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1.2021
할로윈이다. 아이들이 성장해 집을 떠나고 나니 할로윈 날을 깜빡 잊을 때가 많다. 퇴근해 저녁을 먹던 중 벨소리에 무심코 문을 열었다가 '트릿 오어 트릭!' 외치는 동네 아이들을 마주하고서야 "어머 오늘이 할로윈이구나" 알아차릴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어떤 날은 뒤늦게야 할로윈 날인 줄 알아채고 부랴부랴 집안의 불을 끄고 숨죽이고 있는 날도 있다. 불 꺼진 우리 집을 아이들이 그냥 지나칠 때는 나의 성의 없음이 미안했다.
아이들이 온갖 분장을 하고 밤에 이집 저집 들러 사탕을 모으는 할로윈, 일부에선 상술로 보는 부정적인 시각도 있지만 이런 밤마실의 들뜬 추억이 없다면 삶은 동치미 없이 먹는 팍팍한 고구마 같지 않을까.
아이들과 함께 했던 할로윈이 그리운 날이면 가끔 후배네 아이들과 동네 밤길을 다니기도 했다. 그나마도 아이들을 빌릴?수 없을 때면 혼자서라도 동네 아이들 틈에 섞여 동심으로 돌아가 걸었다. 갖가지 분장을 하고 들떠서 이집 저집 몰려다니는 아이들을 바라보기만 해도 좋았다.
어린 시절, 저녁을 먹다가도 친구들이 "재숙아 노올자~" 부르면 숟가락을 팽개치고 달려 나가곤 했다. 어두운 골목길에 모여 하는 이병놀이나 귀신놀이는 밤이 깊어가는 줄 모르게 재미있었다. 장롱을 뒤져 엄마 옷을 꺼내 입고 나를 알아보지 못하게 온갖 변장을 하곤 서로 숨고 찾고 했었다. 술래가 전봇대에 이마를 대고 눈을 감고 열을 세는 동안 우리는 각자 흩어져 구석진데 꽁꽁 숨어 술래가 찾으러 나설 때까지 숨죽였다. 술래가 가까이 오면 행여 들킬세라 침조차 삼키지 못하던 그 긴장된 순간이나, 나를 찾지 못하고 엉뚱한 곳을 헤맬 때 요때다 하고 달려 나가 전봇대에 "쩬"하고 외치던 그 통쾌한 순간은 지금 생각해도 짜릿한 기억이다. 밤 골목길에서 우리는 귀신 잡는 영웅이라도 된 냥 씩씩하게 뛰어다녔다. 엄마가 집에 돌아갈 시간이라고 부르면 헤어지기 아쉬워 마지못해 집을 향하던 그 시절, 우린 그렇게 밤과 어울려 놀았다.
미국 와서 처음 맞은 할로윈 날은 어린 시절 이병놀이를 하던 그 때를 떠올리게 했다. 저녁 9시면 동네가 캄캄하게 잠들어버리는 이곳의 긴 밤이 참으로 낯설었다. 밤마실 나갈 곳이라곤 눈 닦고 찾아봐도 없던 이곳에서 밤늦게 맘껏 돌아다닐 수 있는 날이 있다니 참으로 신나는 일이었다. 학교에서 할로윈 코스튬 행진을 한다 해서 처음 할로윈 가게를 찾았을 때의 아이들 표정 또한 잊을 수 없다. 별별 기괴한 복장으로 꾸며진 가게에서 눈이 휘둥그레져 신기해하는 아이들을 보며 나도 덩달아 구경삼매경에 빠졌다.
큰아이는 마녀로 변신해 처음 맞는 할로윈을 친구 아빠의 트럭 뒤에 타고 신나게 밤을 누비고는 흥분으로 가득 차 재잘대며 돌아왔다. 작은아이가 고른 첫 할로윈 복장은 조로였다. 검은 옷에 검은 복면을 하고 플라스틱 칼을 허리에 찬 아이는 더 이상 영어 미숙으로 주눅 든 아이가 아니었다. 할로윈 행진 때 조로로 변신해 칼을 휘두르며 정의의 용사가 된 아들은 으쓱해져 어깨를 펴고 당당히 걸었다. 평소에 부끄럼 많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할로윈이 지나고도 한참 동안 매일 조로로 변신해 악당인 엄마 아빠를 물리치던 아들은 아예 조로 복장을 한 채 잠들기도 했다. 꿈속에서 얼마나 많은 악당을 물리쳤을까.
요즘은 본캐(본 캐릭터), 부캐(부캐릭터)란 신조어까지 등장해 자신의 또 다른 모습을 보여주려는 시대가 아닌가. 할로윈 날 만큼은 평소에 내가 꿈꾸던 나의 멋진 부케를 맘껏 드러내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날만은 평소의 용기 없고 찌질한 내가 아닌 정의에 불타는 영웅도 되어보고 마술 봉을 휘두르는 마녀도 되어보고 왕자님을 만날 공주도 되어본다. 어둠과 가면이 나를 가려주니 더더욱 용감무쌍해질 수밖에.
오늘밤 할로윈을 즐기려 동네를 걸었다. 집집마다 온갖 무서운 장식으로 가득했다. 아예 관을 정원에 내놓고 주인이 들어가 누워 놀래키는 집이 있는가 하면 해골과 조명으로 가까이 가기조차 섬뜩한 집도 있었다. 거미줄과 박쥐 모형으로 꾸며 폐가처럼 으스스한 집도 있었다. 시에선 할로윈 장식을 멋지게 한 집을 선정해 상을 주기도 한다. 미국에 와 살면서 축제가 많은 이곳 문화가 신선했다. 축제 때마다 집들은 특이한 장식으로 꾸며진다. 10월 할로윈에는 동네 전체가 유령마을이 되었다가 추수감사절에는 풍성한 수확기의 농가로 변신하고 곧이어 크리스마스의 구유와 산타로 채워진다. 삶을 축제처럼 이웃과 함께 웃고 마시고 즐기다 가는 것도 멋지지 않은가.
오늘도 동네는 축제분위기로 가득하다.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할로윈 분장을 하고 밖으로 나와 웃고 떠든다. 사느라 바빠 소원하던 이웃과도 따뜻한 차와 할로윈 쿠키를 내놓고 그동안의 밀렸던 이야기를 나눈다. 사춘기 소년들은 낄낄거리며 친구들과 몰려다니고 꼬마들은 바구니가 초콜릿으로 채워지는 게 마냥 신나 이집 저집 뛰어다닌다.
조금 전까지 아이들로 시끌벅적하던 골목길이 이제 조금 조용해졌다. 호박 분장을 한 저 꼬마 아가씨는 집에 가서 오늘의 수확인 사탕과 초콜릿을 쏟아내며 누가 많이 모았나 언니와 견주기도 할 것이다. 이 날만큼은 엄마 눈치 보지 않고 달달한 초콜릿과 사탕을 맘껏 먹고 할로윈 밤의 꿈을 꾸며 잠들 것이다.
농부의 곳간이 추수한 작물로 가득 채워 지는 것처럼 아이들의 마음 곳간에도 달콤한 초콜릿과 스릴 있던 할로윈 밤 추억이 가득 쌓일 것이다. 탱규 할로윈이다.