처음 나간 외국 출장길에도 형수님 분첩을 먼저 챙겨 오던 분이었다.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몇십 년을 병가 한번 내지 않는 직장도 부모님 제사는 꼭 와야 한다며 할아버지 할머니 제사 땐 빠짐없이 참석한다. 함께 일하는 후배 직원이 힘든 일을 당하면 월급을 털어서라도 도와준다던 성태 작은 아버지였다.
가끔 할머니를 생각한다. 내가 초등학교 때부터 치매가 시작된 할머니. 손재주가 좋아 한복집을 하셨던 할머니는 명절이면 으레 우리 한복을 지어주셨다. 할머니가 지어준 설빔을 입고 철뚝길을 건너 설 대목으로 밤을 새운 할머니의 가게로 세배를 하러 갔었다. 할머니는 우리가 차고 간 복주머니에 세뱃돈을 두둑이 넣어 주시곤 했다. 할머니는 이웃에 어려운 사람이 있으면 내 식구 힘들어도 쌀을 아낌없이 푹푹 퍼주던 분이었다.
어느 날부턴가 손재주 많던 할머니 손에서 바느질이 제대로 되지 않기 시작했다. 집을 나서면 익숙하던 길을 잃고 헤매셨다. 할머니 기억 속에서 사물의 이름이 하나 둘 잊혀갔고 주위 사람들 이름도 사라져 갔다. 결국엔 가족들조차 알아보지 못하셨다. 모든 사물 이름은 연탄이란 단어 하나로 통일되었고 음식도 자제가 되지 않았다. 할머니와 한 방을 쓰던 나는 수업 시간에 한 페이지가 고스란히 찢겨나간 교과서와 종종 마주쳐야 했다. '연탄 오늘 다섯 장 다 꿉힜다.' 찢겨나간 교과서 한쪽에 적힌 할머니의 편지는 꼬깃꼬깃 접혀 할머니의 오래된 손가방 속에 고이 간직되어 있곤 했다. 할머니는 누구에게 무슨 말을 쓰고 싶으신 거였을까. “할매 내가 누군지 알아예?” 물으면 의아한 듯 한참을 바라보다 되묻곤 하셨다. “댁이 뉘신교?”
자그마한 철공소에서 현대 중공업 기장이 되고 대한민국 산업 명장이 되기까지 기름 때 묻혀 가며 오직 기계와 함께 해온 성태 삼촌의 33년의 세월. 우직하게 한길을 달려온 그 세월동안 성태 삼촌은 배움의 끈을 놓치게 하고 싶지 않았던 형님과, 아들조차 알아보지 못하던 어머니와의 무언의 약속을 지켜내고 싶었던 거였으리라. 할머니가 살아계셨다면 오늘 같은 셋째 아들의 경사에 “아이고, 시상에서 참말로 자랑시런 내 아들, 우리 성태가 대한민국 명장이 됐다카네. 내 새끼 진짜 장하데이.” 덩실덩실 어깨를 들썩이며 한 바탕 신명 나게 춤추셨을 텐데.
“행님, 어무이, 내 약속 지킸심데이. 행님하고 한 약속 인자 지켰어예 . 이 성태가 대한민국 산업명장이 됐다 안캄니꺼” 성태 삼촌 목소리가 지금도 귀에 쟁쟁하다.
현대 중공업 회사 사보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