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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과 마주한다는 것은

일상에서

by 류재숙 Monica Shim


살다가 문득 지난날의 내 모습을 마주할 때가 있다. 길을 걷다 우연히 마주친 삶의 풍경에서, 영화 속 툭 던진 대사 한마디에서, 누군가의 웅크린 뒷모습에서, 식탁 앞에 놓인 팥죽 한 그릇에서, 책을 읽다 눈에 띈 한 구절 글귀에서, 잊었던 내 모습을 문득 만날 때가 있다. 때론 감추고픈 그림자의 모습으로, 때론 환한 빛의 모습으로 내 안에 잠재해 있던 기억과 마주한다.


글을 쓰면 가끔 부모님에게 먼저 보낸다. 멀리서 사는 딸이 자주 찾아뵙지 못하는 불효를 편지를 쓰듯 글로서라도 대신해보고 싶어서이다. 눈이 어두워 글 읽기 어려운 엄마를 위해 아버지가 읽어주신다 했다. 자식이 모두 떠난 저녁 식탁에 노부부가 앉아 늙은 아내에게 글을 읽어주는 남편의 다정한 풍경을 떠올리곤 한다.


며칠 전에도 그랬다. 가족을 회상하며 쓴 글을 아버지 카톡방에 보내드렸다. 재미있게 읽으셨냐는 딸의 물음에 아버지는 엄마에게 읽어주다가 갑자기 목이 메어 끝까지 읽기 힘들었다고 하셨다. 아버지는 글의 어느 대목에서 지난날의 당신의 모습과 마주한 걸까. 책가방을 던져두고 무거운 물지게를 지고 가는 어린 소년의 모습을 마주한 걸까. 하고프던 공부도 젊은 날의 꿈도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모두 접어야 했던 순간 세찬 바람에 맞서 걸어가던 한 청년을 본 걸까, 아들조차 알아보지 못하는 치매 걸린 노모를 말없이 바라보던 한 아들의 모습을 기억한 걸까. 동생들과 자식들 먹여 살리려 내 몸 으스러져라 뛰어다니던 한 가장의 모습을 만난 걸까. 세상에 이리저리 치이던 어느 날 눈에 밟히는 식구들 때문에 차마 직장을 던져버릴 수 없어 술 취해 돌아오던 어느 쓸쓸한 겨울밤을 마주한 걸까.


어제 만난 한 선배는 엄마에 대한 글을 읽은 후 돌아가신 엄마가 생각나 밤새 미친 듯 엄마에게 편지를 썼다고 했다. 형제들은 머리가 좋아 모두 잘 나가는 교수나 의사가 되었는데 본인만 유독 공부 못하고 사고만 쳐 엄마 속을 지지리도 긁고 살았다고 한다. 자랑스러운 많은 자식들 중에서 자기만 감추고 싶었던 딸이었을 거라 여기며 살았다고 했다. 평생 힘들게만 한 남편 때문에 괴로울 때면, 자기를 부끄럽게 여긴 엄마 때문에 내가 결혼해서도 남편한테 당하며 사는구나 하고 원망이 갔었다고 한다. 그런데 편지를 쓰다 보니 철없던 자신이 보이고 엄마를 아프게 했던 지난 기억들이 마구 떠올라 눈물이 펑펑 쏟아졌다 한다. 지난날의 자신을 다시 바라보고 나니 대못이 박혀있던 가슴이 확 뚫리고 얼룩진 마음을 비누로만 씻은 게 아니라 락스까지 넣어 빡빡 문질러 씻어낸 느낌이었다고 했다.


기억과 마주한다는 것은 어떤 것인가. 오랫동안 외면해왔던 내 빛과 그림자와 대면하는 것인가. 내 속에 여전히 살아 있었지만 까맣게 잊고 있었던 그때의 반짝이던 나, 내 꿈을, 불현듯 다시 마주할 때 심장이 다시 뜀을 느끼게 되는 것인가. 세상에 던져져 사느라 오해받고 치여 살던 내 모습, 그래서 외롭다 외롭다 못해 어느 구석에 내 팽겨버린, 시커멓게 멍든 내 그림자를 꺼내 바라보는 일인가. 죽은 육신에서 빠져나간 영혼이 누워있는 내 육신을 내려보듯, 인생의 한구석에 웅크리고 살고 있는 나를 담담히 바라보는 것인가. '그래, 너 그때 그렇게 아팠었지, 외로웠었지' 하며 누구에게도 받지 못했던 공감을 해주고 토닥여주는 것인가. 아무에게도 내뱉지 못했던 그때의 내 아픔, 그래서 외로웠던, 그래서 억울했던 나를 한번 안아 봐주는 것인가.


분석 심리학자 칼 구스타프 융은 '자신의 그림자와의 만남'은 뼈아픈 콤플렉스와 트라우마까지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거라 한다. 우리는 빛과 그림자를 속에 간직한 채 얽히고설키며 살아간다. 어느 날 기억을 마주했을 때 또다시 한구석으로 슬그머니 밀쳐놓지 않고 적극적이며 따뜻하게 바라보는 순간, 우리는 깨닫지 못했던 자신의 실체를 보게 되는 건지도 모른다. 타인의 시선으로 보듯 나를 객관화해 보게 되면서 내가 왜 그리 아파야 했었는지, 내 삶을 왜 그리 꼬고 비틀며 살았는지가 드러나게 되는지도 모른다. 아픈 기억을, 감추고픈 내 그림자를 넉넉히 바라봐주는 순간, 뾰족이 날 세워 있던 내 아픔은 둥글어지고 닻에 매여 있던 내 영혼은 돛을 달고 드디어 항해를 시작할 수 있으리라.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에서 오이디푸스는 신의 저주로 인해 친어머니인 줄 모른 체 어머니인 이오카스테와 결혼을 하고, 친아버지인 줄 모르고 자기의 손으로 아버지인 라이오스를 죽인다. 그 후 자신의 출생의 비밀을 알고 충격과 나락으로 떨어진다. 하지만 그는 운명을 회피하거나 외면하지 않고 자신의 운명을 자신의 의지로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대응한다. 추락의 운명에도 불구하고 삶을 놓치지 않고 끝까지 자기 삶을 지켜낸다.


자기를 과대평가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그림자를 대면하지 않고, 자기를 비하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지닌 빛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한다. 가장 감추고픈 그림자를 마주 대할 수 있는 용기, 주어진 운명에 억울하다 호소하거나 굴복하지 않고 그 운명에 맞서 끝까지 삶을 살아내는 인간의 위대한 아름다움, 숨어있던 내 빛을 찾아 다시 반짝이게 하는 노력, 이들은 내 안 깊숙이 감춰두었던 기억을 꺼내 진솔히 마주해 보는데서 비롯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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