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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사로 살아가기

일상에서 6.12.2021

by 류재숙 Monica Shim

출근길, 붉은 신호등에 걸려 차를 세웠다. 무심코 옆을 돌아보니 나란히 세운 차 운전석에 한 여자가 백미러를 보며 바삐 화장을 하고 있다. 그녀의 바쁜 아침이 눈에 보이듯 환히 그려졌다. 이른 아침부터 종종 거리며 아이들과 집안 일을 챙기고 황급히 출근 길에 나서는 길일 터이다.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문득 "언니는 여전사 같아요." 하던 후배의 말이 떠올랐다. 차 백미러에 낯선 여자의 모습이 보였다. 머리를 질끈 묶고 퍼석대는 마른 잎 같은 피부를 하고 뭔가에 홀린 듯 앞만 보고 내닫는 여자, 앞으로 돌격이라 외치면 그대로 총이라도 들고 적진에 뛰어들 듯한 모습의 여자가 거기에 있었다. 그래 그건 전쟁터의 여전사의 모습이었다.


미국에서 가정과 직장 생활을 병행하며 살아온 지난 시간은 전쟁처럼 치열했다. 분초를 쪼개며 직장으로 가정으로 학교로 치닫기만 했다. 새벽에 깨어 식구들 하루를 준비하고 짐짝 부리듯 아이들을 학교로 실어 나르고 총알택시 몰듯 차를 몰아 출근해 수많은 일을 해결하고 돌아와선 식구들의 저녁을 챙기고 내일을 준비했다. 아침 6시에 깨어 밤 11시까지 종일 종종 대며 서있기가 다반사였다. 그 사이 나 자신은 어느 언저리에 서있는지 위치 추적조차 못한 채.


선배는 그런 나를 보고 슈퍼 워먼 신드롬에서 벗어나라고 조언하곤 했다. 그러나 그건 이상적인 말일뿐이었다. 직장을 고수하며 사는 한 수만 가지의 일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쉬는 날엔 직장 다니느라 밀린 집안일의 구멍을 때우느라 노심초사였고 직장에선 일의 홍수에 밀려다녔다. 커피라도 한 잔 하고 저 일을 해결해야지 하고 책상 위에 준비해둔 커피는 다른 일이 끼어들어 종종 몇 시간을 방치되다 다 식어빠진 후에야 냉수 마시듯 한 번에 들이키기가 일쑤였다.

수술시간엔 몇 시간을 한자리에 장승처럼 서있어야 했고 화장실은 제시간에 못가 만성 변비에 시달렸다. 심장 수술 후 몸에 호수를 주렁주렁 달고 퇴원하는 환자를 앉혀두고 집에 가서 해야 할 산더미 같은 지시사항을 일러주어야 했다. 종일 컴퓨터 앞에 앉아 전화통을 붙들고 환자들의 질문과 요구사항을 들어주고 해결하며 보람이라 여겼다. 그 틈사이 시간을 쪼개 낯선 땅에서 살아남기 위해 부족한 영어실력과 의료지식을 채우느라 이 학교 저 학교 수업을 찾아다녔다.


직장을 지키는 일은 나를 지키는 일이라 여겼다. 여자도 공부를 했으면 자기실현을 위해, 사회를 위해 뭔가를 해야 한다고 믿었다. 그 이상을 지키려 내 몸은 팽개쳐야 했다. 바쁘기로 손꼽히는 시카고 대학병원에서 일하면서 아들 둘을 키우며 대학원까지 다니던 후배가 어느 날 위경련으로 입원했다고 연락이 왔다. 그런데 우습게도 내 입에선 선배가 내게 하던 말이 바로 튀어나왔다. "슈퍼 워먼 신드롬에서 벗어나야 해."


며칠 전 신문에 ‘ 엄마는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 란 독자 기고가 실렸다. 맞벌이 부부가 외벌이보다 파산을 더 많이 하고 가정 파괴율도 높다고 한다. 그래서 엄마들을 직장으로 내몰지 말고 가정으로 돌아가게 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여성의 사회 역할이 늘고 있는 현대에서 여성이 가사와 육아에만 전담하는 것은 과연 사회적으로 큰 손실인 걸까.


직장에서 전쟁을 치르고 돌아온 엄마는 집에 돌아와도 쉴 틈이 없다. 동료들과 퇴근하며 “자 이제 집으로 출근들 해야지” 하곤 했다. 퇴근 후 지친 몸으로 집에 오면 식구들 음식 준비에, 설거지에, 빨래에, 아이들 숙제 검사에, 산더미 같은 할 일이 기다리는 엄마는 정서적으로도 예민해진다. 아이들도 남편도 지친 엄마에 대한 배려가 없다면 집안은 스트레스로 가득해진다. 엄마가 초능력을 발휘해 슈퍼맘이 되어야만 가정은 그나마 굴러간다.


여성의 사회적 지위 보장이 많이 앞서 있다는 이 곳 미국에서도 미국인 친구들조차 직장과 병행해 가정을 제대로 꾸려나가기가 얼마나 힘든지 자주 어려움을 토로한다. 하긴 조사에 의하면 전 세계에서 직장 가진 여성이 아이를 양육하기 가장 힘든 곳이 미국이란 조사 결과가 있긴 했다.


직장 가진 여성은 친구나 이웃을 만나 수다 떨 시간도 내기 힘드니 학부형끼리 만나도 자연히 자녀 양육에 대한 정보나 세상 정보에도 한 수 밀리기 일쑤다.


미국의 법학자이자 정치인인 엘리자베스 워런은 저서 <Two Income Trap( 맞벌이의 함정:왜 중산층 엄마와 아빠들은 파산하는가)> 에서 중산층 가정의 위기는 더 좋은 차 더 좋은 교육을 원하는 욕심에서 비롯된다고 말한다.


그런데 여성의 사회 진출은 과연 그것 때문 만일까? 현대는 여성이 결혼 후에도 직장 생활하는 게 당연시되는 세상이 되어버렸다. 과거엔 남자들만 나가던 사냥터를 이젠 여자도 사냥터에서 사냥을 해와야 하는 세상이 되었다. 집에서 살림만 하는 여성은 가끔 능력 없는 사람으로 취급당하기도 한다. 젊은 세대는 데이트하는 상대 여성이 어떤 일을 하는지 수입이 얼마나 되는지도 결혼의 중요한 조건이 된다고 한다.


맞벌이 스트레스로 인해 이혼율이 높아지기도 한다지만 한편으론 높아지는 이혼율로 인해 여성이 자신의 전문직을 포기하기가 더 어려운 역설적인 세상이 되었다. 주위에 많은 여성들이 아이들 양육을 위해 본인의 전문직을 포기하고 가정에 들어앉았다가, 잘 나가는 여자 친구를 사귄 남편에게 이혼 통보를 받고는 되돌아갈 직장을 찾기 어려운 경우를 수없이 보았다. 이젠 언제 닥칠지 모르는 이혼 후 삶을 대비해서라도 여성은 직장을 놓기 힘든 시대가 되었다. 그래서 몇 시간째 전화통을 붙들고 힘겨움을 호소하는 친구에게 아이들과 가정을 위해 네 커리어를 접고 집에 머물라고 조언하기도 쉽지 않다.


여성의 지위가 과거에 비해 많이 향상되었다 한다. 그러나 가정과 직장을 병행하며 살아온 한 여성으로서 그건 아직도 머나먼 나라의 얘기처럼 들리는 건 나만의 생각은 아닐 것이다. 여전히 여전사의 삶을 고수하지 않고는, 슈퍼 워먼의 일상을 견뎌내지 않고는 내 직업을 지킬 수 없는 것이 여성들의 현실이다.

어느새 신호등은 파란불로 바뀌었다. 출근길 차 안에서 바삐 화장을 하던 그녀는 루즈칠을 채 마무리하지 못한 채 급히 차를 출발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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