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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된 것에 대한 찬미

일상에서

by 류재숙 Monica Shim

잡초, 잡담, 잡지, 잡음, 잡기, 잡동사니, 잡념, ..., 우리는 '잡'이라 이름 불려지는 수 많은 것들에 둘러싸여 산다. '잡되다'란 '중요하지 않고 보잘것없다, 여러 가지가 뒤섞여 순수하지 아니하다, 됨됨이가 조촐하지 못하고 막되다'란 사전적 의미를 가진다. 잡된 것들은 천하고 전문적이지 못하다는 부정적인 시선을 받기도 하지만 그 천하고 낮은 것이라 여기는 속에 소중한 값어치가 있음을 본다. 그들에겐 충분히 사랑받을 만한 수많은 모습이 있다.


잡초는 고고함을 떨며 자라지 않는다. 바라봐 주는 이 없어도 탓하지 않고 절망하지 않는다. 혹독한 환경 속에서도 예쁜 꽃을 피워내는 강인한 생명력이 거기 있다. 들녁가득 자라 어깨를 맞대고 함께 비바람을 견뎌내는 더불어 사는 아름다움이 있다. 매일 신경써 들여다 봐 주지 않아도, 때맞춰 거름과 물을 주지 않아도 저혼자 힘으로 피고지며 자립의 의지를 키운다. 남의 밭에 자리를 잡은 잡초는 따가운 눈총과 멸시를 받고 자라도 기죽지 않고 꿋꿋이 삶을 견뎌낸다. 곧 뽑혀나갈 운명에 처할지라도 결코 삶을 포기하지 않고 뿌리를 뻗고 씨를 퍼뜨리는 끈질김이 있다.


형식없는 시시껄렁한 잡담은 우리를 무장해제하게 한다. 회의실 대화 같은 딱딱함과 긴장 같은 건 잠시 내려 놓아도 좋다. 팍팍히 돌아가는 삶의 틈새에서 잡담은 스트레스를 날리며 정신건강에 일조한다. 밤새워 원고를 준비할 필요도, 어떤 단어를 선택해야하나 고민하는 수고도 그닥 필요치 않다. 잡담은 꾸밈없이 속을 드러낼 수 있어 좋다. 이런 말을 하면 저 쪽이 나를 어찌볼까 염려도 적다. 잡담 속에 진담을 슬쩍 넣어 말하면 상대의 마음을 다치지 않고도 하고픈 말을 전할 수도 있음이다. 잡담에는 정해진 주제가 없으니 이런 이야기를 하다 갑자기 저런 이야기로 화제가 넘어가도 주제에서 벗어났다며 크게 지적할 사람이 없다. 잡담은 장소를 가리지 않는다. 수업사이 복도에서 친구의 하숙방에서 흔들리는 버스안에서든 전화통을 붙들고든 어디서나 할 수 있다. 장소불문 주제불문이니 이 얼마나 속편한 벗인가.


버젓이 앞에 드러내 놓고 떠들 수 없는 많은 뒷 이야기들을 우린 잡지에서 만난다. 잡지는 평등사상을 지향한다. 근접조차 할 수 없는 왕실가족과 뒷골목 홈리스가 한페이지에 마주보며 실린다. 어느 연애인의 일탈도 대기업 대표의 뒷담화도 일상에서 일어나는 시시껄렁한 사건도 높고낮음 상하귀천을 따지지 않고 함께 나란히 설 수 있다. 잡지를 읽으며 우린 그 내용을 외우려 머리를 싸매지 않는다. 물론 중요어구에 밑줄 칠 일도 없다. 그럼에도 잡지에 실린 이야기는 머리에 쏙쏙 박힌다. 시험문제를 잡지에서 내면 아마도 만점은 누워서 떡먹기가 될지 모른다. 잡지는 책과 달리 하나의 주제에 천착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주제와 시의성을 충실하게 따른다. 지금이야 인터넷을 통해 원하는 정보와 지식을 검색할 수 있지만 잡지는 신문과 달리 시사성과 내용의 깊이라는 두 가지 요구를 충족시켜주는 매우 요긴한 원천이었다. 그런 잡지가 갈수록 쇠퇴하고 있다. 그건 세계적 추세이기도 하며 정보 매체의 다양화로 인해 필연적인 현상일지 모르나 오랜 벗을 떠나보냄은 안타까운 일이다.


뭔가에 골똘히 빠져 집중할 때 들려오는 잡음은 우리를 괴롭게도 하지만, 긴장한 상태에서 들려오는 잡음은 때론 사람을 웃게하거나 긴장을 풀어주는 역할을 한다. 지루한 강연 중에 들려오는 누군가의 코고는 소리는 표현하지 못한 공감을 이끈다. 가벼움의 미학이 여기에 있다. 심각하게 짓눌린 공기의 틈사이에 재치와 위트로 무거움을 한순간에 뒤집어버리는 재주를 잡음이 담당하기도 한다.


잡기에 능한 사람과 함께 있으면 결코 심심하지가 않다. 노래면 노래, 춤이면 춤, 고스톱이면 고스톱, 다양한 재주로 주변 사람을 즐겁게 한다. 그들은 팍팍한 삶 속에 윤활유 역할을 하며 삶을 즐길 줄 안다. 권위와 위선을 가볍게 날리는 트릭스터(trickster)의 역할을 담당하기도 한다. 그들은 손재주도 좋아 뭐든 척척 잘만들거나 고장난 걸 고치기도 잘한다. 이런 사람은 맥가이버란 별명을 얻기도 한다. 이런 잡기에 능한 사람과 살면 삶이 재미있고 편리하다.


잡동사니가 모인 곳엔 제각기 거쳐온 저만의 이야기가 있다. 이들도 갓 태어났을 땐 다들 사랑받는 존재였다. 세월 속에 낡고 삭아 이젠 천대받고 버려진 신세로 전락했지만 말이다. 구질구질하고 쓰잘 데 없어 보이지만 제자리를 찾아들어가면 제 값어치를 너끈히 하기도 한다. 안경나사가 빠져 난감할 때 녹슨 작은나사 하나가 큰일을 해내는 걸 보지 않았는가. 끊임없이 새로운 것이 쏟아져 나오는 세상에서 잡동사니의 인구는 가파르게 증가하고 있다. 최신품이라고 젠 체 할 틈도 없이 빠르게 밀려나는 세상이다. 그러나 잡동사니를 잘 활용하면 지구를 살리는 일이 된다.


멍하니 앉아 떠오르는 온갖 잡념은 또 어떤가. 굳이 저장된 에너지를 소모해가며 뇌를 혹사하지 않아도 된다. 잡념은 강의를 듣다가도 회의를 하다가도, 열중하고 있는 뇌를 어느새 스르르 샛길로 빠져들게 한다. 정해진 대로만 걷는 삶의 무미건조함을 샛길도 있어 살 맛을 느끼게 하는 힘이 잡념에서 나온다. 뇌가 저절로 굴러가게 내버려 두는 자유방임 상태가 잡념의 상태다. 새로움을 창작하게 만드는 힘이 잡념에서 나오기도 한다.


이처럼 잡된 것고고하지 않아 다가가기 어렵지 않고 격식을 차리지 않아도 될 것 같아 편하다. 늘 함께 해주는 오랜 친구 같은 막역함이 있다. 굳이 차려입지 않아도, 꾸미지 않아도, 스스럼 없이 받아줄 것 같은 넉넉함이 있다. 이들에겐 정겨운 삶의 냄새가 묻어난다. 살면서 행여 이렇게 낮고 조촐한 것을 그저 잡되다 여기며 지나치고 천대시하며 살진 않았는지 돌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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